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면

                                                                                                                                                                                                                                                           

1.개요

방산면은 양구군의 위쪽에 위치한 면으로 DMZ를 포함하고 있으며, 양구 8경중의 하나인 두타연이 있다. 현재 장평(長坪), 칠전(漆田), 현리(縣里), 금악(金岳), 오미(五味), 천미(天尾), 송현(松峴), 고방산(古方山), 건솔(乾率)의 9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 방산면
방산면 소개 자세히보기

2.인구

2023년 기준(자료갱신일: 2023.3) / 단위 : 명
1,212총 인구수
681인구(남)
531인구(여)

# 방산면 인구

4.지명의 유래

  • 방산면(方山面) : 양구군 네면중 하나로 본래 고구려의 삼현현(三峴縣) 또는 밀파혜(密波兮)의 지역인데 신라경덕왕 16년(757)에 삼령현(三嶺縣)으로 고쳐서 양록군(楊麓郡)의 속현이 되고 고려때 방산현(方山縣)으로 고쳐 회양군(淮陽郡)에 딸렸다가 조선 세종6년(1424)에 다시 방원으로 재차 개칭하여 양구군(楊口郡)속하고 구후현을 없애고 방산면(方山面)이 되어 장평(長坪), 칠전(漆田), 현리(縣里), 금악(金岳), 오미(五味), 천미(天尾), 송현(松峴), 고방산(古方山), 건솔(乾率)의 9개리를 관할하였으나, 1945년~1950년에 이르기까지 공산치하에 강점되어 통치를 받았으나 6.25때 탄환하여 1954년 3월부터 군정을 실시하다 1954년 11월 17일 행정권을 이야받아 6개리 31반이였으나 1971년 송현리가 1.2로 나누워 지면서 7개리 31개반을 개편되었다.

  • 오미리(五味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의 지역으로서 외딴 산이므로 오미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러니, 송서울, 도중골, 피모개, 중간말, 낭구미, 움텃골, 남밭, 안터를 병합하여 오미리라 하였다.

  • 금악리(金岳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 지역으로서 사기를 굽는 막이 있었으므로 사기막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사금막(沙金幕)을 줄여서 금막(金幕)이 되었는데 방산사기그릇을 고령토의 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는데 지금도 방산 금악리 자기는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어 수집가들의 귀중한 보물로 되어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슬원, 골말, 버덩말, 성공을 병합하여 금악리라 하였다.

  • 현리(縣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 지역으로서 고려때 방산현(方山縣)이 고방산리(古方山里)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겼으므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춘말, 동님, 동매기를 병합하여 현리라 하였다.

  • 장평리(長坪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 지역으로서 넓고 긴 들이 있으므로 진두루 또는 장평(장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샛말, 자원, 선은골을 병합하여 장평리라 하였다.

  • 송현리(松峴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으므로 솔재, 소재 또는 송현(松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돈두루, 문장골, 솔골, 안궁골, 점말, 학령골, 등매동, 어두원리, 응달말을 병합하여 송현리라 하였으며 1954년 양구군 행정권 이양과 동시에 고방산리를 병합하여 송현2리로 편입되었다.

  • 칠전리(漆田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 지역으로서 옻나무밭이 있으므로 칠전(漆田)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큰 골을 병합하여 칠전이라 하였다. 1954년 군정으로부터 행정권 이양과 동시에 행정구역 확정으로 인구의 감소로 현리에 병합되었다.

  • 천미리(天尾里) : 본래 양구군 방산면 지역으로서 천미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큰골, 육터골, 횟골, 서역골, 감자골, 장재터, 선의터, 강선터, 웡골, 가마터, 고양골, 샛터, 물어구, 송정동 자진구비를 병합하여 천미리라 하였다. 1986년 12월 평화의 댐의 건설로 몇 가구 살던 주민들도 이주를 당하여 현재는 주민이 살고 있지 않으며 평화의 댐만이 남아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이 하늘아래 끝동네라 하였는데 이제는 남한에서 끝동네가 되고 있다.

  • 고방산리(古方山里) : 본래 고려때 방산현(方山縣)이 있던 곳인데 그 후 방산현을 현리로 옮기었으므로 고방산(古方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공골, 궁골, 학령골, 방이골 청수등을 병합하여 고방산이라 하였으나 1962년 송현리에 병합되었다.


