양구읍은 양구군의 행정, 교통, 산업의 중심지로 동쪽은 동면과 국토정중앙면, 남쪽은 춘천시 북산면, 서쪽은 화천군 간동면, 북쪽은 방산면에 닿아 있다. 현재 중리, 상리, 송청, 수인, 웅진, 석현, 학조, 안대, 한전, 공리, 이리, 정림, 죽곡, 하리, 고대, 동수, 월명, 도사, 공수, 군량, 상무룡, 21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양구읍 소개 자세히보기
<출처 :양구군청>
# 양구읍 지명
양구군 지명 자세히보기(양구문화원)
광대바위는 양구읍 하리 숙원로 옛길 파로호 변에 반쯤 묻혀 있던 집채만 한 바위로 선사박물관 고인돌공원을 만들면서 묻혀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광대바위가 있던 곳은 주도로에서 백두병원으로 가기전 굴곡이 심한 커브가 있는데 이 도로변에 떨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본래 이 바위는 산 중턱에서 동수리의 용의 머리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바위의 생김새가 ‘광대’ 비슷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산위에 있던 바위가 바닥에 굴러 떨어지게 된 사연이 전설이 되어 전해오고 있다.
'약 300여년전 숙종 때 인제 출신인 홍종백이란 지술에 능한 풍수가 있었다. 그는 남면 용하리에 살고 있는 파평 윤씨 집안의 부탁을 받아 용의 머리인 곳에 좋은 묘자리에 그 조상 묘터를 잡아주면서 “자손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차츰 벼슬길에 올라 고관직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나의 공을 알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여기에 묘를 쓰고 난 후에 과연 풍수의 말대로 그 자손 윤세정(尹世挺,1639년 숙종25년)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도총(都摠)이란 관직에서 시작하여 차츰 올라가 칠원현감, 옹진수사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현감이 되었을 때 풍수 홍종백이 그를 관아로 찾아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윤현감은 지난날의 은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를 냉대하여 쫒아냈다.
분개한 홍지관은 마음속에 그 앙갚음을 하고 말리라는 다짐을 하며 돌아왔다. 함춘에 돌아온 그는 마을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충동질을 하였다.
“이 함춘마을은 어느 모로 보나 살기 좋은 마을이다. 그런데 단지 저 광대바위가 있어서 그것이 흠에 되어 반촌이 못되고 역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양반들에게 역놈이라고 천대받고 지내는 것이니 이 얼마나 자손만대에 억울한 일이겠소.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저 광대바위를 굴러 떨어뜨려야 하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역놈소리 듣기가 가뜩이나 싫었는데 용한 풍수를 만나 듣고 보니 그럴듯해 바로 광대바위 처리를 위하여 논의를 시작했다. 그래서 온 마을의 남녀노소가 힘을 모아 그 바위를 떨어뜨리기로 했다.
굵은 밧줄로 묶어 잡아다니고 밀고하자 그 큰 바위도 마침내 벼락치는 소리를 내더니 갯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홍종백이 윤씨 문중의 묘를 거기에 잡은 것은 광대바위가 바로 정면에 있었기때문이다. 광대란 본시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므로 광대바위가 정면에 있으므로 대대손손 벼슬이 높아져 명당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바위가 굴러 떨어졌으니 그 묘의 정기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홍지관의 말대로 돼서 그런지 칠원현감 윤세정은 옹진수사로 발탁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도중 그만 파직을 당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양구읍 하3리에 둥굴봉이라는 동그랗고 나지막한 봉우리가 있다. 둥굴다하여 원봉 또는 둥굴봉이라고 부른다. 이 둥굴봉 남쪽에 굴이 하나 뚫려 있는데 이 굴을 마을사람들은 굴바위라고 부른다. 이 굴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하리 장정들이 이 바위굴에 불을 피우고 작대기로 쑤시면 이 바위굴과 마주한 남면 죽리 아낙들이 바람이 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구읍 한전리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봉화정씨(奉化鄭氏) 문중에 운하(橒夏)라는 사람이 한전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 처럼 산에 있는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있었다. 