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군의 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상동면이라 부르다가 동면으로 개칭하였다. 현재 후곡리, 지석1.2리, 원당리, 덕곡1.2리, 임당1.2리, 월운리, 팔랑1.2리등 11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 양구 동면
동면 소개 자세히보기
<출처: 양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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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군 지명 자세히보기(양구문화원)
동면 후곡리 대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후곡약수는 위장병의 특효약수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약수가 발견된 설화 두가지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소 때문에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와 예안김씨가 현몽하여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 말엽인 1880년경 이곳은 초원이 무성하여 소를 방목했는데 위장병을 앓고 있는 소가 다래 덤불 밑에서 물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석양 무렵 소를 끌어다 우사에 넣었는데 평소 설사가 심하던 이 소가 다음날 아침에 본즉 설사가 멎어 있었다.
주인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어제 설사하던 소가 종일 먹던 샘물을 찾아 시음한 바 약수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를 주민에게 알리고 주변의 무성한 수풀을 제거하니 암석에서 졸졸 흘러 고인 바가지형 약수터를 발견하였다】
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소 때문에 발견된 약수라는 것이다.
이 약수는 그 후 위장병치료 약수로 널리 알려져 우리 군민은 물론 다른 고장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위장병을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후곡약수를 발견하게 된 또 다른 이야기는
【조선 말기인 1880년경 후곡리 마을에 예안김씨가 살고 있었다. 김씨가 산후 중병으로 자리에 누운지 수개월이 지나 병세가 악화되자 남편은 초약을 다려주고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효험이 없고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병세는 점점 더해만 갔다. 그리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무렵 김씨의 꿈에 풍신 좋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어느 지점에 가서 암석을 들추면 약수가 나올 터이니 가서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에게 업혀가 꿈에 가르쳐 준 곳에 가서 암석을 들추고 약수를 발견하여 약수를 마신지 7일 만에 기이하게도 병이 완쾌하여 잘 살았다.】
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후곡 약수터는 주변을 정비하여 주차장등 편의시설을 완비하고 최근 이곳 주변에 〈자연치유센터〉가 건립되어 주민들의 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동면 원당리에 저고리골이란 골짜기가 있다. 옛부터 지형이 저고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골짜기라고 한다. 저고리골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옛날 숲이 무성한 이 골짜기에 커다란 호랑이가 살고 있어 돌산령을 비롯한 대암산 인근 마을에서는 늘 불안한 생활을 해 왔다. 어느날 호랑이가 이 골짜기에 나물 뜯으러 온 사람을 잡아먹고 저고리만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던 골이라 하여 그 후부터 저고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 온다.
동면 팔랑리에서 도솔산으로 향해 가다보면 1km 남짓한 지점에 우뚝 선 큰 바위 하나가 있다. 그 모양이 마치 고깔을 쓰고 있는 중 같기고 하고 또 감투를 쓴 선비 같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바위를 고깔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 도솔산 기슭에 심곡사(深谷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많은 승려들이 있어서 대단히 번성하여 그들의 행패가 극심하였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이곳에 사는 유생들은 이것을 대단히 걱정하여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늘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이 집에 허름한 모양을 한 도인 한 분이 찾아 들어 하룻밤 유숙해 가기를 간청했다. 주인은 쾌히 승낙하고 자기 방으로 인도하여 밤을 새워 환담을 나누었다. 조석 대접을 잘 받은 나그네는 마음속으로 주인의 후덕을 감사해 하였고, 작별인사를 나누러 나온 주인을 돌아보며 지팡이로 고깔바위를 가리키면서
“이 마을에는 저 바위가 큰 걱정거리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바위는 그 모양이 마치 고깔을 쓴 중과 같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몹시 아끼며 고깔바위라고 부르는데 큰 걱정거리라니 알 수 없는 말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주인의 말을 들은 도인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 마을의 형상이 마치 중의 바랑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바랑골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다 이 고깔바위가 마을 어귀에 떡 버티고 섰으니, 이 마을에 중들이 번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승려들의 행패마저 많을 것이니 어찌 큰 걱정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러한 폐단이 생긴 것은 모두 이 골 이름과 바위 때문인 듯하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자 도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주인은 그의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도인이 가르쳐 주려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바랑골은 음이 비슷한 팔랑동으로, 고깔바위는 모양이 닮은 감투바위로 이름을 고쳐 짖고 그날로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쓰게 했다. 이 새 이름이 귀에 익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어느 때부터 인지 심곡사 승려들의 극성도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고 날로 그 행패도 없어져 풍속도 나아지고 유생들이 마을 일에 힘을 쓰게 되었다.】
팔형제가 낭관이 되었다고 팔랑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유래가 옛부터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조선 중엽 함경도에 살던 전주 이씨인 이학장이라는 도사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오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태백산맥의 골짜기를 더듬어 오다가 양구 동북방 도솔산 남쪽에 있는 동면 팔랑리에 이르렀다. 이 곳 산수가 가히 자기의 뼈를 묻을 만 한 곳이라고 생각한 그는 몇몇 친족들과 함께 여기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 도사는 몇 년 후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맞아들인 부인의 가슴에는 괴상하게도 유방이 넷이나 달려 있었다.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 부인과 백년을 해로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일하며 여기에서 살았다.
