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면은 군청 소재지에서 35Km 떨어진 홍천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청정지역으로 인제, 횡성, 평창군에 접하고 있으며, 넉넉한 인심과 예의를 숭상하는 정감이 넘치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해발 310m이상의 준산간 고랭지 지역으로 수리시설이 발달된 옥토에서 질좋은 오대쌀과 특산품으로 오이, 호박, 고추, 인삼(장뇌), 찰옥수수 등이 많이 생산되어 전국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특히 홍천의 맑은 물과 옥수수를 원료로 빚은 옥선주(명인제24호)를 생산 하는 지역이다.
또한 백여년전 동학 혁명군의최후 격전지로 800여 혼이 잠드신 동학혁명의 슬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매년 6월에 동학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출처: 홍천군청>
평창에서 홍천을 거쳐 횡성으로 이어지는 80여 구비 험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양구데미」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 이 곳에 한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묘를 잘 쓰면 부자가 된다는 말을 믿은 선비는 용하다는 지관을 찾아 묘 쓸 곳을 부탁했다. 지관은 남쪽이 훤하게 트인 한 고개마루를 묘지로 정해 주었다.
선비는 지관이 가리켜 준 곳에 묘를 쓰고 부자가 될 때 만을 기다렸다. 소상, 대상을 다치러도 그의 재산은 불지 않았다. 더 참고 기다릴 수 없게 된 그는 아버지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선비는 용하다는 다른 지관에게 이장할 묘소자리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좋은 날을 받아 이장을 서둘렀다. 그런데 묘를 파헤치고 관을 막 들어 내려는 순간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관 밑 땅속에서 두 마리의 황금 비둘기가 푸드득 날아 고개를 넘어갔다. 선비는 더 참지 못한 것을 후회 했으나 이미 실책을 범한 뒤였다. 마을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선조의 묘를 함부로 옮긴 선비를 몹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이 후부터 이 고개를 「양구데미」라 불렀다 한다.
어느 날 황철승 노인이 약을 캐기 위해 상대에 갔다가 더워서 길 옆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는데 아래쪽에서 젊은 여인 두 사람이 어린 아이를 각각 등에 업고 땀을 흘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노인은 어디로 가는 분들인지는 모르지만 아기 젖이나 먹이며 쉬어가라고 말했다. 이에 두 여인은 황노인 옆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이 아래에 오다보니 산삼이 많이 있었으니 그 곳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산 위로 올라 갔다.
그런데 묘한 것은 몇 발자국 올라가는 것을 보았으나 갑자기 두 여인이 모두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황노인은 이상히 여기며 그 아래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살피다가 산삼이 여기 저기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꿈이 아닌가 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시 보았다. 틀림없는 산삼이었다.
황노인은 점심 밥으로 제를 올리고 내려왔다.
며칠이 지나 약효가 많다는 처서날에 택하여 이웃 사람들과 아들을 데리고 가서 산삼 60여 뿌리를 캐어 황노인은 큰 부자가 되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황노인이 만났다는 두 여인을 가리켜 착한 사람에게만 현신하는 여산신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아주 먼 옛날 서석골에 지통천의 아들 지수헌이라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센 할머니가 나타나서, “김장철이 되었는데 무 걱정도 않고 뭣하고 있느냐?”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에 지수헌이 대답하기를 “걱정않는 것이 아니라 무를 구하지 못해서 김장을 담그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디메쯤에 가면 무밭이 있으니 거기 가서 구해다가 김장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지씨는 목욕 재계하고 할머니가 일러준대로 그 곳엘 가보았다. 그 자리에는 무 대신에 어마어마하게 큰 육구만달 산삼 한 뿌리가 있었다. 지수헌은 이 산삼을 정성들여 캐다 팔아 논을 사서 부자로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서석을 ‘팔팔리’라고 불렀다. 그것은 팔백석하는 부자가 여덟 집 산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용두안가는 길 산허리 튀어나온 곳에 ‘용두뿔’이 있고, 그 밑에 연못이 있었다. 뿔 뒤에 부잣집이 살았는데 그 부자는 욕심을 내어 그 용두뿔 부분을 깎아 내려서 연못을 메우고 논을 만들려고 하였다. 한창 연못을 메우고 있는데 갑자기 연못 속에 있던 용이 나가 버렸다. 이 용이 나와서 산 너머에 있는 용수에 넘어 들어간 후로는 서석에 있는 부잣집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망해버렸다 한다.
이렇게 큰 부잣집들이 모두 망해서 동네가 살기 어렵게 되자 동네 어른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이 고장 발전을 위해 뿔을 만들었다.
