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근면

                                                                                                                                                                                                                                                           

1.개요

공근면은 횡성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면으로 19개의 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사무소는 공근면 학담리에 위치하고 있다.
# 공근면

2.인구

2022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10) / 단위 : 명
3,455총 인구수
1,790인구(남)
1,665인구(여)
# 공근면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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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지명의 유래

 
  • 가곡리: 원래 가전리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였는데, 유장골과 병합하여 백이곡리라고 부르다가 가전과 유장곡의 이름을 따서 가곡리라고 부름.

  • 공근리: 곰굴이라고 하던 곳인데, 고려 말 직제학 팔계 정전(鄭悛)이 살면서 공근(公謹)으로 고쳤으며, 공근면과 혼동되므로 '내공근'이라고도 부름.

  • 덕촌리: 하수백(下水白)리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적덕과 와촌의 이름을 따서 덕촌리라고 부름.

  • 도곡리: 옛날에 이 마을에서 도자기를 구웠다고 하여 도새울, 도곡(陶谷)이라고 하였음.

  • 매곡리: 갈매골, 갈마곡이라 하였는데, 훗날 매곡리로 바뀜.

  • 부창리: 토골의 아래쪽에 있어 아래토골 또는 하토동이라고 이라고 하다가 쌀이 많이 생산되어 부자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부창(富倉)리라고 함.

  • 삼배리: 마을에 화주봉, 야곡봉, 만악봉 세봉우리가 있어 삼배울 또는 삼배라 하였음.

  • 상동리: 토골의 위쪽에 있어 웃토골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통해 상토동리라고 하였다가 줄여 상동리라고 부르게 됨.

  • 상창봉리: 본래 홍천군 금물산명으로 창봉골 위쪽에 있어 상창봉이라 부름.

  • 수백리: 옛부터 무리, 물이라고 불렸는데, 높은 산 위에서 보면 낮에는 물의 희게 보이고, 밤에는 모래가 희게 보인다고 하여 수백(水白)이라고 함.

  • 신촌리: 본래 학곡리의 일부였으나 1973년 행정관할구역 재조정으로 새말 다리골을 병합하여 신촌(新村)이라고 함.

  • 어둔리: 마을 주위에 높은 산이 있어 어둡다는 뜻으로 어둔리라고 불린다는 설과 홍천에서 횡성으로 오는 길목으로 역졸들이 주둔하였다 하여 어둔(於屯)이라고도 함.

  • 오산리: 외딴 산에 있어 오미라고 하였다 오산리로 바뀜.

  • 창봉리: 창골의 아래에 있어 아래 창봉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이후 하창봉리라고 부르다 줄여 창봉리라고 함.

  • 청곡리: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금계천의 물이 맑다고 하여 청곡리라고 부름.

  • 초원리: 조선시대 때 새원이라는 원(院) 이 있어 새원 또는 초원이라고 하였음.

  • 학담리: 마을에 학이 놀던 못이 있어 학담이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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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근면 지명

5.지역의 옛이야기

 

5.1.소경골(삼배리)

 공근면 삼배리에는 '소경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소경)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살았는데, 시아버지가 오래 살려면 며느리와 함께 살면 안 된다고 며느리의 꿈에 흰 수염이 달린 도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시아버지 몰래 산등성이 너머에 집을 지었다.
며느리는 매일 새벽 일찍 시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시아버지를 모셨고, 밤에는 다시 자기 집으로 가서 잠을 잤다.
이렇게 몇십 년을 노력한 덕분에 시아버지는 80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시아버지가 살던 곳은 '큰 소경골', 며느리가 살던 곳은 '작은 소경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5.2.호골바위(수백리)

 공근면 칠봉산에는 '호골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곳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는데, 바위의 깊은 굴 속에는 칠봉산을 지키는 신령의 금부처가 있었고, 호랑이가 그 부처를 지켰다고 한다.
이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부처님을 지키는 데만 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호랑이가 죽자, 온 마을이 울릴 만큼 큰 울음소리가 났고, 사냥꾼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후, 아무도 그 굴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호랑이의 뼈가 썩어 바위의 이름이 '호골바위'가 되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지금도 굴 속에 금부처가 있어 이 마을에 부자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난다고 믿고 있다.

