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읍은 궁예가 도읍을 정한 태봉국의 유서 깊은 고장으로 해방전에는 철원군청의 소재지로서 1931년 읍으로 승격된 도내에서 몇 안 되는 큰 도시였다.
해방과 동시에 공산치하에 들어가 6.25사변으로 구 도회지는 폐허가 되고 현재는 인구 6천여명의 소도읍으로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철원읍은 DMZ과 연접한 청정지역으로써 우수한 지리적 여건과 좋은 환경으로 전국 최고의 고품질 철원오대쌀 주산지로 그 가치와 명성을 키워가고 있는 농업지역이기도 하다.
<출처: 철원군청>
오늘날 경원선의 최북단 분단 지점이 되는 월정리역은 예전 월정리란 큰 마을이 있던 곳이다. 월정리로 부르게 된 데는 슬픈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이곳 어느 산골에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이 살고 있었는데 그 딸은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밤마다 달에게 빌었다.
어느 날 밤 달에게 빌다가 잠이 있었는데 꿈 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나는 달의 화신인데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르노니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 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다.
딸은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 입에 넣었으며,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우는데 가련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을 바위에 부딪혀 찢기고 피를 흘렸으나 가냘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짓기를 마쳤다. 그 덕분으로 아버지 병환은 나았으나 그 효녀는 영영 회생하지 않았다.
그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 즉 월정이라고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월정리라고 불리었다 한다.
<철원관광 100선>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무녀비탕이라 불리는 탕은 철원읍 사요리에 있다.
당시 신통술을 가진 무녀가 살았는데 금학산과 평강의 고암산, 김화의 오성산을 무대로 날아 왕래하다가 무녀가 잠시 이곳에서 소변을 본 것이 탕을 이루었다 한다. 이 탕은 샘이 많이 나오는 늪 지대로 일제강점기에 제사공장에서 이 물을 끌어다가 공장을 가동했다고 하며 이 무녀비탕의 늪은 땅 속 깊이 빠지게 되어 사람들이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철원향토지 제5집 철원의 지명 유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에 있는 기차역이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역사와 부속 시설 일체는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된 건물을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에 탈선한 열차의 잔해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역 구내에 유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북한의 노동당사로 1946년 초에 북한정권하에서 착공하여 지상3층에 연건평 580평 규모의 건축물로 신축되었다.
조적식 기둥 및 벽체로 수직재를 이루고 있으며, 보 및 스라브는 철근콘크리트 수평재로 수직재와 결구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천장은 목조 삼각형지붕틀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입구의 1층에 원기둥 두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아치로 장식하여 정면성을 부각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북한이 공산독재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한국전쟁 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1개리당 백미(白米) 200가마씩을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특히 건물 내부 작업 때는 비밀 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로 쌓은 3층 건물 구조인데 당시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로써 한국전쟁 당시 여타 건물들이 모두 파괴, 인멸되었음에도 유독 이 건물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 수탈과 애국인 사들을 체포·고문·학살 등 소름 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한번 이 곳에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 만치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 뒤 방공호(防空壕)에서 많은 인골(人骨)과 함께 만행에 사용 된 수많은 실탄과 철삿줄 등이 발견되었다. 2002년 5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아이스크림고지’로 더 잘 알려진 삽슬봉은 예전에 산 밑에 삽송리(揷松里 또는 森松里)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을 삽송봉(揷松峰, 삽슬봉은 삽송봉의 구전 변형체)으로 불렀고, 또 그 모양이 흡사 투구 같다 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렸다.
드넓은 재송평의 한가운데 솟아 있는 해발 219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산이 갖는 입지적 이점은 많고도 크다하여 한국전쟁 때는 피아 간에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했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하여 ‘아이스크림고지’란 별명이 붙여졌다 한다. 삽슬봉은 김응하 장군의 빈장묘가 있는 여우산과 직선거리로는 불과 2km 지척에 있는데 김응하 장군이 임진왜란 때 13세의 어린 몸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장지를 찾던 중 어느 스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우산에서 삽슬봉까지 10리 길을 맨발로 쫓아가 졸라서 결국 현재의 위치에 장지를 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삽슬봉은 고려시대에 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어 북쪽 평강의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의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