다시 뿔을 만든 후부터는 동네에 재물이 모였지만, 동네의 처녀 총각들이 바람이 나서 혼란스러웠다 한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뿔을 헐어서 혼란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그 후로 서석에는 부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 구목령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중간에 마씨 내외가 살았다 마씨 내외는 백발이 성성하게 늙도록 자손이 없어 자식같이 키우는 말 한필을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그 말을 강가에 매어다 놓고 두 내외는 집에 들어 앉아서 한탄을 했다. 백발이 찾아와 죽을 날이 머지 않았는데 후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어떡하나 하면서 한탄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하늘이 캄캄해지고 뇌성벽력이 떨어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뒤늦게서야 강가에 매어놓은 말이 생각난 노부부는 자식같이 여기는 말을 비 맞힐 수야 없지 않겠느냐면서 폭우를 무릅쓰고 말을 데리러 나갔다. 노파가 말렸지만 노인은 듣지 않고 기어코 나갔다. 밤이 새도록 노인도 말도 소식이 없었다.
새벽이 되자 폭우로 방 문턱까지 물이 찼다. 아무 소식이 없자 노파는 아직 물에 잠기지 않은 바위에 올라가 휭하니 둘러 보았다. 그러나 노인과 말은 온데 간데 없고 홍수만 흘러갈 뿐이었다. 노파는 더 바랄 것이 없다 하고 물로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다.
그 후로 이 바위를 망정암, 노파가 물에 빠진 곳을 망정소라 부르고 있다. 그 뜻은 노파가 노인과 말과 함께 살던 정을 생각해서 일편단심을 물 가운데에 던졌으므로 그 정(情)을 바라본다고 하여 망정암(望情岩)과 망정소(望情沼)라 한다.
노인이 죽은 혼령은 구목령(九木嶺)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산신령이 되었고, 노파의 혼령은 마고산의 마고봉에 올라 가서 마고산 신령이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산삼 캐는 심마니들이 꿈을 꾸어 하얀 할머니가 나타나면 심을 많이 캔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청량리에 가면 정씨네 효자각이 있다. 옛날 아주 가난했던 시절 정씨의 부친이 병환이 났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정씨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을 고쳐드리기 위해 낮에는 산에 가서 약초를 캐고 밤에는 그것을 손질하여 다려서 드리기를 수 년을 그리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정씨는 최후의 수단으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했는데도 여전히 병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부친의 병은 잉어를 드시게 해야 고쳐진다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 때는 엄동설한의 동지섣달이었다. 정씨는 잉어라는 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나 부친이 살수 있다는 일념으로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갔다. 그리고는 맨 주먹으로 얼음을 꽝꽝 치기 시작했다.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드디어 얼음이 녹으면서 깨지더니 고기 한 마리가 펄쩍 뛰어 올라 얼음 바닥 위에 내려 앉았다.
정씨는 그 고기를 고아서 부친께 드렸더니 씻은듯이 병이 나았다.
이러한 소문이 한양 대궐까지 들어가 나라님이 효자각을 내려 주었다. 이 후부터는 정씨네의 가세가 차츰 일어섰다고 한다.
홍천군 서석면 수하2리 용호대란 곳에 구메바위가 있다.
용호대란 이름은 서석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마치 용의 형상이라 하여 이곳에서부터 용이 구비구비 틀고 올라가 서석면 어론리에 있는 용두산에서 승천하였다 하니 짐작이 가는 일이며 이 구메바위 위에 저녁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울어 이 마을을 지켜준다 하여 용호대라 칭하였다.
이곳 상 용호대와 하 용호대를 연결하는 벼랑길이 있으니 이곳에 바로 구메바위가 있다.
구메바위란 구멍바위의 변화된 말이 아닌가 싶다.
강에서 한 자 높이에 넓은 구멍이 있으니 이 구멍안에 들어가면 자리 한 장 깔 정도의 넓은 반석홀이 있어 동학란, 3·1운동, 6·25동란 등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 옛날 아주 옛날에 커다란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이 구렁이가 수천 년을 묵어 용이 되어 강을 따라 서석 용두안 쪽을 향하여 승천하였으니 용호대란 이름을 갖게 되었고, 구메바위의 지상으로는 조각 조각의 돌을 세워 놓은 듯한 수십개의 선돌이 세워져 있으며 이곳을 싸고 도는 벼랑길은 사람 하나 겨우 다니는 길이다.
6·25당시 1·4후퇴 때의 일이다.
중공군이 동창에서 용호대를 향해 야간 행군을 시작하였다. 바로 벼락구미를 지나 이 구메바위를 지날 때 중공군의 행렬이 멈추었다. 벼랑 길에서 2~3명의 중공군이 강바닥에 떨어져 직사하였기 때문이다.
행렬은 뒤로 돌아갔으며 이정표를 고쳐 “이 길로 갈 수 없으니 행로를 갈현리로 해서 절골로 돌아가라”하여 다시는 이곳에 적군이 근접치 못 하였다 하며 이것이 바로 이 구메바위가 용호대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이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홍천신문 발췌)
초등학교 : 삼생초등학교,서석초등학교,서석(항곡)초등학교,서석(청량)초등학교
중학교 : 서석중학교
고등학교 : 서석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