그에게 마음씨 곱고 매우 정숙한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세구(朴世九)의 딸이었다. 그 부인이 김을 매고 있는 남편을 위해 점심을 싸서 이고 밭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보니 마침 크고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남편 정씨를 해치고 있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박씨는 물불가리지 않고 남편을 해치고 있는 호랑이에게 덤벼들었다. 호랑이의 목을 두 팔로 껴안고 매달렸으나, 결국 이 가냘픈 여인의 힘으로는 호랑이를 대항할 수 없었다. 먼저 해를 당한 남편은 말 할 것도 없고 목에 매달렸던 부인도 기진맥진한 끝에 혼절해서 마침내 호랑이의 발톱과 이빨에 찢겨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 부부의 참혹한 죽음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다 부부를 합장해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얼마 후 무덤위에 소나무 한그루가 솟아나더니 매우 잘 자랐다. 기이하게도 그 소나무는 뿌리가 하나인데 가지는 두 갈래로 갈라진 一根 雙株松이었다. 소나무가 크게 자라자 무덤위에 소나무가 자라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베어버렸다, 그러자 벤 자리에서 피처럼 붉은 물이 고여 올랐다. 그 뒤 신기하게도 이 소나무는 벤 자리에서 새순이 돋아나와 또 자라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필경 이것은 남편을 위해 자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들던 박씨의 정절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을 조정에 아뢰어 純祖 甲戌年(1814년)에 烈女旌閭가 내려졌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소나무에 새순을 돋게 한 기적을 가리켜 《松芽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 고을을 볼 수 있다고 이름 지어진 사명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는 초입에 문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커다란 대문처럼 양쪽에 10여미터의 바위가 서있다 대문처럼 생긴 문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문바위 주변이 산세가 수려하여 심신을 닦는 수도자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곳이었다. 이곳에 움집이나 암자를 짓고 참선을 하며 오묘한 진리를 깨우치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하도 많은 사람과 사연들이 넘나들어 문 바위이기도 한 이 문바위는 바람과 구름의 문이며 엄과 인연의 문이며 극락과 지옥의 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문바위의 밑 부분이 펑퍼짐하여 여인이 치맛자락을 늘어뜨리고 푹 주저앉은 형상으로 음기가 세어서 여인네들의 치성발이 잘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때마다 보살이나 무당들이 이 문바위를 찾아 오랫동안 치성을 드리고 소원을 빌면 없던 재물도 생기고 머물던 재앙도 쫒아내고 자식 없는 사람에겐 자식이 생기고 집 떠난 남편도 돌아오게 한다고 하여 뭇 여인들의 위안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온다.
최근 웅진리와 수인리에 사명산 등산로가 개설되어 모든 등산객이 사명산에 올랐다가 이 문바위를 거쳐 수인리로 내려가거나 수인리에서 문바위를 거쳐 사명산에 오르곤 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문바위 위에 출렁다리가 있었으나 위험하여 철거하고 문바위 위에 세워진 7층 석탑만 남아있다.
양구읍 공리와 석현리를 경계한 고개이다. 해발 285m의 별로 높지도 않은 이 고개를 양구사람들은 제일 많이 넘어 다녔다. 그 길이 춘천, 서울로 오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양구에서 남쪽에 난 유일한 고개였다.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이전까지 양구는 수로를 많이 이용했다. 함춘역에서 상무룡리를 거쳐 반구뫼선착장(화천 모일)을 통해 춘천과 서울을 잇는 수로와 도리관역원(원리 난뿌리 선착장)에서 소양강을 통해 춘천과 서울로 식량과 식염 등 생활물자를 수송했다.
1928년 양구 실학고개를 넘어 춘천까지 48㎞의 자동차 노선이 처음 개설되기 전까지는 모든 운송수단은 선박이나 뗏목에 의한 수로를 이용했다.
1936년 양구에서 상무룡리 화천 구만리를 연결하는 40㎞의 노선도 개통되었다. 1943년 화천댐이 이 길을 막으면서 화천으로 경유하던 길이 막히고 60여년간 오직 실학고개만이 나가는 길이었다. 해방이 되고 38선이 그어지면서 월남할 때도 실학고개를 넘어야 했고 한국전쟁 중 피난길도 실학고개를 넘어야 했다.
