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근면 삼배리에는 '소경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소경)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살았는데, 시아버지가 오래 살려면 며느리와 함께 살면 안 된다고 며느리의 꿈에 흰 수염이 달린 도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시아버지 몰래 산등성이 너머에 집을 지었다.
며느리는 매일 새벽 일찍 시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시아버지를 모셨고, 밤에는 다시 자기 집으로 가서 잠을 잤다.
이렇게 몇십 년을 노력한 덕분에 시아버지는 80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시아버지가 살던 곳은 '큰 소경골', 며느리가 살던 곳은 '작은 소경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근면 칠봉산에는 '호골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곳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는데, 바위의 깊은 굴 속에는 칠봉산을 지키는 신령의 금부처가 있었고, 호랑이가 그 부처를 지켰다고 한다.
이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부처님을 지키는 데만 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호랑이가 죽자, 온 마을이 울릴 만큼 큰 울음소리가 났고, 사냥꾼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후, 아무도 그 굴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호랑이의 뼈가 썩어 바위의 이름이 '호골바위'가 되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지금도 굴 속에 금부처가 있어 이 마을에 부자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난다고 믿고 있다.
공근면 오산리에는 '귀웅소'라는 깊은 웅덩이가 있다. 옛날 이곳에는 용이 되려고 기다리는 아주 큰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착한 농부가 키우는 말이 매일 그 구렁이가 있던 자리를 밟고 다녀서 구렁이는 용이 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님은 그 구렁이가 나쁜 용이 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용이 되기 3일 전, 스님은 농부에게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그 자리를 떠나자, 구렁이는 드디어 하늘로 올라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말도 놀라 함께 죽고 말았다.
그 후로 그곳은 '귀웅소'라는 깊은 웅덩이가 되었고, 구렁이의 한 때문인지 지금도 종종 사람이 빠져 죽는다고 한다.
공근면 오산리에는 절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백여 년 전, 이곳에 살던 한 아가씨는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약혼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설득했지만, 아가씨는 약혼자에 대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결국 혼자서 시댁으로 갔다.
아가씨는 죽은 약혼자의 옷을 걸어놓고 혼자 결혼식을 올렸고, 약혼자의 무덤 옆에 작은 집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그 후, 평생 시댁에서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아가씨의 굳은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의 이름을 '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근면 부창리에는 용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바위 밑에 살던 용은 '자지봉'이라는 산의 붉은 단풍이 바위에 비칠 때 하늘로 올라가라는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
용은 오랫동안 단풍이 비치기를 기다렸지만, 자지봉이 너무 멀어 단풍나무가 잘 자라지 않았다. 참다못한 용은 토끼들에게 단풍나무를 잘라 참나무에 매달게 했고, 꾀꼬리를 시켜 참나무에 단풍잎을 매달게 했다.
토끼와 꾀꼬리가 시키는 대로 하자, 붉은 단풍이 용바위에 비쳤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옛날에 독재봉에는 아주 특별한 인삼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삼은 효심(부모님을 잘 모시는 마음)이 아주 깊은 사람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삼을 찾으러 갔지만, 아무도 그 인삼을 캐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인삼이 물속에서 보였지만, 가까이 가면 다시 사라져서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부모님께 잘하는 효심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약 200년 전, 지금의 궁근중학교와 그 근처 주택가에는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강가에 예쁜 마을이 있었다. 특히 강 옆 언덕에는 햇빛이 잘 드는 좋은 곳에 여러 집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주 크고 멋진 기와집이었다. 마치 궁궐처럼 커서 많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지만, 돈도 많고 이름도 알려진 큰 부자였다. 그런데 언제인지 모르게 그 집은 없어지고, 그 가족들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그 집이 있던 자리만 ‘장자터’라고 불리며 전해지고 있다.
요즘도 그 근처에는 옛날 집에서 나온 기와 조각들이 보여서, 정말 그런 부잣집이 있었던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옛날에 공근면 학담리라는 마을 뒷산에는 아주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멀리서도 보일 만큼 크고, 꼭대기에는 세 장짜리 멍석을 깔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평평한 곳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 여자들이 놀러 오던 장소였다고 한다. 이 바위 아래에는 샘물(맑은 물이 나오는 곳)도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매년 음력 3월 3일이 되면 근처에 사는 부인들이 모여서 윷놀이를 했다. 이 날은 '3'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많은 날이었다. 부인들은 멍석 3장을 깔고 윷놀이를 한 다음, 작은 돌 3개를 주워 ‘아들 바위’라는 바위를 맞히는 놀이를 했다. 성바위 아래에 있는 ‘아들 바위’를 맞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고, 못 맞히면 딸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부인은 아들을 갖고 싶어서 무릎 꿇고 기도까지 하며 정성껏 돌을 던지기도 했다. 놀다가 썼던 윷은 성바위 아래 굴속에 넣어 보관했다가, 다음 해에 가장 최근에 결혼한 부인이 꺼내어 깨끗이 씻어서 다시 사용했다. 윷놀이를 이끄는 사람은 23세, 33세, 43세인 여자가 했고, 나이가 같으면 생일이 늦은 사람이 맡았다. 옛날에는 아들을 셋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3’이란 숫자가 중요했다. 요즘은 이런 행사는 사라졌고, 혹시 아들을 갖고 싶어하는 여자가 몰래 와서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말만 전해지고 있다.
