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읍

                                                                                                                                                                                                                                                           

1.개요

평창읍은 평창군의 군청소재지로서 군의 남부에 위치하며 행정, 교육, 문화의 중심지이다. 주위에는 남병산(南屛山:1,150m)·백덕산(白德山:1,350m)·삼방산(三芳山:980m) 등이 솟아 있으며, 계방산(桂芳山:1,577m)에서 발원하여 읍내를 가로지르는 평창강이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평지를 이룬 덕분에 주진리·후평리·약수리 등에서 벼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쌀·보리 외에 마늘 생산이 많고, 한우 사육과 양돈도 이루어지고 있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8,572총 인구수
4,342인구(남)
4,230인구(여)

4.지명의 유래

  • 상리 : 본래 읍내지역으로 상리는 평창읍 시내의 위쪽에 있다하여 “상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상리교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황당 마을을 병합하여 다시 상리가 되었다. 
  • 중리 : 중리는 읍내 중심지역으로 방내(坊內) 중앙이 되므로 중리가 되었다.
  • 하리 : 읍내 지역으로 방내(坊內) 아래쪽이 되어 하리가 되었다.
  • 천변리 : 본래 읍내 남쪽 냇가(사천강)로 된 지역으로 1914년 천변리가 되었다. 원래는 강변에 위치하여 하리에 속하였는데 옛날 이곳에 살던 토호(土豪) 이씨, 지씨, 김씨 세사람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술을 나누다가 지씨가 제의하기를 우리 동네가 하리에 딸려 있을게 아니라 동네 이름을 지어 부르자하여 글에 달통한 지씨가 천변리라고 벽에 써붙어 불려온 것이 오늘까지 불리어 온다. 
  • 종부리 : 읍내 남쪽 지역으로 마을에 있는 산이 종(鍾)처럼 생기었다 해서 종부(鍾阜)라고 불렀다 한다.
  • 노론리 : 본래 뇌룬리라고 하였으며, 옛날 사색당파 분쟁으로 노론파가 반대파의 세에 몰려 이 마을로 들어와 피하여 살았다는 데서 노론이라고 불려졌다고 전하여 온다.
  • 이곡리 : 본래 마을 이름이 “구르니”, “구론”이라 했으며, 마을 형세가 “귀”처럼 생기었다고해서“귀골”이라고도 불리워왔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조정에 의해 마을지형에 맞추어 리명을 정하는 것이 옳다는 중론에 따라 법정리명을 이곡리로 정하였다.
  • 조동리 : 본래 고길리와 노론리 사이에 있으므로 “샜골”이라고 하였다. “비조탁목지형”의 산세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형상이라고 해서 새솔이라고도 불리어져 왔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화덕”, “탑상골“, ”산제곡“을 합쳐 법정리명을 조동리로 정하였다.
  • 고길리 : 고길의 본 마을로 조동에서 지동까지 길게 이어진 골짜기로 형성된 마을이라 ‘곡길’ 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예로부터 길한 마을이라 하여 고길리가 되었다.
  • 지동리 : 본래 마을을 “못골”이라 불렸다. 옛날부터 연못이 있어 오는데 못물이 3번만 넘치면 그해에 반드시 대풍을 이룬다는 전설이 있다. 1914년 법정리명이 지동리로 명명되었다. 
  • 유동리 : 평창읍의 남부지역으로 본래 버들골이라 불렸다. 마을의 지리적 형태가 버드나무 형국에서 지명이 유래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설정에 따라 안말, 점말(버덩)을 병합하여 유동리가 되면서 남면에서 군내면(평창면)으로 편입되었다. 
  • 약수리 : 본래 마을 어귀에 샘물 약수가 흘러 약수리라 불리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보안도에 딸린 약수역이 있어서 역촌이기도 한 마을이다. 옛 약수리에는 샘물이 흘렀는데 피부병에 걸린이가 몸을 씻고는 깨끗하게 나았다고 한다. 이 물이 영엄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물 맞으러 오는 사람이 길을 매우고 마을이 온통 혼잡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약수터 물이 흘러 나오고 있다.
  • 조둔리 : 읍의 서부 서쪽 약수리를 지난곳에 위치하며 남면 지역으로서 본래는 조뚜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둔리가 되면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조둔리는 새 조자, 진칠 둔자의 한자 의미에서 보듯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아늑한 형세의 새둥지 모양 같이 생겼으며, 예전에는 피난처로 여겼던 마을이라고 한다.
  • 천동리 : 본래 남면의 지역으로 좋은 샘이 있었으므로 샘골, 생골이라고 불렸는데 이조 중종때부터 마을을 정동으로 부르다가 임진왜란 뒤에 천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 도돈리 : 본래 남면 지역으로서 사천강이 적벽을 휘돌아 흘러서 마치 버선같이 둔덕이 되어 있으므로 도둔리라 불렸던 것인데 옛날 삼둔지지인 도둔(도돈), 들둔(입탄), 조둔을 일러 피난처로 여겼던 지역의 한곳이라고 전하여 온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조정에 따라 도돈리로 명명되면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응암리 : 본래 남면의 지역으로서 읍의 남부 동쪽에 있다. 옛날에 지형이 매화락지형이라고 해서 매화라는 속명으로 마을을 이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을 비롯한 관원과 백성들이 마을 앞 절벽에 난 굴로 피난할 때 매와 함께 피난했다고 하여 “응암리”라 부르게 되었다. 2개의 굴은 관굴과 민굴로 나뉜다. 이때 매가 위 아래 굴을 왕래하면서 통신을 하였다 한다. 1914년 “뒤다미”를 병합하여 응암리가 되면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마지리 : 읍의 남부 동남쪽에 위치하며 남면의 지역이었는데 옛날 물이 솟아오르며 용마가 나왔다는 용물추리가 있으며, 용물에서 말이 났다 하여 마지리라 불려졌다고 전하여 온다. 
  • 대상리 : 읍의 남부 서쪽 남단에 위치하여 남면에 속했던 마을로 대얏골 위쪽이 되므로 웃대얏골에서 노궐동, 안정동, 능암동, 구룡동을 병합하여 대상리라 하여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대하리 : 읍의 남부 서쪽 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남면의 지역으로서 대얏골 아래쪽이 되므로 아랫대얏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아랫대얏골에서 연봉정, 가정동, 삼정동, 사천, 북변을 병합하여 대하리라 하여 군내(평창)면에 편입 되었다. 
  • 입탄리 : 읍의 서부 서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 들뚜리, 들둔이라고 불렸다. 사방 높은 산이 둘러 있는 골짜기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항, 소동원, 조동을 병합하여 입탄리가 되면서 남면에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향동리 : 읍의 북부 서쪽골로 당초 북면에 속했던 마을이다.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실 또는 행동리라 불려져 왔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가골, 김가골을 병합하여 법정리명이 향동리가 되면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여만리 : 본래 북면 지역으로서 평창강가에 들이 넓어 논을 뜨니 만명이 먹고도 남는다고 여만리라 했다. 
  • 후평리 : 읍의 북부지역 즉 방내(상,중,하,천변리) 뒤쪽 들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뒷들이라고 불려져 왔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증항·시루목”을 병합하여 법정리명이 후평리가 되면서 북면에서 군내(평창)면으로 편입 되었다. 
  • 주진리 : 읍의 북부지역 동북쪽 4km 지점에 위치하며 본래 북면 지역으로서 두나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옛날 하촌 배터거리에서 나룻배로 사람과 우마차가 강을 건너 지금의 후평 동북쪽 영림서 종묘장 거리를 지나 통행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암동, 한천동, 부동을 병합하여 법정리명 주진리가 명명되면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용항리 : 읍의 북부지역 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북면 지역이었다. 마을에서 보이는 남쪽의 산이 용의 목처럼 생기었고 용당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임하리 : 원래 북면 지역의 한 마을이었다. 뒷산에 숲이 우거지고 많았으므로 “숲에” 또는 “수패”라고 불리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임하리”라 하여 군내(평창)면에 편입 되었다.
  • 계장리 : 읍의 북부 “옥고개”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일설에는 지형이 닭의 모양을 닮아 계장이라 불렀다고 하고,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북부지역의 유일한 관문인 옥고개 아래 첫 마을이라 사람들은 반드시 이 마을을 거쳐야만 읍으로 갈 수 있었는데 마을 청년들이 텃세를 부려 늘 행인들과 닭처럼 싸움을 하여 계장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북쪽으로 평창강이 길게 흐른다는 의미를 넣어 계장(溪長)으로 한자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 다수리 : 읍의 북부지역 논 벌판으로 이뤄진 마을로 북면 지역이었다. 본래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다수(多壽)라고 불리웠으며, 평창강가의 마을 중에서 물이 가장 많다고 하여서 다수(多水)라 하였다고도 전하여 온다.
  • 하일리 : 읍 소재지 북서쪽의 서출동류수 형태의 마을이다. 본래 하씨가 살았다고 해서 ‘하일’이라고 부르며, 물푸레 나무가 많다하여 “물푸레”라고도 불리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주좌리, 송봉내, 하수청을 병합하여 법정리명 하일리가 되면서 북면에서 군내(평창)면에 편입되었다. 
  • 원당리 : 읍의 북부 서북쪽 백덕산 아래 중턱에 있는 북부지역에서도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원나라의 원군이 나라에 침입하여 싸움에 패하고 도주하다 이 산골에 들어와 숨었다 하는데 본래 원당사라는 절이 있고, 집터로서 최고의 으뜸 마을이라 하여 “원당”이라고 불리었다. 
  • 뇌운리 : 조선 세조(世祖) 때 강릉부사로 임명받은 사람이 강릉으로 가기 위해 한양(서울)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급작스런 천둥 번개와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를 바위 아래에서 피하게 되였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며 먹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멀리 구름 속에 희미하게 인가가 보이고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 마 을이름을 뇌운이라 부르고 마을 앞산인 용산(龍山)을 금산(禁山)으로 정하여 입산을 통제하고 마을에서 신성한 산으로 받들었다. 
 

