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동면

                                                                                                                                                                                                                                                           

1.개요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7.97㎢, 인구는 1,149세대에 2,49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촌리이다.
북쪽으로 화천읍, 서쪽으로 하남면(下南面), 남쪽으로 춘천시 사북면(史北面)과 북산면(北山面), 동쪽으로 양구군 양구읍에 접해있다.
본래 동면(東面)이었으나, 1914년 간척면(看尺面)과 군내면(郡內面) 대리리(大利里)를 병합[1]하여 간동면이라 하였다. 북위 38˚이북에 위치하여 1945년 이후 북한에 속해 있다가 1950년 6·25전쟁 이후 수복된 지역이다. 북쪽에 파로호(破虜湖)가 있고 대부분 산간지역[2]이나, 중앙부의 간척리·오음리(梧陰里)·용호리(龍湖里) 일대에는 침식 완사면[3]이 발달하여 경지[4]와 취락[5]이 밀집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옥수수 등이고, 특히 한우와 돼지 사육이 활발하며, 호수 주변의 내수면 담수어종도 풍부하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2,712총 인구수
1,442인구(남)
1,270인구(여)

4.지명의 유래

  • 간동면 : 화천군 1읍 4면의 하나. 동면(東面)과 간척면(看尺面)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1760)[6]를 보면, 동면은 관불(觀佛), 말흘대(末訖大), 방천(芳川)리를 관할하였고, 간척면은 도송동(都宋洞), 어읍삼(於邑三), 오음사(五音寺), 상간척(上看尺)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관동지(關東誌.1829~31)를 보면, 간척면의 지명에서 어읍삼리(於邑三里)가 유읍삼리 (楡邑三里)로, 오음사리(五音寺里)가 오음사리(吾音寺里)로 다소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동읍지(關東邑誌.1871)를 보면, 동면의 말흘대리가 태산리(泰山里)로, 간척면의 유읍삼리가 유촌리(楡村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의 동촌(東村), 태산(泰山), 방천(芳川)리와 간척면의 도송 (都宋), 유촌(楡村), 오음(梧陰), 간척(看尺), 구만(九萬)리를 통합하 여 간동면(看東面)이라 개칭되었다. 이때에 도송리는 구만리에 통합되어 간동면은 7개리를 관할하였다. 1937년 화천땜 건설로 저수지(지금의 파로호)가 생김으로써 교통문제로 구만리에서 도송리가 다시 분리되었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4년 11월 17일 군정(軍政)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현재 1출장소 7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은 양구군(楊口郡)의 양구읍(楊口邑), 남쪽은 춘천시(春川市)의 북산면(北山面), 신북면(新北面), 사북면(史北面), 서쪽과 북쪽은 화천읍(華川邑)에 닿음.

  • 간척-리(看尺里) :【리】본래 간척면(看尺面)의 소재지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지촌(陽地村), 음지촌(陰地村), 영원동(靈遠洞), 탑구미, 후촌(後村), 서옥동(瑞玉洞), 간을촌(看乙村)을 병합하여 간척리라 하였다. 명칭의 유래는 예전에 낭천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 마을의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여 마치 돼지우리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바로 지척에 있는 춘천을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구경 한 번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당시 노인들이 볼간(看)자와 자척(尺)자를 따서 간척(看尺)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상간척(上看尺)이라고도 불렀는데 화천땜 완공후 간척으로 불러 오다가 수복후 간척리로 되었다. 그 후 1976년 12월 7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간척1,2리로 분할되었고 1979년 9월 간척1리에서 간척1,3리로 분할되었다.

  • 구만리 :【리】화천군 간척면의 지역으로 북한강(北漢江)의 구석에 있으므로 구마니라 하였다 하는데, 일설에는 화천땜 완공 이전에는 화천-양구간에 골짜기가 많고 구비구비 돌았다하여 아홉九자와 일만萬자를 따서 구만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송동(都宋洞), 동면(東面)의 동촌리(東村里)일부와 군내면(郡內面)의 대이리(大利里)일부를 병합하여 구만리라 하고 간동면에 편입되었다. 1937년 화천땜 완공으로 저수지가 생기면서 교통이 불편해지자 도송동을 분리시겼다. 담수로 인해 구만리 원래의 마을은 물속에 잠기게 되었는데 이 마을을 구구만리라 하고, 현재 새로 생긴 마을을 신구만리라 부르고 있다.

  • 도 송-리(都宋里) :【리】화천군 간척면의 일부지역으로 도송골 또는 도송동(都宋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만리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 화천땜이 준공되어 저수지가 생김에 따라 다시 분할되어 도송리가 되었다. 이 고장은 옛날에 소나무가 많은 마을이라하여 도송골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이 마을에는 송(宋)씨 가문에서 많은 인재[7]가 나와 명성을 떨쳐 많은 학자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도송동(都宋洞)이라고 불렀다.