<출처: 양구군청>
#양구 지명 # 방산면 지명
양구군 지명 자세히보기(양구문화원)

5.지역의 옛이야기

5.1.오미리 각시고개

1980년대 평화의 댐을 건설하기 위하여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고 산허리를 뚫고 직선도로를 내기 전에 오미리로 가려면 금악리 버덩말과 오미리 각시고개를 연결한 새마을사업으로 건설한 협동교를 건너지 않고는 갈수가 없었다.
1969년 4월 10일 건설된 출렁다리가 있었으나 1975년 3월 새마을 협동권 사업으로 수입천에 오미교가 가설되고 그 다리를 건너면 그리 높지 않은 각시고개가 있다.
지금은 오미교도 끊기고 각시고개도 전설로만 전해질뿐 사용하지 않는 고갯길이 되었다. 이 각시고개에 대한 애절한 사연의 전설만 전해질뿐이다.
【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은 그 옛날 금강산 아래 회양땅에 두 모자가 살고 있었다. 외아들이 장성하여 어머니는 아들 장가를 들였다. 장가를 들자 외아들의 애정을 새 며느리가 독차지하게 되어 어머니와의 사이가 벌어지고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학대는 갈수록 심해졌다.
이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어느 날 홀로 집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외아들을 사방으로 찾아 헤메다가 오미령(오미리에서 상무룡리 방산골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극심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말았다.
시어머니 뒤를 따라 신랑을 찾아 나선 새 며느리도 오미리의 작은 고갯마루에서 신랑과 시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얼어 죽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오미령에서 얼어 죽고, 새 며느리는 오미리 입구의 작은 고개에서 얼어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름이 없던 마을 입구의 작은 고개를 새색시가 얼어 죽었다고 그때부터 각시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얼어 죽은〈오미령〉은 당초 어미가 얼어 죽었다고〈어미령〉이라고 부르다가 순화되어 오미령으로 바꿨다고 전한다. 또 이 애절한 전설의 각시고개는 새마을사업으로 넓혀지고 고개로 올라가는 두갈래 길이 생기면서 신랑각시고개라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신설된 도로를 이용하면서 각시고개에 대한 전설도 마을 사람들에게서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5.2.구사애(驅死崖)와 박장사

장평리에 자월이라는 마을이 있고 동편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절벽)이 하나 있다. 이 벼랑을 가리켜 구사애 혹은 구사벼랑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곳곳에 장사가 나면 용마가 난다는 그런류의 전설이 여기저기서 전해오듯 이곳도 장사와 용마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동두보라는 보를 혼자의 힘으로 막았다는 전설의 주인공 박장사(朴齊龍)가 죽은 뒤 그의 후손 효찬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온 집안이 기뻐하였으나 태어난 아이가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커서 훗날 큰 장사가 돼서 역모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날에는 삼문이 멸족의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아예 화근의 싹부터 잘라버리려 하였다.
그래서 이 아이를 두고 문중에서는 회의를 하여 마침내 아이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돌과 곡식을 담은 섬으로 눌러서 압살해 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죽자 장사가 태어나면 같이 태어난다는 용마 한 마리가 바위 벼랑위에 나타나 열흘 동안 슬피 울더니 그만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용마가 죽은 벼랑을 구사애(驅死崖)라 부르고 죽은 아이는 장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구사애와 박장사」라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5.3.벼락바위의 전설

오미리 버스터미널 아래 수입천 변에 벼락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본래 수입천 한가운데 있었으나 도로를 확장하면서 바위 한편이 도로에 걸쳐있게 되었다. 이 바위에 얽힌 짧은 전설 하나가 전해오고 있다.
【이 바위에 석자나 되는 커다란 지네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지네는 수입천 주변에 매어 놓은 송아지에게 독을 뿜어 해를 입히게 되자 하늘에서 용이 나타나 벼락을 때려 바위에 있던 지네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후 부터 이 이름이 없던 바위를 벼락바위라 부른다.】
여름이면 낚시꾼들이 이 벼락바위에 걸터앉아 낚시를 하며 많은 고기를 잡는 유명한 낚시터가 되었다.

