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읍(華川邑)은 화천군의 군청소재지로 화천군의 행정, 교통, 산업의 중심지이며,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파로호(화천호)는 담수어[1]의 양어장일뿐더러 좋은 관광지이며, 그 밖에 간동팔경(看東八景)인 성불령, 용화산, 수불무산, 원천곡, 부용산, 죽엽산, 병풍산, 구운소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30m 높이의 폭포, 승소, 광암, 백운담 등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옥수수 외에 사과·배·약초재배 및 양계도 하며, 복숭아 재배와 사슴 사육과 표고버섯이 많이 난다. 70%의 인구가 군청 소재지인 아리를 비롯한 상리·중리·하리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인구가 희박[2]하다. 상업활동은 아리에 있는 상설시장[3]과 정기시장[4]인 우시장[5]을 통해 이루어진다.
화천-읍(華川邑) : 화천군 1읍 4개면 81개리의 소재지로서 현내면(縣內面)이라하여 대리(大利), 신읍(新邑), 거차탄(居次呑), 수동(水洞)리를 관할하다가, 고종32년(1895)에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6]되어 대리(大利), 신읍(新邑), 풍산(豊山), 수동상하(水洞上下), 읍사(邑四「上里, 中里, 衙里, 下里」) 리를 관할하였고, 1914년 군면폐합[7]에 따라 동면(東面)의 방천리(芳川里)의 일부를 편입하여 上,中,衙,下,新邑,豊山,大利,水上,水下의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37년 화천저수지(파로호)가 생김에 따라 간동면(看東面)의 동촌(東村), 태산(太山) 2개리를 편입하였으며, 1945년 38도선 이북이 되어 공산치하[8]에 있다가 1950년 6.25사변으로 수복[9]되었으나 수상, 수하 2개리는 아직 민간인이 들어가 살지 못하고 있다. 그 후 화천면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하여 화천읍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은 양구군(楊口郡)의 방산면(芳山面)과 양구읍(楊口邑),남쪽은 춘천시(春川市)의 북산(北山), 신북(新北), 사북(史北)의 3개면, 서쪽은 하남면(下南面)과 상서면(上西面), 북쪽은 철원군(鐵原郡)의 원남(遠南), 원동(遠東), 임남(任南)의 3개면에 접하고 있다.
대이-리(大利里) : 옛부터 이 고장을 아랫대리,윗대리라고 불렀는데 본래 군내면의 지역으로 이조시대에 대리원 (大利院)이 있었으므로 대리(大利)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덕(後德)과 풍산리와의 경계에 있는 무럭마을을 병합[10]하여 대이리라 하였다.
동촌-리(東村里) : 본래 간동면(看東面)지역으로 화천읍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동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산리(太山里)일부를 병합하여 간동면 동촌이라 하였다가 1937년 화천땜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간동면과의 교통이 불편해짐에 따라 화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에 태산리 전체가 동촌리에 병합되었다. 1964년 간동면 구만리에 화천면 동촌출장소와 간동면 구만출장소를 설치하여 유지해 오다가 1981년 동촌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79년 5월 1일자로 동촌리가 동촌1,2리로 분리되었다. 지금도 풍산리 홈사리의 호음고개가 유일한 육상교통로인 관계로 선박을 많이 이용하고 있는 육지 속의 고도이다.
상-리(上里) : 옛날부터 웃말 또는 상말이라 불려지던 마을로 화천읍 본동에서 가장 윗쪽에 위치한 부락이다. 현재 용신(龍神)으로 건너가는 다리부근을 마구네미(막아서 넘기다)라고 하는데 원래는 화천천(川)이 서산(西山)밑을 끼고 흘러가던 것을 마구네미에서 물길을 막아 지금의 화천천을 형성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평(後坪)을 병합하여 다시 상리라 하다가, 1979년 5월 1일자로 상리에서 상1,2리로 분리하고 1981년 7월 1일자로 신읍리(新邑里)에 속하였던 용신(龍神), 샛골,옹기점말, 원수채를 편입하여 상1,2,3리로 분리하였다.