1973년 소양강댐의 완공으로 실학고개 6부 능선까지 담수되면서 굽이굽이 해발 210m의 등고선을 따라 이설도로가 개설되어 실학고개 마루에서 석현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는 짧아졌지만 실학고개를 넘어야 춘천이나 서울로 갈 수 있었다,
옛날에는 실학고개를 어떻게 불렀을까? 조선초기에는 이 고개를 포천현이라 불린 것 같다. 1531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포천현(鋪遷峴):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길이 매우 험하고 막혀서 잔도(棧道, 출렁다리)를 만들어 달아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시락현(時洛峴)이라는 고개가 나오고 통천현이나 포천현이라는 고개가 그려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락현으로 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보다 35년 후에 발간된 양구군읍지에 통천현이라고 기재돼 있어 시락현이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정착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1896년 발간된 양구군읍지에는 『統川峴 在郡 南 二十里 連脉 都里串峴遷路 惎嶮(통천현 재군 남 20리 연맥 도리곶현 천로 기험)』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양구에 남쪽으로 난 유일한 고개였다. 즉 통천현은 군청에서 남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도리곶현(도촌리의 되래지고개)과 맥이 이어져 있으며 길이 험하다 라는 뜻이다.
자동차가 없고 우마차와 걸어 다니던 시절엔 실학고개는 험한 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30년도 관동지 양구현의 관어배치도에 양구 남쪽에 포천현과 남강이 그려져 있다. 실학고개는 포천현, 통천현, 시락현, 실학고개로 이름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의 실학고개는 지금의 고갯길이 아니었다. 현대적인 장비에 힘입어 고개를 낮추고 넓히고 고갯길을 직선화했지만 우리가 걸어 다니고 우마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현재의 고갯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마차가 다닐 수 있으려면 석현리에서 내심포리를 거처 봉화산 지르메니 고개를 넘어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실학고개의 경사는 우마차가 다니기엔 경사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1911년 일제는 전국에 741㎞키로의 신작로를 닦았다고 한다. 그 당시 이 길이 닦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10년 일제는 토지수탈 목적으로 지적 세부측량을 실시했다. 마을길을 6자(1.8m)너비로 정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대부분 하천을 따라 길을 만들었다.
석현리의 지적도를 보면 6자 마을길이 석현천을 따라 내심포를 거처 지르메니 고개를 넘어 심포리로 이어지고 공리천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학고개에 대한 두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먼저 학을 잃어버렸다는 실학에 대한 전설은
【黃鳥里라는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부자는 부모님의 묘를 명당에 써서 자손이 번창 하고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소원이었다.
마침 이 부자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지관에게 아버지의 산소 쓸 만한 곳을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지관은 이 부자에게 묘소를 정해주면서 이 자리에 분명히 학이 숨어있어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 하고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묘를 팔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묘의 깊이를 너무 파서 잠자고 있는 학을 깨우면 학이 날아가 버려, 명당으로서의 정기가 빠져 나가니 석자 반을 절대 넘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장례날이 다가와 상주는 묘를 파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석자 반을 넘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묘 자리를 파는 인부들은 왜 석자 반을 파라는지 그 뜻을 모르고 있었다.
인부들은 석자 반을 팠으나 너무 얕은 것 같아 더 파내려가자 흰 학 한마리가 날아 올라왔다. 묘 자리에서 나온 흰 학은 그곳을 지나 석현(돌고개)에 날아가 앉았다 한다. 상주는 경솔함을 후회하면서 학이 앉았던 곳을 쫒아가 보았으나 학은 이미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상주는 그곳에서 영영 학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후부터 이 고개를 학을 잃어버린 고개, 즉 실학(失鶴)고개라 부르게 되었으며 黃鳥里를 이후 鶴鳥里라 부르게 되었다】
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시락고개 라고 부르는 전설이다.
【옛날 시락(時洛)이라는 장사가 이 고개에서 죽어 그 후부터 「시락고개」라 불렸다】는 전설도 전해 오고 있다.
