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시 북부에 위치한 춘천시의 유일한 읍으로 면적은 57.23㎢이다.
신북읍은 읍으로 승격하기 전에 춘천을 중심으로 북쪽 중간에 위치했다하여 북중면이라 불리었다가 새로 만든 북쪽의 면이라 뜻으로 신북면이라 불리었다.
신북읍은 율문리, 발산리, 산천리, 용산리, 유포리, 지내리, 천전리와 같이 7개의 행정리로 구분되어 있다.
좌방산의 원래 이름은 잣나무가 많고, 정상이 잣송이를 닮았다 하여 잣방산이었으나 차츰 좌방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발산리, 모곡리, 한덕리 등 좌방산 인근 주민들은 모두 잣방산이라 부르고 있다.
좌방산에는 잣과 관련된 애틋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이 마을에 덕쇠라는 효성이 지극한 머슴이 살고 있었는데, 그만 어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다. 덕쇠는 몇날 며칠 어머니 병수발에 매달리며 온갖 좋은 약을 갖다 바쳤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던 어느날 덕쇠의 효심에 감응한 산신령이 노승으로 변하여 덕쇠에게 잣방산의 잣 세송이를 따다가 갈아낸 물을 먹이라는 처방을 일러주었고, 결국 덕쇠는 어머니의 병환을 고쳐 어머니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한다.
이렇듯 효성이 깃든 잣으로 유명한 좌방산은 그러나 산행지로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산행로는 아직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상에 서면 홍천강의 도도한 물줄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여름철에 찾아오면 자연의 상쾌함을 맛볼 수 있는 산이다.
옛날에 신북읍 유포리에 정씨라는 아주 무지무지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노랭이로 소문이 나서 머슴들의 새경을 몇 년이 밀려도 주지 않았으며, 이웃이 흉년이 들어 굶어 죽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거지나 중이 와서 동냥을 달라고 해도 일절 주지 않았다.
또한 심보도 고약하여 외부인이 샘밭을 지날 때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보내줬어도,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잡아다 볼기를 치고 돈을 빼앗아 권세를 부렸다. 말을 타고 지나다 정부자네 종놈들한테 걸려들면 무조건, “샌님, 저기 말을 타고 갑니다.” 그러면, “양반 앞에 말을 타고 가는 놈을 붙잡아라.” 그리고는 붙잡아다가 볼기를 쳐서 돌려 보내곤 했다.
어느날 아침에는 중이 목탁을 치면서 시주를 왔는데 정부자가 이를 대청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중이 문턱을 서서 뚝닥거리며 가정의 번영과 안영을 위해 부처님께 귀의하라고 말하며 시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자가 중에게 다가가서는, “원 별 미친놈의 중을 다 보는군. 내가 언제 부처님 덕으로 살았나? 난 누구에게 공짜로 얻어 이렇게 살지는 않아. 내가 벌어서 내 입에 풀칠할 뿐이야. 그리고 남에게 공짜로 준 일 없으니 썩 꺼져!”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중은, “정부자님, 그럼 시주는 그만두고 지금 몹시 시장하니 요기나 시켜 주시면 왕생극락하도록 빌겠으니 자비를 베푸십시오.” 라고 중이 청하자 정부자는 종에게, “거기 쇠똥가래를 이리 줘라.” 종이 쇠똥가래를 주인에게 넘겨주자, “너 같은 놈 쌀 주기는 아깝고 이걸 가져 가거라.” 하고 정부자가 쇠똥을 한 삽 퍼서 중에게 내밀자 중은 바랑을 썩 내밀며, “아이구 정부자님 그것도 감사합니다.” 하고서 쇠똥을 받아 등에 짊어 메고 다른 집 시주도 하지 않고 휭하니 갔다. 이때 며느리가 부엌에서 쌀을 씻다가 시아버지 하는 양을 보고 생각다 못해 시아버지 몰래 씻던 쌀을 한 바가지 들고 중 뒤를 따라갔다. “스님! 스님!” 며느리가 부르는 소리에 중은 뒤를 돌아봤다. “부인, 왜 그러시요?” 숨을 헐덕이며 며느리가 중에게 쌀이 든 바가지를 내밀며, “스님, 용서하세요. 저의 아버님의 성품이 워낙 고지식하셔서 스님을 푸대접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버님 몰래 가지고 나왔으니 이것을 받으시고 저의 아버님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하니까, 중이 가만히 생각하기를 '며느리는 착한 며느리인데 주인이 심보가 고약하곤' 하며, “여보, 부인!” “예!” “당신 집에 화기 미칠 텐데, 살려면 지금 나를 따라 오시오. 단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뒤를 보면 후회하게 될 것이오.” 하며 화천 오음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향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며느리도 중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며느리가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두당탕퉁탕'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등 뒤의 마을쪽에서도 꾸르릉하고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무심결에 뒤돌아본 며느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집은 이미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거센 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막 지붕까지 삼키고 있었다. 며느리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며느리는 그 자리에 뒤를 돌아다보는 자세로 선 채로 바위가 되어 버렸다. 지금 유포리에 있는 아침못은 바로 그때 생긴것이다. 하루아침에 생겼다고해서 사람들은 그곳을 아침못이라 부른다.
병자호란 때의 이야기이다. 춘천 회동(지금의 신북읍 용산리)에 무작개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이돌봉은 군대에 징집되어 나가고 시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어느날 무작개가 산고개를 넘고 있는데 호병(청나라 군사)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덮쳤다. 무작개는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머리로 호병의 턱을 치받아서 호병의 이를 부러뜨려 놓았다.
호병은 자기 이가 부러진 보복으로 무작개의 머리가죽을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겁탈하려고 대들었다. 이에 무작개는 있는 힘을 다하여 호병의 국부를 움켜쥐고 죽어라 늘어졌다. 몸부림치던 끝에 간신히 무작개의 손을 뿌리친 호병이 이번에는 칼로 무작개의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리고는 또다시 겁탈 하려고 대들었다.
두 손이 잘려나간 무작개는 입으로 호병의 코를 물어뜯었다. 호병은 자기의 코가 잘려나간 보복으로 무작개의 입을 돌로 으깨어 버렸다. 그래도 무작개는 펄떡펄떡 뛰었다. 호병은 무작개의 몸을 토막내어 고갯길에 묻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땅이 들썩거렸다. 그것을 본 호병은 혼이 나가 죽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의 되소금(호염)장수가 춘천으로 소금을 팔러 왔다. 그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으려 하자 이 고개가 다시 들썩거렸다. 청나라 소금장수는 당황하여 소금짐을 뒤엎어 놓고 미쳐버렸다.
그 후로는 소금장수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이 이 고개를 넘으려 하면 사정없이 이 고개가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이었다. 이 고개가 바로 신북읍에 있는 뜨내리재(부심치)이다. 뜨내리재는 마적산 줄기에 있다. 마적산은 마작산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무작개의 이름을 따서 무작산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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