신읍-리(新邑里) : 본래 화천군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으로서, 낭천현(狼川縣)의 읍터가 있으므로 신읍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신(龍神), 동지화(東芝花), 신촌(新村), 신덕(新德),보래골, 파수골, 남벌원, 율대(栗岱), 늘아우(乙阿隅), 솔골, 호계동(號溪洞)을 병합하여 신읍리라 하였다. 신읍1리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자연부락을 단위로 옛날에 밤나무가 많이 있던 부락을 율대(栗岱)라 부르고, 율대와 풍산리(豊山里)방향으로 큰 골에 있는 마을을 새마을(새말) 또는 샛말이라 불렀다. 신읍2리는 보리농사가 잘된다하여 보리동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보래골, 보래동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옛날 군사들이 사용할 군량미[11]를 보관하던 곳으로 군량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군량미를 보호하기 위하여 파수군을 두어 지키던 곳이라하여 파수동(把守洞)이라고 불렀다. 1979년 5월 1일 신읍리에서 신읍 1,2리로 분리되었다.
아-리(衙里) : 군내면(郡內面)의 지역으로서 아전(衙前)들이 살았으므로 아리(衙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손이(加孫伊)와 전장골을 병합하여 다시 아리(衙里)라 하였다. 1979년 5월 1일 衙里가 衙1,2리로 분리되고 그 후 1981년 7월 1일 衙1리에서 衙1,2리로, 衙2리에서 衙3,4리로 분리되었고 가손이와 전장골은 衙5리가 되었다. 아리에는 군청, 경찰서, 읍사무소등 관공서가 거의 다 모여 있으며 신작로 변으로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중-리(中里) : 군내면(郡內面)지역으로서 화천읍내의 중심지가 됨으로 중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배머리(巳積洞)를 병합하여 다시 중리로 부르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자로 중1리를 중1,2리로 분리하고 1981년 7월 1일자로 중1리를 중1,3리로 분리하였는데 특히 중2리는 옛날부터 소금배가 닿는 곳이라하여 뱃머리라 부르기도 하고, 풍수지리상 뱀의 머리(巳頭)라하여 뱀머리라 부른다고 한다.
풍산-리(豊山里) : 화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풍사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호음동(好音洞), 평촌(坪村), 전연동(全連洞), 고장배기, 명승동(名勝洞), 우장동(祐長洞), 해안동(海安洞)을 병합하여 풍산리라 하였다. 1979년 5월 1일자로 풍산1,2리로 분리하였다.
하-리(下里) : 하리(下里)는 옛부터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려진 이름으로 下里로 호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향교골, 솔캐여울을 병합하여 다시 下里라 하였다. 1979년 5월 1일자로 下1,2里로 분리하였고 그 후 1981년 7월 1일자로 下1里에서 下1,4里로, 下2里에서下2,3,5里로 분리되었다.
미륵[12]바위는 화천 시내에서 파로호 방면으로 약 2km 가다보면 461번 도로 오른편에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륵을 닮았다는 이유로 미륵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얼굴을 보면 인자한 표정의 '미륵'을 확인해볼 수 있는데 미륵은 '석가모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5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는 미륵바위는 본래 미륵을 닮은 모습이었으나 자연풍화[13]로 인해 지금의 모습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5.2.주전자 바위의 전설
화천에는 여러 산들이 있지만 그중 화천군민이 가장 사랑하는 대표 명산은 바로 용화산이다.. 화천 사람들의 정신적인 영산[14]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02년 옛 지명 낭천이 화천으로 개칭되면서 용화산의 높고 아름다움을 본받고자 중간 글자 '화'를 가져다 썼다고 한다. 용화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위의 모습이 주전자 주둥이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주전자바위'인데, 비가 내리는 날 이 바위를 보면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물과의 연관성 때문인지 옛날 화천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 주전자 바위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내고장 바로알기, 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