그 뒤 아기를 가진 부인은 달이 차서 해산을 하였는데 놀랍게도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 뒤 몇 년 후 부인은 또 자식을 낳았는데 이번에도 네쌍둥이 아들을 낳아 여덟 아들을 키웠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 부인의 유방이 네 개가 달려 있는 수수께끼를 풀게 되었다. 그와 그 부인은 온갖 정성을 다해 그 팔형제를 잘 길렀고 기골이 장대한 그들은 장성해서 모두 나란히 낭관 벼슬을 지냈다. 그 뒤로 이 마을을 팔랑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금은 도로 개설로 해안까지 가기가 수월하지만 과거 방산에서 해안을 가려면 수입천을 따라 비아리를 거쳐 비득고개를 넘어 전설에 나오는 월운리에서 팔랑리를 경유하여 돌산령을 넘어야 해안 만대리를 갈 수 있었다.
전설에 나오는 소문치 고개는 월운저수지 위쪽에서 팔랑리 자작정 부근으로 넘는 고개를 일컫는 것 같으며 지금 소문치라 부르는 고개는 없다. 월운리에서 팔랑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지장고개라 부른다.
【동면 월운리와 팔랑리 경계에 한 고개가 있으니 옛 부터 소문치라고 이름하여 불려오고 있다. 이 고갯길은 굵직한 참나무와 단풍나무 등 활엽수와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어 대낮에도 짐승이 출현하여 혼자 보행하기가 어려웠다.
고려말 방산면 고방산리의 한씨 가문에서 동면 해안의 만대리 안동김씨 가문으로 출가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친가인 고방산에 다니러 왔는데 돌연히 시가에서 시어머니가 별세하였다는 비보가 전해오자 만사를 제쳐놓고 한씨 여인은 시가로 향하였다.
평소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절개를 지켜온 한씨 여인은 날이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떠나 소문치에 당도하니 깊은 밤이 되었다.
난데없이 산천이 흔들리는 고함소리와 함께 큰 호랑이가 나타나 앞을 막으니 한씨 여인은 이를 악물고 호랑이와 싸웠으나 도저히 길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문득 꾀를 부려 주저앉아 옷을 벗고 나체로 양 다리를 하늘로 뻗치고 드러누웠다. 마침 월경이 있을 때였다.
사람을 희롱하던 호랑이는 자세히 보니 사람은 간 곳 없고 세상에 태어나서 보지 못하였던 짐승이 입은 째지고 방금 짐승을 잡아먹었는지 입에 선혈이 짙어 보여 세상에서 처음 보는 괴이한 짐승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괴이한 짐승을 본 호랑이는 혼비백산하여 깊은 산속으로 도주하고 이때 혼이 난 호랑이는 다시는 돌산령 일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한씨 여인은 호랑이를 물리치고 밤을 새워 이튿날 아침 시집에 와서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데 그 후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질고개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고인돌, 괸돌, 지석묘 등 고인돌이 선사시대의 무덤이라는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이야기다. 양구지역에서 고인돌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데 마을 명칭을 지석이라 쓰는 마을은 동면의 지석리 뿐이다.
한국전쟁 전 지석리에는 고인돌 한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 고인돌이 한국전쟁 중 현재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를 닦을 때 파괴되고 땅속에 묻혀버렸다고 전해진다.
1942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크기가 2간(間)이나 되는 덮개돌이 있다고 조사되어 있다. 이 바위는 고인돌이었지만 마을에서는 바위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먼 옛날 신앙심이 두터운 어느 할머니가 신성한 곳에다 제단을 차려 놓는 것이 소원이어서 이 제단을 만들 돌을 사방으로 찾아 헤매다가 큰 돌을 발견하였다. 어찌나 큰지 사방 8자에 두께가 2자나 되는 돌을 머리에 이고 사방 석자에 두께가 두자나 되는 돌을 치마폭에 싸가지고 명당자리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만 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치마폭이 찢어져 더 가지 못하고 지석리 마을 한가운데인 그 자리에다 돌을 세우고 머리에 이고 온 큰 돌을 얹어놓아 제단을 차렸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서 이 제단에 제사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지석리란 마을 명칭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1759년에서 1819년 사이에 발행된 양구현지에 지석(支石)리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지석리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후곡리에 능아재라는 조그마한 고개가 하나 있다. 이 고개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후곡리 마을에 신랑 신부가 혼례를 치르고 가마를 타고 이 능아재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다. 가마에 탄 신부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타고 가던 가마를 멈추게 하고 가마에서 내려 소변을 보러 갔는데, 소변을 보러 간 신부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신부는 온데간데 없고 어떤 바위 위에 각시 머리만 놓여 있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각시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 바위가 있던 고개는 도로 확포장공사로 없어지고 각시바위가 있던 산봉우리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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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수목원(DMZ야생동물생태관, DMZ야생화분재원,목재문화체험관), 도솔산지구전투위령비, 도솔산, 곰취마을, 월운저수지, 피의능선 전투전적비, 팔랑폭포, 팔랑민속관, 후곡약수터, 대암산용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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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명소 자세히보기(양구볼구양)
초등학교 : 원당초등학교, 임당초등학교
중학교 : 대암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