 

5.3.귀웅소의 전설(오산리)

 공근면 오산리에는 '귀웅소'라는 깊은 웅덩이가 있다. 옛날 이곳에는 용이 되려고 기다리는 아주 큰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착한 농부가 키우는 말이 매일 그 구렁이가 있던 자리를 밟고 다녀서 구렁이는 용이 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님은 그 구렁이가 나쁜 용이 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용이 되기 3일 전, 스님은 농부에게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그 자리를 떠나자, 구렁이는 드디어 하늘로 올라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말도 놀라 함께 죽고 말았다.
그 후로 그곳은 '귀웅소'라는 깊은 웅덩이가 되었고, 구렁이의 한 때문인지 지금도 종종 사람이 빠져 죽는다고 한다.

 

5.4.절골이라 부르게 된 전설(오산리)

 공근면 오산리에는 절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백여 년 전, 이곳에 살던 한 아가씨는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약혼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설득했지만, 아가씨는 약혼자에 대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결국 혼자서 시댁으로 갔다.
아가씨는 죽은 약혼자의 옷을 걸어놓고 혼자 결혼식을 올렸고, 약혼자의 무덤 옆에 작은 집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그 후, 평생 시댁에서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아가씨의 굳은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의 이름을 '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5.용바위 전설(부창리)

 공근면 부창리에는 용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바위 밑에 살던 용은 '자지봉'이라는 산의 붉은 단풍이 바위에 비칠 때 하늘로 올라가라는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
용은 오랫동안 단풍이 비치기를 기다렸지만, 자지봉이 너무 멀어 단풍나무가 잘 자라지 않았다. 참다못한 용은 토끼들에게 단풍나무를 잘라 참나무에 매달게 했고, 꾀꼬리를 시켜 참나무에 단풍잎을 매달게 했다.
토끼와 꾀꼬리가 시키는 대로 하자, 붉은 단풍이 용바위에 비쳤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5.6.인삼과 효자에 얽힌 전설(청곡리)

 옛날에 독재봉에는 아주 특별한 인삼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삼은 효심(부모님을 잘 모시는 마음)이 아주 깊은 사람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삼을 찾으러 갔지만, 아무도 그 인삼을 캐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인삼이 물속에서 보였지만, 가까이 가면 다시 사라져서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부모님께 잘하는 효심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5.7.장자터에 얽힌 전설(공근리)

 약 200년 전, 지금의 궁근중학교와 그 근처 주택가에는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강가에 예쁜 마을이 있었다. 특히 강 옆 언덕에는 햇빛이 잘 드는 좋은 곳에 여러 집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주 크고 멋진 기와집이었다. 마치 궁궐처럼 커서 많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지만, 돈도 많고 이름도 알려진 큰 부자였다. 그런데 언제인지 모르게 그 집은 없어지고, 그 가족들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그 집이 있던 자리만 장자터’라고 불리며 전해지고 있다.
요즘도 그 근처에는 옛날 집에서 나온 기와 조각들이 보여서, 정말 그런 부잣집이 있었던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5.8.성바위 전설(학담리)

옛날에 공근면 학담리라는 마을 뒷산에는 아주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멀리서도 보일 만큼 크고, 꼭대기에는 세 장짜리 멍석을 깔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평평한 곳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 여자들이 놀러 오던 장소였다고 한다. 이 바위 아래에는 샘물(맑은 물이 나오는 곳)도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매년 음력 3월 3일이 되면 근처에 사는 부인들이 모여서 윷놀이를 했다. 이 날은 '3'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많은 날이었다. 부인들은 멍석 3장을 깔고 윷놀이를 한 다음, 작은 돌 3개를 주워 ‘아들 바위’라는 바위를 맞히는 놀이를 했다. 성바위 아래에 있는 ‘아들 바위’를 맞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고, 못 맞히면 딸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부인은 아들을 갖고 싶어서 무릎 꿇고 기도까지 하며 정성껏 돌을 던지기도 했다. 놀다가 썼던 윷은 성바위 아래 굴속에 넣어 보관했다가, 다음 해에 가장 최근에 결혼한 부인이 꺼내어 깨끗이 씻어서 다시 사용했다. 윷놀이를 이끄는 사람은 23세, 33세, 43세인 여자가 했고, 나이가 같으면 생일이 늦은 사람이 맡았다. 옛날에는 아들을 셋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3’이란 숫자가 중요했다. 요즘은 이런 행사는 사라졌고, 혹시 아들을 갖고 싶어하는 여자가 몰래 와서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말만 전해지고 있다.