5.지역의 옛이야기

  • 약수리 

 
옛날 평창읍 약수리에 솟아나는 샘이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게 효험이 있어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물에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이 길을 메우고 온통 혼란을 빚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때로는 문둥병 환자가 끼어 와서 이 물에 목욕을 하거나 먹으면 씻은 듯이 나아서 가기도 하니 이에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이 마을은 문둥이 등살에 여간 혼란하지 않았으며 한 때는 밥 빌어 먹는 문둥이 때문에 주민들이 끼니마저 걸러야 할 처지에 놓여지기도 했다.
주민들이 약수 때문에 날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이 마을에 살고 있던 기운 센 장사가 절박해진 마을 형편을 알고는 큰 바위를 들어 약수탕을 덮어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간은 바위에 눌려 물이 흐르지 않더니 이후 묻어 놓은 바위 틈을 타고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이 물을 아무리 먹고 아무리 목욕해도 병에 아무 효력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장사가 바위로 약수를 덮은 후 약물이 다른 곳으로 옮겨 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지금은 약수가 없지만 옛날에 약수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이름을 약수리며 지금도 옛날 약수가 나오던 곳을 약수터라고 하며 맑고 깨끗한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평창초등학교,주진초등학교
중학교 : 평창중학교
고등학교 : 평창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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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