행정리 뒷산에 있는 감투봉이라는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 모양처럼 보여서 '아갈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행정리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마을을 지켜주는 바위라고 믿었다.그런데 이 바위가 바라보는 쪽에 있는 창봉리 마을은 부자가 안 된다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창봉리 사람들은 바위 입 모양에 돌을 넣어 막았는데, 나중에 돌이 굴러서 떨어지곤 했다. 6.25 전쟁 후, 창봉리 사람들이 폭약을 써서 바위 입 모양을 망가뜨렸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창봉리 마을이 조금씩 잘 살게 되었지만, 행정리는 전처럼 잘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둔리에 있는 70여평의 넓은 바위로 그 곁에 깨끗한 물이 흘러 놀이 또는 휴식에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옛날 이 바위에서 장수가 나타나 놀았다고 하며 그 장수는 얼마나 힘이 센지 집채만한 바위를 들 수 있고 아름드리 나무를 뽑았다고 한다.
장수바위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뜀바위가 있는데 옛날에 장수바위에서 난 장수가 3미터 가량이나 되는 양쪽 바위를 뛰어 건넜다고 한다.
이 장수바위는 그 높이가 0.7미터나 되며 현재도 장수 발자국이 남아 있다. 맑은 물가의 넓은 바위가 있어서 유원지로서 좋은 장소이다.
공근면 초원리 안입벌에 있는 바위로서 옛날에 장수가 훈련을 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장수는 말을 타거나 활을 쏘며 훈련하는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칼을 들고 훈련하였다는 특이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칼바위 옆의 넓적한 바위를 뜀바위라고 부른다. 창봉리 뒷산인 오음산의 골짜기에 있는 바위로 조선시대 때 길림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음산에 올라가 큰 바위를 흔들었다고 하는데 이 때에 흔들었다는 흔들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서 뛰면서 쉬어갔다는 쉼 바위가 있다.
옛날 공근면 덕촌리라는 마을의 골짜기에는 신라시대에 '퇴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없어졌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돌로 된 부처님(석불)을 발견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어느 날, 초원리에 있는 백운암이라는 절의 스님이 꿈을 꿨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덕촌리에 가면 석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가져다가 정성껏 모시면 절이 잘 될 거예요.” 스님은 이 꿈이 너무 신기하고 생생해서, 진짜 덕촌리에 와서 석불을 찾았고, 찾은 뒤에 절로 가져가 잘 모셨다고 한다.
공근면 어둔리 2반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말’이라고 불린다. 왜 그런 이름이 생겼는지에 대한 전설이 있다.
옛날에 이 마을에 ‘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사람들은 홍천 두촌이라는 곳에서 철(쇠)의 원석을 소 6마리에 싣고 마을로 가져왔다. 마을에서는 그 돌처럼 생긴 철 원석을 숯불에 녹여서, 보습(밭 갈 때 쓰는 농기구)이나 가마솥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 일을 할 때는 사람 6명이 팀을 이뤄, 교대로 바람을 불어주는 작업(풀무질) 하며 몇 시간 동안 일했다. 이렇게 철을 만드는 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부터 시작되어서, 일제 시대 말쯤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쇠를 만들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점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공근면 매곡리 산골짜기에 있는 한 곳을 '송장골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에는 전쟁 때 생긴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이 산에서는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국군(우리나라 군대)과 북한군이 서로 이 산을 차지하려고 앞산과 뒷산에서 총을 쏘며 싸웠다. 이 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라서 이기려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서로 번갈아 가며 이 산을 차지하려고 계속 공격했다. 하지만 결국엔 북한군이 더 많은 병력으로 몰려와서 국군과 유엔군은 밀리고 말았다. 그 싸움으로 인해 국군 병사 50여 명이 전사(목숨을 잃음)했고, 그 시신(송장)을 다 수습하지 못해 이 골짜기에 묻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송장골(죽은 사람의 골짜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