  • 방 천-리(芳川里) : 본래 화천군 동면(東面)지역으로서 큰내(川)가 흐르고 있다하여 방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내, 후동, 진부터, 갓골, 운수골, 물안골, 골방천과 동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방천리라 하고 간동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1940년대 이전에는 무척 큰 마을이었으나 화천땜 건설로 마을의 대부분이 물에 잠기어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남은 주민들은 산비탈과 골짜기에 마을을 이루어 다시 방천리라 하였다. 1960년대에 방천1,2리로 분할되었는데 설악재(峰)을 중심으로 동쪽은 방천2리, 서쪽은 방천2리로 나누었다. 신재, 갓골, 김부터, 절골, 둔전, 부대골, 후동을 합쳐서 방천1리라 하고 석전동, 운수골, 골방천을 묶어서 방천2리라 하였다.

  • 오 음-리(梧陰里) : 본래 화천군 간척면의 지역으로 오음사(梧音寺)가 있었으므로 오음사, 오름사또는 오음사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림(東林), 바람버데이, 너판을 병합하여 간동면에 편입하였다. 옛부터 오동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오음리 또는 동림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오동나무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을의 명칭은 음사(音寺)리로 불려지는데, 이는 지금의 오음1리에 절이 있었는데 항상 절간에서 종소리가 들려 와 절의 종소리가 끊이질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오음리에 사는 노인들은 자주 ‘오음사를 다녀온다’라는 표현으로 오음리를 오음사라고 명칭[8]하기도 한다.

  • 용 호-리(龍湖里) : 【리】본래 화천군 간척면의 지역으로 구만리의 뒷 골짜기가 되므로 뒷골 또는 후동(後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촌리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 화천땜 완공으로 인하여 저수지가 생기고 1954년에 와서 유촌리에서 분리되었다. 마을의 명칭은 마을 뒤에 있는 용화산의 용(龍)자와 파로호의 호(湖)자를 따서 용호리라 칭하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씨조선 말기에 그전까지는 석(石)씨가 이 마을의 대부분이었는데 왕의 후궁으로 들어간 여산 송씨가 역적[9]으로 몰려 송씨들이 방천리쪽으로 피신하였다가 점차 간동면의 뒷골, 도송리, 유촌리, 간척리로 이주[10]해 와 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용호리가 제일 많은 송씨촌을 이어가고 있다.

  • 유 촌-리(楡村里) : 【리】본래 화천군 간척면의 지역으로 늘읍삼니 (於邑三里), 유읍삼리(楡邑三里)로 표기 되어 오기도 하고 느릅나무 밑에 샘이 있다하여 느릅새미, 유촌(楡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레미, 뛰개, 먼내골을 병합하여 유촌리라 하였다. 1979년 9월 1일 행정구역 분할로 인하여 유촌1,2리로 나눠졌다. 속칭[11]으로 느릅새미라 불리는데 옛날 황해도 해주에서 오(吳)씨가 낙향[12]하여 당시 느릅나무 숲으로 이루워졌던 이 곳에서 느릅나무를 제거하고 살기 시작하여 느릅나무 유(楡)자를 따서 유촌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화천문화원>

5.지역의 옛이야기

5.1.처녀고개 전설

딴산 유원지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소나무 덮인 조그만 바위산인 전설 속의 '처녀고개'가 보인다. 지금은 잘 포장된 길이지만 이곳은 슬픈 전설이 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도령과 장래를 약속한 처녀가 살고 있었어요.
도령은 처녀에게 기다려 줄 것을 약속하고 과거를 보러 떠났지요.
그후 처녀는 날이 저물면 도령님이 고개를 넘어 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해요. 도령이 한양으로 떠난 그 다음해부터 처녀는 자기 키와 같은 소나무를 골라 도령의 버선목을 매달아 놓았어요.
이렇게 기다리기를 십년. 어느 날 처녀는 더러워지고 빛바랜 낡은 도령의 꽃버선을 새로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어요.
처녀가 죽던 날 도령은 장원급제하여 돌아왔으나 처녀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어간 처녀를 위해 벼슬을 버리기로 도령은 결심했답니다.
그리고 처녀의 무덤 옆에 초가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해마다 풍년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이 동네를 '풍산리'라 이름 짓고, 처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버선목을 배달았던 소나무를 성황으로 모시고 이 고개를 '처녀고개'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답니다.

<내고장 바로알기,화천 "처녀고개 전설 이야기">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유촌초등학교, 오음초등학교
중학교 : 간동중학교
고등학교 : 간동고등학교

9.기타

Footnotes

  1. ^ 둘 이상의 기구나 단체, 나라 따위가 하나로 합쳐짐. 또는 그렇게 만듦
  2. ^ 산과 골짜기가 많은 지역
  3. ^ 비, 하천, 빙하, 바람 따위의 자연 현상이 지표를 깎아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면
  4. ^ 경작하는 토지
  5. ^ 인간의 생활 근거지인 가옥의 집합체. 넓은 의미로는 가옥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거주 형태 전반을 이르기도 한다
  6. ^ 조선 후기에 각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전국 읍지. 55책. 필사본.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까지 펴낸 것을 합한 것으로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1개의 진지(鎭誌)가 포함되어 있다
  7. ^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학식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
  8. ^ 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이름. 또는 그것을 일컫는 이름
  9. ^ 자기 나라나 민족, 통치자를 반역한 사람
  10. ^ 개인이나 종족, 민족 따위의 집단이 본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함.
  11. ^ 세속에서 보통 이르는 말. 또는 그런 이름
  12. ^ 시골로 거처를 옮기거나 이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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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