학조리 마을에 한새골이라는 자연부락에 장사 탄생에 얽힌 전설이 오래 전부터 전해오고 있다.
【옛날 왕두골이라 부르는 이곳에 살던 한 집안에 귀여운 옥동자가 태어났다. 일손이 바쁜 농번기라 아기만 집에 두고 일터에 나갔다가 일손을 멈추고 집에 돌아와 보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기가 시렁위에 앉아 있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깜짝 놀랐던 부모가 기가 막혀 살펴보니 아기의 양쪽 겨드랑이에 기이하게도 날개가 달려 있었다. 당시만 하여도 집안에 장사가 태어나면 삼족까지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학대를 받게 된다는 세습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의논 끝에 땅속에다 매장하고 그 위에 큰 바위를 눌러 놓았다. 바위에 눌린 아기는 석달 남짓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조용해졌고, 장사가 나면 함께 나온다는 용마가 어디선지 뛰어 나와 사흘간이나 울부짖다가 사라졌다.】 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장사가 태어나면 이 장사를 태우고 다닐 용마가 태어나는데 주인인 아기가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을 참지 못하여 울부짖다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곳 왕두골을 용마골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엽부터 한사골(寒沙谷)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일부 주민의 의견에 따르면 이리와 경계가 있는 골짜기를 지금도 왕두골이라 부르며, 왕두골과 한새골을 합쳐 이 전설에서 한새골이라 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사골이 한글화 되면서 한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최근 마을 어귀에 한새골이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양구읍 군량리와 관계된 전설이 인제군 김부리와 관련하여 전해오고 있다.
군량리와 관련된 전설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결부하여 또 다른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인제 김부리와 군량리와 관련된 전설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을 한 뒤의 일이다. 김부왕(마의태자:신라 경순왕의 아들)은 천추의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수십명의 수족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하여 왕도 경주를 떠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강원도 인제군 남면 김부리까지 와서는 피로한 몸을 쉬기 위하여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로해서 뒷날 이곳을 김부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수족병 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맹(孟)장군이란 이가 의병을 초모하여서 왕건(王建)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김부왕께 주달하자 김부왕도 이것을 찬성하여 곧 좌우의 여러 신하들을 여러 고을로 보내어서 의병을 초모해 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지금의 양구군 북면(양구읍) 군량리 넓은 벌에서 초모해 온 의병을 일변 훈련을 시키고, 한편으로는 그곳에다 군량고(軍糧庫)를 쌓고, 군량미(軍糧米)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이 거사를 하기 전에 맹장군은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장군을 잃은 수백 명의 의병들은 비통한 나머지 가슴을 쳤을 뿐이고 맹장군의 유품을 묻은 뒤로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뒷날 군량고가 있던 곳을 군량리(軍糧里)라 하였다】 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1947년 최상수(崔常壽)의《조선지명전설집》에 쓰여진 <김부리와 군량리>이다.
군량리는 과거 북면의 소재지로 1963.1.1자로 양구면에 편입되었으며, 북면출장소와 북면지서가 있는 등 소재지로서의 큰 마을이었다.
