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정중앙면

                                                                                                                                                                                                                                                           

1.개요

양구군의 남쪽에 위치한 면으로 본래 하남면, 하동면이었으나 병합되어 1914년 남면으로 개칭되었다. 1971년 상, 하수내리가 인제군으로 편입되고 인제군 두무리가 남면으로 편입되면서 16개리가 21개리로 개편되었다. 2021년 1월 1일 남면에서 국토정중앙면으로 명칭변경되었다. 
# 국토정중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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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구

2023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3) / 단위 : 명
3,302총 인구수
1,848인구(남)
1,454인구(여)

# 국토정중앙면 인구

4.지명의 유래

  • 국토정중앙면 : 1895년(고종32년)에 2개면(하남면, 하동면)이었으나 1914년 3월 지방행정구역의 대폭 개편으로 인하여 하남면과 하동면이 병합되어 남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공산치하에 강점되었다가 1950년 6월 25일 남침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격전지가 되었다. 1954 년 4월 1일 수복주민이 정착하게 되면서 군정을 실시하여 오다가 동년 11월 17일 수복지구 행정권 이양으로 민정을 실시하면서 16개리를 관할하였으나 1971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6425)으로 상, 하수내리가 인제군으로 편입되고 인제군 두무리가 남면으로 편입되면서 16개리가 21개리로 개편되었다. 2021년 1월 1일 남면에서 국토정중앙면으로 명칭변경되었다. 

  • 적리(笛里) : 본래 양구군 하동면의 지역으로서 옛날에 절이 있었으므로 절골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적골 또는 적동(笛洞)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적리(笛里)라 하여 남면에 편입되었다.

  • 가오작리(佳伍作里) : 본래 양구군 하동면의 지역으로서 가오자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애골, 웃광치(上廣峙), 아래광치(下廣峙)를 병합하여 가오작리라 하였으며 1971년 1월 1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아래광치를 분할 가오작1리, 가오작2리로 관할하였다.

  • 야촌리(野村里) : 본래 양구군 하동면의 지역으로서 멀리 구멍이 뚫어진 용소가 있으므로 멀구리 또는 원화촌(遠花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밤골을 병합하여 들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야촌(野村)이라 하여 남면에 편입되었다.

  • 용하리(龍下里) : 본래 양구군 하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갯말, 멀구리 일부를 병합하여 야촌리에 있는 용소 아래쪽에 있어 용하리라하여 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71년 1월 1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하1리와 용하2리로 분리되었다.

  • 청리(晴里) : 본래 양구군의 하동면지역으로서 청동(晴洞) 또는 개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삿가지골, 산루네미, 솔숲말, 무쇠점, 원동지골, 장막골을 병합하여 청리라하여 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17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리 1,2를 3,4로 분리되었다.

  • 송우리(松隅里) : 본래 양구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은 모퉁이 안쪽에 있으므로 솔로루, 또는 송우(松隅)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정동(陶井洞)을 병합하여 송우리라 하였다.

  • 창리(蒼里) : 본래 양구군 남면지역으로서, 옛날에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동(蒼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산(馬山)을 병합하여 창리라 하였으며 그 후 1971년 행정구역 분할에 따라 1,2로 분리되었다.

  • 황강리(黃岡里) : 본래 양구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봉화대 밑이 되므로 황강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황강리라 하였다.

<출처: 양구군청>
# 양구 지명 # 국토정중앙면 지명
양구군 지명 자세히보기(양구문화원)

5.지역의 옛이야기

5.1.몰구지(沒龜池)의 전설

국토정중앙면 야촌리 밤골 입구와 가오작2리 경계지점에 조그만 능선이 있고, 그 능선 북쪽(가오작2리/광치) 절벽밑에 4-5m깊이에 330㎡의 소(沼)가 하나 있다. 이 연못을 마을 사람들은 용소 또는 몰구지라고 부른다.
아주 먼 옛날 이 연못은 넓고 깊었으며 주변에 숲이 무성하고 옆으로 흐르는 서천물이 두 번 휘감아 도는 지점이라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어 두물나드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 용소 주변에는 숲이 너무 우거져 낮에도 음침하여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도로가 나면서 자취를 감추었고 용하리 마을 이름도 용소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하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한다.
이 용소에 대한 전설은
【엣날 이 용소에는 용 한마리와 거북이 한마리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북이가 용에게 쫒기여 청리의 샘물골로 가려고 이 용소에서 나와 용하리 들판으로 나가려고 할 때 마침 샘물골 저편 봉황대 위에서 봉황새가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맑고 우아하던지 거북이는 그 봉황새 울음소리에 도취되어 가던 길을 멈추고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춤에 지쳐버린 거북이는 용소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용소를 거북이가 빠져 죽었다고 몰구지(沒龜池/빠질몰 거북구 못지)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5.2.무당골의 전설

