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천면은 횡성군의 동북방에 위치한 면으로, 망향의동산, 청소년수련원, 어답산등산로, 참숯가마, 자연휴양림, 횡성온천, 홀로세생태학교, 병지방계곡 등이 있어 자연친화적인 테마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갑천면
2025년 기준(자료갱신일: 2025.02) / 단위 : 명
2,470총 인구수
1,292인구(남)
1,178인구(여)
갑천면 리별인구현황 등 자세히 보기# 갑천면인구 # 갑천면 인구
- 구방리: 횡성의 옛날읍이 화전리에 있을 때, 이 곳이 한 읍내가 되어 옛날 동내라는 의미의 구방내(舊坊內)라고 함.
- 대관대리: 본래 청일면 지역으로 조선 중엽에 심 판서가 살아 대관터라고 하였던 것이 대관대로 불림.
- 매일리: 갑천면 사무소가 위치한 곳으로 이름의 유래는 알수 없음.
- 병지방리: 본래 청일면 지역으로 진한(辰韓)의 태기왕(泰岐王)이 신라군에게 쫓겨 어답산에 피난할 때, 북방 방어를 위해 병사를 모아 방비하던 곳이라고 하여 병지방(兵之坊)이라고 함.
- 부동리: 가마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가마골, 또는 가마'부'자와 마을 '동'을 써서 부동(釜洞)이라고 하였음. 2001년 삼거리로 편입됨.
- 삼거리: 세 갈래 길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삼거(三巨)리라고 하였음.2001년 부동이를 편입함
- 상대리: 금대(琴臺)리의 위쪽에 있어 웃금대, 상금대라고 하다 줄여 상대리라고 하였음.
- 율동리: 본래 청일면 지역으로 밤나무가 많아 밤골, 율동(栗洞)이라고 하였음.
- 전촌리: 본래 청일면 지역으로 예전에 옹기점이 있어 점촌이라고 하다가 전촌이라 불렸다는 설과 과거에 전장군의 명성과 관련이 있는 동네로 전시 들이 집성촌을 이뤄 전촌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음.
- 중금리: 예전에 사금을 많이 해서 붙여진 이름임.
- 추동리: 본래 청일면 지역으로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울, 가래곡, 또는 추동(楸洞)이라고 하였는데, 횡성읍의 추동리와 혼란이 있을 것 같아 한자를 달리 써 추동(秋洞)리라고 표기함. 포동리: 계천(桂川)가에 마을이 있어 개말이라 하였는데 포동리로 바뀜.
- 하대리: 금대(琴臺)리의 아래쪽에 있어 아래금대라 하다가 줄여 하대리라고 함.
- 화전리: 횡성군의 옛 고을인 화전(花田)현이 있었던 곳이라 화전리라고 함
횡성문화원-갑천면 지명 자세히보기<출처: 횡성문화원>
# 갑천면 지명 5.1.대문동과 복성정의 유래(중금리)
갑천면 중금리에는 대문동이라는 촌락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으로부터 4백 40여 년 전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진앙(陳央)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진앙의 집 큰 대문이 있던 곳을 대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문동으로부터 약 3km 정도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는 복성정이 있는데 이곳은 진앙의 별장이었다. 진앙이 이 복성정에 머물 때 음식물을 본가로부터 운반하였는데 노비 3백여 명이 한 줄로 늘어서서 손에서 손으로 음식을 운반하여 식사를 했다 한다.
이때 어느 사람이 진앙의 재물을 탐하여 진앙 진왕으로 별명을 지어 퍼트렸고 이로 인해 진앙은 극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 후 웅장했던 건물도 퇴락 붕괴되었고 현재 횡성댐이 조성되어 옛 모습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5.2.허명천 장군과 용마무덤(갑천)
허명천 장군은 홍천군 좌운 허 씨 문중 사람으로 힘이 장사이며 학문에 능통하여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허명천 장군이 강릉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자손들이 장군의 시신을 고향에 모셔다가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다음날 동네 장정들이 모여 상여를 메고 일어나 발을 떼어 놓는데 상여 머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도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여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보니 좌운을 떠나 산을 넘어서 추동리까지 와서 추동리 앞산에 올라서니 상여가 무거워져서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이 장군의 묏자리로 알고 장사를 지냈는데 그곳에 장군이 타고 다니던 용마가 찾아와서 죽었다. 사람들은 장군의 묘소를 찾아와 죽은 용마의 충성을 높이 장군의 묘소 앞에 장사를 지내고 이 무덤을 용마 무덤이라 불렀다.
후에 허명천 장군의 무덤 자리를 명당자리로 탐을 낸 사람의 계략에 의해 허명천 장군의 시신은 이장되었고 추동 앞산에는 용마 무덤만 외롭게 남아 있다.
5.3.장독바위(부동리)
갑천면 부동리 장독 바위가 있는 자리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 집 뒷산에는 효험이 좋은 약수가 있어서 각종 질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고자 찾아오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당시 갑천 부동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 부잣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부잣집의 여인들과 하인들은 손님 접대로 바쁘고 고달팠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부잣집에 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큰 며느리는 스님에게 시주를 하면서 소원을 풀어달라고 청하였다. 스님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계속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살 수가 없으니 사람들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큰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매우 난처한 기색으로 방법이 있으나 후회할 것이라고 하였다. 큰 며느리는 괜찮으니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스님이 가르쳐준 방법은 개를 잡아 피를 뿌리고 가죽을 약수 바위에 덮어 씌운 후 절을 하라는 것이었다. 손님이 뜸한 틈을 타서 큰 며느리가 그 일을 실행하자 큰비가 내려 이 부잣집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고 장독대로 사용하던 장독 바위만 남게 되었다.
# 갑천면 옛이야기
김치정: 김치정은 갑천면 매일3리 잔골마을에서 한문서당을 마련해 놓고 10여명의 문하생을 두고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생이었다. 스스로 참가하는 수 많은 군민들이 횡성읍내 장터로 모여들 때 김치정도 제자 신건수를 대동하고 횡성으로 와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치정은 무차별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지만 잡히지 않으려고 그래도 현장에서 기어나와 그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만세사건 후 잔골마을로 김치정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어 잔골마을 사람들이 횡성까지 나와서 시신을 몰래 운고, 일경의 눈을 피해 장사를 지냈다. 김치정이 만세운동에 참여허고 또 순국한 사실은 당시 일본 헌병이 두려워 남들에게 숨겨야 했으며 그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제자 신건수의 증언에 의하여 밝혀졌지만 보훈의 대열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 갑천면 인물 # 김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