 

5.4.맹진사댁 경사와 정절문(貞節門)

조선 말엽 방산면 현리는 산간오지이기는 하나 넉넉하게 사는 집들이 많은 마을이었다. 많은 부자 가운데서도 맹진사하면 엄지손가락에 꼽히는 부자였다. 이 천석군 맹진사 집안에 얽힌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천석군 부자면서도 맹진사는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이 근심 걱정은 외아들 경환이의 신병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도 많았지만 그 보다도 다 커가는 요즈음 또 다른 병 때문에 온 집안이 근심에 싸여 있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 용하다는 의원은 다 데려다 진맥을 보고 약을 써 보아도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이제 20세가 된 아들을 두고 이 집안의 걱정은 커가기만 하였다.
외아들의 병은 몸에 종기가 나서 하나를 치료하면 또 다른 곳에서 종기가 나고 몸 전체로 퍼져 나가 이제는 얼굴에 까지 퍼져 숨길수도 없게 되었다. 자연히 남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게 되었다.
‘돈이 있으면 뭘 하나 맹진시댁 좀 봐 아들하나 있다는 것이 그 모양이니’
마을 사람들은 수근거리지만 그 집이 두려워 병명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하진 않지만 맹진사 아들은 문둥병에 걸린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맹진사의 재산으로 마을사람의 입을 조심 시킬 수는 있어도 마을 밖으로 퍼져나가는 소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맹진사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지기만 하였다.
병든 아들이지만 빨리 며느리를 맞아들여 손자를 얻어야겠다는 일념에서 맹진사는 사방으로 중신애비를 보내 색시감을 물색하게 하였다. 사람하나 똑똑하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고을에 사는 송씨 댁에서 혼인 말이 들어왔다.
송씨 일가에서는 맹진사의 집이 문벌도 과히 떨어지지 않는데다 재산이 많다는 말에 깊이 알아보지도 않고 혼사를 작정하였던 것이다.
맹진사는 곧 날짜를 택일하여 보냈다. 맹진사는 소문이 날까봐 초조함 속에 혼사를 서둘렀다. 그러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의 심정이다. 혼례를 닷새 앞두고 경환의 병은 더 심하여 얼굴의 종기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이 번지고 몸이 고달파 몸져 눕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로 어찌 혼례청에 나갈 수 있으랴. 답답한 것은 경환이보다 맹진사였다. 맹진사는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운명은 맹진사를 버리지 않았다. 대사를 이틀 앞둔 날 아침 생각지도 않은 김진사의 아들인 순익이가 뜻밖에도 찾아왔다. 김진사와는 어려서부터 절친한 사이라 늘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자주 다녀서 전에도 여러 번 맹진사의 집을 드나들었었다.
“무슨 일이 생겨서 왔는가?”
“네. 실상은 아버님도 모르시게 저 혼자 생각으로 좀 뵈러 왔습니다.”
“어서 말을 해 보게나.”
“다름이 아니오라 돈 삼천 냥만 빌려주십사 하고 찾아뵈러 왔습니다.”
“자네가 삼천 냥은 무엇에다 쓰려는가?”
“다름이 아니오라….”
말은 이러하였다. 김진사가 벼슬을 하는 동안에 돈을 모으기는커녕 가산을 탕진하다시피하여 할 수 없이 호구책을 꾸미기 위해 공금으로 장사를 하다가 실패를 했다는 것이다.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맹진사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자네 자의로 내게 왔다고 했지?”
“예.”
김진사의 아들은 가슴이 떨렸다. 자기 집안의 성쇠가 달린 일순간이었다.
“주지.”
“네?”
“돈은 주겠네만 내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겠나?”
“네. 어떠한 일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는 맹진사는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도 우리 집 사정을 알다시피…. 그래서 자네가 경환이 대신 신부집에 가서 대례를 지내고 며느리를 우리집으로 데려다 주는 일일세.」
“……”
“뒷일은 내 담당할 터인 즉 염려할 게 없네. 그리고 다행한 것은 신부집에서 신랑 선을 보지 않은 것일세.”
이 말을 들은 김진사의 아들 순익은 잠시 말이 없다가 승낙을 하고 말았다. 물론 돈 삼천 냥도 문제였지만 말을 듣고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뒷일은 맹진사가 책임을 진다니까 마음도 어느 정도 놓였다.