국토정중앙면 청리 무쇠점골에 가면 왼편에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치듯 솟아있고 절벽가운데 높이 20m 너비 5m의 커다란 석굴이 뚫려있다.
이 석굴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 무당골의 전설은 가오작리(광치) 용소의 몰구지 전설과 연결된 전설이다.
【임진왜란 때 밀어닥친 왜병의 살육을 피하여 이곳에 이른 어느 중이 왜병에 잡혀 참살을 당한 곳이라서인지 날씨가 음울해지면 이 굴속에서 마치 북을 치듯 둥 둥 둥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때 죽은 중이 무당귀신이 되어 나타나서 치는 북소리라고 몹시 두려워하고 무당이 굿할 때 치는 북소리 같다고 그때부터 이 굴을 무당굴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굴속에 들어가 보니 10m 정도에서 막혀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는 이 무당굴에 불을 때면 100일 뒤에 신기하게도 가오작리 용소(몰구지) 절벽에 난 굴로 연기가 나온다고 전해진다.
이것으로 보아 무당굴과 용소 절벽에 난 굴이 서로 통해있다고 상통석굴(相通石屈)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 굴들은 직선으로 약 3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중간에 골짜기와 농경지가 있는 등 서로 통할 수 없지만 옛 사람들은 두 굴이 서로 통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며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고도 한다.

 

5.3.옥녀 탄금대

국토정중앙면 용하리 용하초등학교 정문앞에 서 있는 고개의 돌을 이 곳 사람들은 옛날부터〈옥녀 탄금대〉라고 일컬어 왔다. 이 탄금대에 관한 간단한 설화 한토막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이 탄금대라 일컫는 돌이 주변지역에 조성한 〈쌍돌배기 선돌공원〉조성으로 자리를 옮겨 선돌과 함께 세워 놓았다.
【먼 옛날 어느 맑게 개인 날이었는데 하늘이 갑자기 구름으로 덮여 버리고 구름 사이로 흰 옷을 걸친 옥녀가 내려와서 이 돌에 걸터앉아 현악기의 한 가지인 거문고를 뜯고 하늘로 다시 올라 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옥녀가 앉아 거문고를 뜯은 돌을 〈옥녀 탄금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탄금대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는 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조야에서 시를 즐겼다는 한학자인 노봉 김극기가 동면 도솔산을 돌아보고 가는 길에 이 〈옥녀 탄금대〉에 들려 일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김극기의 고시문〈강만반회환 /岡巒半回環〉, 즉〈멧부리와 봉우리가 반이나 둘려 있다〉라는 장문의 고시문이 유명하다.

 

5.4.학수산(鶴首山)의 전설

국토정중앙면 청리에서 두무리로 넘어가는 왼편에 폐교된 옛 학수초등학교가 있고 학교 뒤편에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다.
아주 작은 산이지만 학수산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 학수산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산이 있는 마을에 파평윤씨 집안의 상(喪)이 있었다. 상을 당한 윤씨 집안에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산소를 명당에 써서 후손 중에 출중한 인물이 나는 것이 큰 소망이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유명한 지관을 찾아가 명당을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지관이 윤씨의 묘를 쓸 곳을 택해 준 곳이 대암산맥의 기슭으로 남면 청3리에 소재한 학수산이었다.
두 형제는 지관이 가리키는 곳을 묘소로 택한 후 천관하려 했다. 묘소로 택한 곳은 아주 단단해서 땅 파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지관은 4척을 파라고 했으나 형은 2척 정도라도 충분하다고 2척만 파고 천관하자고 했다. 그러나 아우는 지관이 4척을 파라고 했고 또 너무 얕게 파면 겨울에 땅이 얼 것을 염려하여 4척을 파자고 우겼다. 아우는 한자를 더 팠다.
묘토로는 제일 좋은 화강암 지층이 풍화되어 석회질과 모래로 혼합된 지질이 나왔다. 형제는 묘토가 좋은 것을 보고 서로 즐거워했다.
(그러자 어느 곳에서인지 난데없이 학 한 마리가 머리를 들고 묘소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향교지 전설집란 647페이지)
(그러자 천관에서 난데없이 학이 나와 건너편 파평 윤씨 소유 산으로 날아가므로 지금도 학이 머리를 돌려 날아갔다. /#양구의 지명 132페이지)
그래서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학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학수산이라 붙여진 이곳에 윤씨 가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24대에 걸쳐 묘소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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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역의 명소

용소, 광치자연휴양림, 광치계곡, 국토정중앙천문대, 국토정중앙배꼽마을, 봉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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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죽리초등학교, 도촌초등학교, 용하초등학교
중학교 : 용하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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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