 

5.9.아갈바위 전설(행정리)

 행정리 뒷산에 있는 감투봉이라는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 모양처럼 보여서 '아갈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행정리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마을을 지켜주는 바위라고 믿었다.그런데 이 바위가 바라보는 쪽에 있는 창봉리 마을은 부자가 안 된다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창봉리 사람들은 바위 입 모양에 돌을 넣어 막았는데, 나중에 돌이 굴러서 떨어지곤 했다. 6.25 전쟁 후, 창봉리 사람들이 폭약을 써서 바위 입 모양을 망가뜨렸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창봉리 마을이 조금씩 잘 살게 되었지만, 행정리는 전처럼 잘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5.10.장수바위(어둔리)

  어둔리에 있는 70여평의 넓은 바위로 그 곁에 깨끗한 물이 흘러 놀이 또는 휴식에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옛날 이 바위에서 장수가 나타나 놀았다고 하며 그 장수는 얼마나 힘이 센지 집채만한 바위를 들 수 있고 아름드리 나무를 뽑았다고 한다.

 

5.11.뜀바위(어둔리)

 장수바위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뜀바위가 있는데 옛날에 장수바위에서 난 장수가 3미터 가량이나 되는 양쪽 바위를 뛰어 건넜다고 한다.
이 장수바위는 그 높이가 0.7미터나 되며 현재도 장수 발자국이 남아 있다. 맑은 물가의 넓은 바위가 있어서 유원지로서 좋은 장소이다.

 

5.12.칼바위(초원리)

 공근면 초원리 안입벌에 있는 바위로서 옛날에 장수가 훈련을 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장수는 말을 타거나 활을 쏘며 훈련하는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칼을 들고 훈련하였다는 특이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5.13.뜀바위(창봉리)

 칼바위 옆의 넓적한 바위를 뜀바위라고 부른다. 창봉리 뒷산인 오음산의 골짜기에 있는 바위로 조선시대 때 길림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음산에 올라가 큰 바위를 흔들었다고 하는데 이 때에 흔들었다는 흔들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서 뛰면서 쉬어갔다는 쉼 바위가 있다.
 

5.14.막골의 전설(덕촌리)

 옛날 공근면 덕촌리라는 마을의 골짜기에는 신라시대에 '퇴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없어졌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돌로 된 부처님(석불)을 발견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어느 날, 초원리에 있는 백운암이라는 절의 스님이 꿈을 꿨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덕촌리에 가면 석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가져다가 정성껏 모시면 절이 잘 될 거예요.” 스님은 이 꿈이 너무 신기하고 생생해서, 진짜 덕촌리에 와서 석불을 찾았고, 찾은 뒤에 절로 가져가 잘 모셨다고 한다.

 

5.15.점말의 유래(어둔리)

 공근면 어둔리 2반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말이라고 불린다. 왜 그런 이름이 생겼는지에 대한 전설이 있다.
옛날에 이 마을에 ‘태 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사람들은 홍천 두촌이라는 곳에서 철()의 원석을 소 6마리에 싣고 마을로 가져왔다. 마을에서는 그 돌처럼 생긴 철 원석을 숯불에 녹여서, 보습(밭 갈 때 쓰는 농기구)이나 가마솥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 일을 할 때는 사람 6명이 팀을 이뤄, 교대로 바람을 불어주는 작업(풀무질) 하며 몇 시간 동안 일했다. 이렇게 철을 만드는 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부터 시작되어서, 일제 시대 말쯤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쇠를 만들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점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5.16.송장골의 전설(매곡리)

 공근면 매곡리 산골짜기에 있는 한 곳을 '송장골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에는 전쟁 때 생긴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이 산에서는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국군(우리나라 군대)과 북한군이 서로 이 산을 차지하려고 앞산과 뒷산에서 총을 쏘며 싸웠다. 이 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라서 이기려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서로 번갈아 가며 이 산을 차지하려고 계속 공격했다. 하지만 결국엔 북한군이 더 많은 병력으로 몰려와서 국군과 유엔군은 밀리고 말았다. 그 싸움으로 인해 국군 병사 50여 명이 전사(목숨을 잃음)했고, 그 시신(송장)을 다 수습하지 못해 이 골짜기에 묻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송장골(죽은 사람의 골짜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17.벽학산에 얽힌 전설(학담리)

 

5.18.할미소에 얽힌 전설(창봉리)

 

5.19.선강정(상동리)

 

5.20.충견비(어둔리)

 

5.21.원탑(초원리)

# 공근면 옛이야기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공근초등학교,수백초등학교
중학교 : 공근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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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