군량리는 마을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군과 양곡, 전쟁 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전설인 〈담안마을, 검무정(劒舞亭)골, 마석봉(馬石峰), 말밭(馬田), 고적봉(鼓笛峯), 노고성(老姑城), 성골(城谷), 정승(政丞)무덤〉등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군량리란 지명은 신라 말기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철원군 북면 공술리에 도읍을 정하고 중부지방을 활거통치(911년)할 때 군량창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담안마을(담안에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이 이 전설을 실증해 주고 있으며 석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골령(城谷嶺)은 군량리 북서를 포위한 능선에 있는 혐악한 교통로이다. 이 능선의 동남쪽에는 노고성이란 천연 성곽을 방불케 하는 군사 전략지를 형성하고 있다.】
【검무정골은 군사들의 무술을 연마시키기 위해 이 골짜기에서 칼춤을 추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적봉은 군사 훈련에 필요한 각종 신호를 이 봉에서 새납(나팔)을 불며 훈련신호를 한 봉우리라고 고적봉이라 불렸다.】
【마석봉은 일명 〈숫돌봉〉이라고 부르는데 이 봉에서 생산된 숫돌에 검(劒)과 창(愴)을 갈았다고 한다.】
【마전(馬田)은 지금은 침수되었지만 넓은 뜰인데, 군마(軍馬)를 방목하던 곳으로 마전이라고 불렀다.】
【정승 무덤은 과거 북면지서 뒷산에 있는데 수십년전에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었다. 서기 1216년 고려 고종 3년 몽고족(호족)이 대거 침입해 와서 전국이 전란으로 휩싸이게 되자 고종은 지구전으로 항전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하면서 왕손을 전국각지에 파견하여 항전하게 하였다. 군량리의 군사기지에도 왕손을 따라온 정승이 있었는데 병사하여 현지 주민들이 후에 장사를 지내고 묘를 썼다고 하여 정승무덤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군사와 관련된 많은 전설과 설화가 전해지며 아직도 이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1551년(명종6년) 파주 천현리에서 출생한 김현도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민하고 영특하여 13세 때에 벌써 문학이 대성하였다. 당시에 지은 <창오모색(蒼梧暮色>이라는 장편시는 천하의 명문으로 문장 대가들이 그 글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1576년 26세에 문과 별시에 급제한 후 첫 벼슬로 주서에 오른데 이어서 군자감정, 선무랑, 사간원사간, 성균관전적, 도호부사, 목사 등을 거쳐서 예조참의에까지 승직하였다.
1587년(선조20년) 5월 11일부터 1592년 5월까지 양구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겨 놓았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해 6월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여 자리에 누우니 현감은 밤에도 자지 않고 항상 의대를 풀지 아니하고 의약을 손수 시탕하고 때로는 대변을 맛 보아가며 병의 차도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일 목욕시키고 밤이면 북두칠성을 향하여 어머니의 병환이 쾌유하기를 신령님께 비는 등 자식으로서의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12월 엄동설한인 어느 날 밤 현감이 제릉 향관으로 재실에서 숙직을 하니 꿈에 어느 도사가 소리를 높여 말하되 “너의 효성이 지극하니 좋은 약을 주겠다.”하는 지라 이 소리를 듣고 깨어난 즉 인적은 없고 텅 비어 있는 재실에는 자신 혼자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반드시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한 신령님의 계시라고 생각하고 날 새기를 기다려 하얀 눈이 쌓인 길에 말을 겨우 몰아 사제로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 마리의 독수리가 구름 사이로 날아오다가 〈가물치〉두 마리를 현감이 타고 가는 말머리 앞에 떨어뜨렸다.
현감은 지난 밤 꿈 생각이 나서 이것이 필시 영약이라 생각하고 가물치 두 마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다려서 숨이 곧 끊어질 것 같은 어머니의 입에 수저로 조금씩 흘려 넣으니 잠시 후 병기가 내리고 정신이 들면서 신통한 효력이 있으므로 두 마리의 가물치를 계속하여 먹은 후에 병근이 완전히 제거되어 완쾌의 기쁨을 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592년 양구 현감에서 임기가 끝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해안면 오리동에 거처하였다. 이듬해 함경도 정평도호부사로 제수되어 부임하였으나 임진왜란 중이라 장정들을 소집하여 서울에 가서 수위케 하고 노약자들은 농사에 힘쓰게 하는 등 충직한 인품이었다. 김현도의 이 같은 일을 들은 선조대왕께서는 〈성심애민 진직불태(誠心愛民 盡職不怠)〉라고 어포를 내리셨다고 한다.
44세 때 모부인은 아들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천명은 할 수 없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현도는 파주군 북방현에다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어머님 묘 앞에서 거처를 하면서 효절을 다 하였다.
거상을 치른 후에는 2년 동안 벼슬자리를 떠나 양구 서암사에서 한가한 세월을 보내면서 금강산에도 유람하고 매월당과 봉래 유적을 탐구하였다.
50세에 강원도 이천부사로 제수되었으니 양구 역사상 은인이라 양구 서암사 삼현의 한 사람에 배향되었다.