이리하여 혼사는 예정대로 무사히 끝이 나고 순익은 맹진사가 시킨 대로 몸이 편치 않다고 신방에는 들지 않고 삼일을 치르고 무사히 돌아와서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폐백을 드리는 날 밤에 신부는 기절을 하듯이 놀랐다. 초례를 지낸 남편은 간 곳이 없고 꿈에도 보기 무서울만치 흉측한 남자가 남편이라고 있었다. 그러자 시아버지인 맹진사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며느리를 잡고서 사정을 하였다. 굴욕을 참을 수 없는 신부는 그만 야반도주를 해서 친정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맹진사는 며느리를 데려다 놓고 사정을 하면 신부가 제 아무리 똑똑한들 별 수 없이 말을 들으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말도 못하고 그만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와 반대로 송씨 일가에서는 사기 결혼이라고 들고 일어나서 초례를 지낸 신랑을 찾아내지 않으면 관가에 고소를 하겠다고 위협을 해왔다. 이쯤 되고 보니 맹진사도 딱했지만 김진사의 아들도 딱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진사는 폐백을 받고 아들을 그리로 장가를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김진사에겐 순희라는 열여덟 난 딸이 더 있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순희는 분연히 정색을 하며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님. 어린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지금 듣자오니 우리 집이나 송씨네는 전화위복이 되어 다행이오나 맹진사댁은 이로 인해서 더 마음의 고난을 당하게 되었사오니 그 얼마나 딱 하옵니까. 그리고 또 아버님께서도 맹진사댁의 삼천 냥의 후원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쯤 아버님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집안이 어찌 되었을지 알겠습니까?”
“그야 네 말이 그른 바는 아니다마는 어찌 할 수 있느냐?”
“맹진사 댁은 결국 이러나 저러나 며느리 하나만 얻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겠지.”
“그렇다면 제가 그 집 며느리로 가겠어요.”
“아니 문둥이의 계집이 되겠단 말이냐?”
“놀라실 일이 아니라 우리 집 처지를 생각하신다면 무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제가 가는 길을 막지 말아 주시옵기 바랍니다.”
김진사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으나, 감히 딸의 뜻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편 맹진사는 김진사의 딸이 자기의 며느리 되기를 자원한다는 말에 눈물을 흘려가며 감사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경환도 만족하여 고통 속에서도 기쁜 빛을 나타냈다. 맹진사는 순희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온 집안이 기쁨 속에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기쁨도 순식간이었다. 경환의 병은 점점 심해져서 그 명이 경각에 달렸다. 아무래도 경환의 목숨이 밤을 넘기지 못할 것만 같았다. 순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렇다. 여필종부라 하지 않았는가, 나도 따라서 죽자.”
순희는 결심을 하고 고이 간직했던 비상을 물에 타서 머리맡에다가 놓고 마지막 숨을 재촉하는 남편을 남겨놓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멀리 친정 쪽을 향해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고 내려왔다.
방으로 들어선 순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상을 타놓은 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경환은 중병 속에서 희미하게 정신을 가다듬어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를 찾았으나 대답이 없는지라 누운 채로 머리맡을 더듬어서 비상을 타 놓은 물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이 어이된 일인가? 남편은 다시 물을 찾았다. 순희는 한편 놀라고 한편으로는 반가와서 달려 나가서 물을 떠다 입에 대 주었다.
“아니 이 물 말고 아까 먹던 물을 좀 주구려.”
순희는 다시한번 놀랐다. 순희가 망설이자 경환은 짜증을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달려 나왔다.
“도대체 아까 저 애가 먹은 것이 무엇이냐?”
맹진사는 초조하게 물었다. 순희는 이쯤 되고 보니 말을 아니할 수 없어서 지난 경과를 상세히 말했다.
“그래? 비상은 보통 상한 사람이 먹으면 죽지만, 그 병에는 약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 죽는다고 한들 다 죽게 된 사람이니 무슨 한이 되겠느냐. 비상은 내게도 있으니 어서 물에 타 먹이도록 해라.”
맹진사는 말을 마치기가 바쁘게 사랑으로 나가서 비상봉지를 갖다 주는 것이다. 비상을 탄 물을 마신 경환은 온 몸에 번졌던 종기가 모두 아물고 마침내 맑은 새살이 돋아 나왔다. 그는 완전히 병을 고친 것이다. 참으로 우연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의 정절한 마음씨가 마침내 남편의 병을 고치게 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정절녀라 일컫고 정절문을 세워서 그녀의 갸륵한 정신을 길이 길이 전했다고 한다.】
이 전설은 1984년 발간된 양구군지와 1972년 박영준의〈한국의 전설집〉에서 소개하고 있으나 〈양구군지〉에는 서술식으로,〈한국의 전설집〉에는 이야기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러나 전설의 내용은 같다.

 

5.5.감사구덩이의 전설

금악리는 예부터 백토 광산이 많아 조선시대 나라에서 운영하는 가마에 쓰는 백토를 공납하였다. 지금은 운영되고 있는 백토광산이 없으나 금악리 곳곳에 백토폐광터와 도자기가마터가 꽤 많이 남아있다.
금악리 논골이라는 골짜기에 남아있는 폐 백토광산에 얽혀져 내려오는 감사구덩이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져오고 있다. 【아득한 옛날 금악리 논골막에 백토 채광터가 있었다. 이 채토장에는 갖은 횡포로 무지한 백성을 동원시켜 백토를 채취하여 왔으므로 백성들의 불만과 불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 혹사 당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백성들은 때 마침 관가에서 도감사 일행이 현장을 시찰하기 위하여 이곳에와 백토 채토장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굴 입구를 무너뜨려 감사 일행을 매장시킨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백토 채토장의 무너져 내린 굴을 감사구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양구백토는 1570년경부터 1883년까지 조정에 공납하는 수량의 다소 차이는 있으나 년간 510석씩 공납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토 채취에 대한 민폐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587년(선조20년) 양구현감으로 도임한 김현도 현감이 공납하는 백토 굴취작업의 폐단과 무상 부역으로 백토를 굴취하는 폐단을 선조대왕에게 상소하여 이를 수용하여 용전을 주고 백토를 굴취토록 하였으며 충성된 신하라고 임금이 서명한「사서삼경」을 상으로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토 굴취에 대한 민원이 많았으며 이러한 전설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감사구덩이 백토는 선안 백토광산에서 여우고개 남쪽으로 연결된 맥으로 선안백토광산이 수명을 다해 개발된 광산으로 짐작되며 아직도 많은 백토광맥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다. 부근에 60,000㎥ 폐 백토더미가 쌓여 있으며, 감사구덩이로 추측되는 곳에는 연못으로 물이 고여있으며 절벽에서 무너진 백토더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폐 백토더미 옆에는 작업하던 백성들의 숙소와 작업장, 식당터로 보이는 광장에서 기와조각이 수집되는 등 연간 510석의 백토를 파내기 위해 동원됐던 백성들의 생활공간을 어렴풋이 짐작 할 수 있다.
1530년(중종25년)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이 양구백토 문제를 논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큰 문제가 발생하여 그 대책을 협의한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사실로 방산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금악리 논골의 ‘감사구덩이전설’이 실제로 발생하였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백토굴취 현장에 시찰 나간 감사가 굴속을 시찰하던 중 굴이 무너졌거나 백토 굴취에 시달린 백성이 그 고통을 못 이겨 마침 시찰 나온 감사를 압사시킨 사건에 대한 대책협의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1714년(숙종40. 8. 23. 숙종실록)에 정언 조명겸(正言 趙鳴謙)이 양구현 백성들이 백토를 굴취하는 폐단에 대하여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백점토(白粘土)는 높은산 가운데에 있는데 양구현에서 부역에 응하는 민호(民戶)는 5백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5백호의 백성으로 천길이나 되는 높은 산꼭대기를 뚫고 겨우 백토 맥을 찾으면 언덕이 바로 무너져 압사하는 역부가 없는 해가 없습니다.
수개월의 공력을 들여 5백석의 정토(正土)를 겨우 채취한 뒤 춘천, 홍천, 인제, 낭천, 양구 다섯 고을에서 각기 인부를 내어 선박으로 운반하여 분원(分院)에 상납하는데 춘천, 홍천, 인제, 낭천 네 고을은 당초 채굴하는 역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다만, 운납(運納)하는 수고로움만 담당하는데도 오히려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양구 고을에는 지토선(地土船)도 없이 백토를 채굴하는 중역(重役)을 홀로 떠맡고 있는데 운납하는 큰 역사를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상소하여 임금이 그 소를 사옹원(司饔院)에 내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토를 굴취하기 위하여 양구 백성이 얼마나 많은 노역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고 이때부터 양구는 백토만 굴취하고 춘천 등 4개 지역은 운반을 전담한 것으로 보인다.