1611년 3월 25일 김현도가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파주군에 안장하였다.
백기수 군수는 1896년 7월12일 양구군수로 부임하여 1899년 9월12일까지 양구군수를 지내신 분이다. 이전까지는 현감이라 부르다가 처음 군수 명칭으로 양구군수로 부임하였다. 양구군수 재임 후 양구군민이 세운 공덕비가 지금도 남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백기수군수가 양구군수로 발령을 받고 양구로 부임 때의 일이라고 한다. 백군수는 부임 도중 경기도 가평군수인 최오라는 사람의 후의로 가평에서 하루를 쉬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날 부근 농민들이 군수의 집에 몰려들었다. 사연인즉 지난밤에 자기 집에서 기르는 검은 암소가 혀가 잘려서 먹이를 못 먹고 죽어가고 있으니 양순한 짐승인 소의 혀를 잘라낸 범인을 찾아서 문책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가평군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남 몰래 밤중에 소의 혀를 잘라 낸 사람을 찾아 낼 방도가 없어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목격한 백기수 군수는 “내가 한 번 찾아보리까?”하고 넌지시 제의하였다.
그랬더니 가평군수는 구세주나 만난 듯 백기수 군수에게 매달려 범인을 찾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백기수 군수는
“그러면 영감은 그 혀가 잘린 검은 암소를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해주시고 마을 사람들과 인근 사람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 주시오.”
라고 말했다. 가평군수는 관원에게 명을 내려 혀가 잘린 검은 암소와 온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 백군수는 다시 가평군수에게
“모인 사람들은 한 사람씩 혀 잘린 소에게 꼴을 먹이도록 해 보시오.”
하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평군수의 지시에 따라 한 사람씩 꼴 한 줌씩을 뜯어다가 혀 짤린 소에게 먹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백군수는 유심히 소의 태도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가평 군수는 혀가 잘려 꼴을 먹지 못하는 소에게 왜 꼴을 먹이려 하는 것인가 하고 모두 의아했다. 마을 사람들이 꼴을 가지고 와 소에게 차례로 먹이려 하였으나 혀 잘린 소는 꼴에 접근하면서도 그저 냄새만 맡을 뿐 먹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받아먹지 못하는 꼴을 몇 사람이 권하고 지나간 다음 한 청년이 다른 사람이 하던 것처럼 꼴을 한 줌 쥐고 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혀 잘린 검은 암소는 꼴에 가까이 가서 그것을 먹이려고 애쓰던 다른 사람 때와는 달리 몸을 떨면서 피했다. 이것을 본 백군수는 “이놈!”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백군수의 호령이 떨어지자 그 청년은 땅에 부복하고 말았다. 백군수는 다시 청년에게 아무 것도 다그쳐 묻지 않았으나 청년은 입을 열고 자백했다.
“실은 저의 어머니가 병이 들어서 약을 써도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늙은 어머니의 병을 어떻게 하면 낫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날마다 근심하고 있던 중에 검은 암소의 혀를 구워 잡수시도록 하면 병이 낫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에게 검은 암소를 사다 그 혀를 잘라 내어 드릴 수도 없고 하여 생각다 못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울면서 고백했다.
잠시나마 함께 도둑의 누명을 썼던 마을 사람들은 남은 소의 혀를 잘라내서 짐승을 죽게 하였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청년을 처벌하라고 달려들었다. 이런 모습을 본 백군수는 다시 가평군수에게 청했다.
“마을 사람들의 도둑 누명을 벗겨 준 것도 나요, 소의 주인에게 범인을 찾아 준 것도 나이니, 이번은 내 청을 들어주시오.”했다.
가평군수는 그 청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백군수는,
“그것이 비록 남의 짐승을 해친 나쁜 짓이었으나 효도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그 청년을 관대히 처벌해 주시오.”
하고 청년을 놓아 줄 것을 청했다.
가평군수는 백군수의 청을 받아 들어줬다. 백군수의 임기웅변적인 지혜는 가평군수로서는 채 생각하지 못했던 지혜를 보여 군수로 하여금 군민들의 청원을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효심이 있는 청년을 다시 개과천선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되었다.】
는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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