 

5.6.금등매 아가씨와 강선대(降仙臺)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고향을 떠나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이 방산이다. 솔재마을(지금 송현리)에는 들이 넓고 산수가 좋아 수십 가구가 있었고 여기에 어두원(지금 65연대가 주둔한 곳)이란 곳이 있다.
【어두원리에 김윤모라는 사람이 등매(登梅)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살았다. 김윤모는 가난하여 겨울에 사냥을 하는데 하루는 나가더니 며칠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등매는 아버지를 찾아 산속을 헤메였다.
한편 이 곳에서 좀 떨어진 산에 혼자 사는 청년이 있었는데 산 속을 헤매던 등매와 만났다. 등매의 사연을 듣고 청년은 등매의 아버지가 맹수에 잡혀 먹혔다고 짐작하였다. 등매와 청년은 그 맹수를 잡아서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자고 약속하고 맹수를 잡기로 하였다. 청년은 사냥이 직업이라서 덫을 놓고 선후(칼을 장치해서 잡는 덫의 일종)를 설치하여 산의 곳곳에 놓아 여러 달 동안 기다렸다. 등매와 청년이 매일 산에서 만났는데 등매가 산에 갈 때에는, 집 앞으로 학이 날라와 날개에 싣고 갔다.
마침내 가을에 맹수를 잡았고 등매와 청년은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또한 등매는 청년에게 자신은 남장을 했지만 여자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백년해로의 제를 지내고 그 고장을 떠났다.】
그 후에 등매가 살던 마을을 등매동이라고, 부르고 등매를 태운 학이 넘은 고개를 학령(鶴嶺)이라고 부른다. 또한 청년이 살던 고장을 신선이 의로운 일을 하고 살았다고 하여 선의대(仙義臺)라고 부른다.
등매와 청년이 제를 지낸 곳을 강선대(降仙岱)라 부르고, 함께 살 것을 약속한 날을 강선일(降仙日)이라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이 날을 정해 음식과 술을 마련하고 경로잔치를 여는 강선놀이가 해방전까지 행해져왔다고 한다.

 

5.7.황지관과 구미호

함춘 마을 사람들을 부추겨 광대바위를 굴려 파평윤씨 가문의 번창을 막았다는 황중백 지관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이 방산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어려서 황중백은 방산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 다녔는데 서당에 가려면 오미리의 각시고개를 넘어 다녀야했다. 서당에 다니는 그는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훈장 선생님은 그를 은밀히 불러 그 사연을 물어 보았다.
“네가 무언가 내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숨기지 말고 내게 말 하거라.”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네. 훈장님. 소인이 서당에 오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오르고 내릴 때마다 절세미인이 나타나 제 입에다 구슬을 넣어주고 함께 놀다가 갈 때가 되면 구슬을 빼앗아 가고는 합니다.”
고 말했다. 이 사실을 들은 훈장선생님은 그에게 이르기를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또다시 그녀가 나타나서 그러거든 입에 넣어 준 구슬을 빼앗기지 말고 삼켜버리고 뒤로 넘어져라.”
고 시켰다. 훈장은 그에게 넘어질 때는 뒤로 넘어져야 한다는 것을 두 번, 세번 강조했다.
그날 공부를 마치고 그가 고개를 넘어가는데 어김없이 아릿다운 아가씨가 또 나타났다. 그녀가 구슬을 입에 넣어주자 그는 얼른 구슬을 삼키고 넘어졌다. 넘어질 때 그는 엉겁결에 뒤로 넘어진다는 것이 그만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넘어지자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쓰러졌고 조금 후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구미호)로 변하여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소년 황중백은 자라서 풍수에 능한 지관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가 구슬을 먹고 넘어질 때 앞으로 넘어지지 않고 뒤로 넘어졌더라면 양구지방 뿐 아니라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큰 지관이 되었을 텐데 불행히도 앞으로 넘어져서 양구지방에서나 이름을 날리는 작은 지관이 되었다.】

 

5.8.두타연의 전설

# 양구 옛이야기 # 방산면 옛이야기 # 방산 옛이야기

7.지역의 명소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백석산지구전투전적비, 두타연, 뱅이골공원, 오미마을, 파서탕, 파로호
# 양구 명소 # 방산면 명소 # 방산 명소
양구 명소 자세히보기(양구볼구양)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방산초등학교
중학교 : 방산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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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