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읍

                                                                                                                                                                                                                                                           

1.개요

정선읍은 정선군의 군청 소재지로 우리나라 산맥 중 가장 큰 줄기인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수많은 계곡의 냇물이 모여 한강의 상류인 조양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는 산간 지역이다.
가리왕산을 비롯한 많은 명산과 계곡은 훼손되지 않은 채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러한 천혜의 자연지형을 바탕으로 내륙 관광 거점지역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10735
총 인구수
5464
인구(남)
5272
인구(여)

4.지명의 유래

  • 봉양리(鳳陽里) : 본리는 남한강 상류인 조양강(朝陽江)유역에 자리잡고, 앞으로는 대음산(현 조양산, 남산), 뒤로는 비봉산(飛鳳山) 밑에 자리잡은 양지바른 들판형국의 비봉산은 봉황(鳳凰)새가 나래을 쭉 펴고 조양강으로 힘차게 날아 내리는 듯하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군 소재지로 택정할 때 봉양리 지형이 제비집 같다하여 동면에 흐르는「어천」강물이 흐르는 모양이 뱀 같기에 제비새끼를 잡아먹으려 하는 지형이라고 해서, 이곳에 인재가 날수 없는 택지라 하여 이를 제살하기 위하여 세 마리 거북(龜)과 여덟 마리 학(鶴)을 돌로 조각하여 정선아리랑공원 너머 어천 방향과 하동, 상동, 강변에 묻었고, 여덟 마리 학은 비봉산과 조양산에 묻었다고 한다. 거북과 학은 뱀을 잡아먹으니 택정할 때에 지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신념에 조치한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정선 조양회에서 정선아리랑 공원에다 삼구팔학(三龜八鶴)의 비를 1985년도에 설립했다. 본리는 1605년도 대홍수로 조양강의 유수 변경으로 인하여 넓은 백사장을 이루었는데 그후 몇 차례 홍수로 인해 비옥한 땅이 되었다. 그때는 현 정선제방이 없었는데 1936년도 대홍수로 전 가옥이 표류되다시피 된 후 제방을 쌓았는데 완전한 제방은 1961년에 완전히 쌓았다.

  • 북실리(北實里) : 조양산과 병방산이 동남으로 뻗어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였고, 북쪽으로 조양강이 굽이쳐 흐르고, 앞에는 비봉산이 우뚝 솟아 용담(龍潭)들이 옥토를 이루었고, 남으로『너투재』를 넘어 남면 광덕리, 가수리(佳水里)로 가는 지루한 산길이 있고『병방치』를 넘어 귤암리(橘岩里) 가는 험한 길이 있다. 북실(北實)리는 옛날에 죽실(竹實)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정선읍 뒤 비봉산(飛鳳山)이 봉황새 형국이어서 봉황은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해서 봉황새가 먹이를 찾아 날아드는 모습 같다 해서『죽실』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이곳은 농경지가 북쪽으로 향하였으나 농사가 잘 된다고 하며 북실로 개칭하였다고도 한다.

  • 덕송리(德松里) : 본리는 조양강이 회류하고 있으며,『남평』으로 질러가는 반점치(半峙)를 사이를 두고 취락이 형성되었다. 정선읍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고 한다. 옛날 정선향교가 있던 터가 있는데『돌다리』라고도 한다. 본리는 납덕동 덕(德)자와 송오리 송(松)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 애산리(愛山里) : 본리는 동쪽으로 애산성(愛山城) 남쪽으로 기우산성(祈雨山城)이 있다. 이 산성은 통일신라 때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과 의병항쟁 때 정선읍부 방어에 큰 몫을 한다. 앞 기우산에는 비가 안올 때 비를 오게 비는 제단이 있는데 기우제단(祈雨祭壇)이라고 한다. 본리 지명은 애산성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 신월리(新月里) : 조선시대에 동하면(현재 화암면)에 속하였는데 1910년에 군내면(郡內面)에 통합하였다. 와평리(瓦坪里), 신치리(新峙里), 월통리(月通里)를 병합하여 신치와 월통의 이름을 따서 신월리(新月里)라 하였다.

  • 덕우리(德雨里) : 조선시대에 동하면(현재 화암면)에 속했다가 1910년에 둔내면에 통합되었는데 덕산기, 백오담(백우담)의 이름을 따서 덕우리(德雨里)라고 하였다.

  • 여탄리(余呑里) : 고양산 밑에서 동막천(東幕川)이 마을 중심으로 북에서 남으로 흘러 동계천(東溪川)과 합류하는 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경지가 협소하나 땅이 비옥하고, 공기가 맑고 온화하여 잠업이 정선군내에서 제일 잘 되는 곳이다. 여탄『누에치기』라 하면 검사원도 보나마나 일등품이라고 한다.

  • 회동리(檜洞里) : 본리는 고려 충선왕 때 침봉(沈鳳) 골터로 40여 년간 읍부가 있었고 조선 때는 서하면에 속했다가 1924년에 서면이 정선읍에 합병됨에 따라 정선읍 관내가 되었으며 본리는『가리왕』산의 자작나무, 전나무, 피나무, 주목 등 원시림이 많아서 회동이라고 했다. 북쪽으로 가리왕산이 있고 벽파령(碧波嶺)은 서쪽을 막았고, 청옥산이 남으로 넓게 자리하여 그 사이로 말목(馬項)에서부터 벽탄까지 계곡을 따라 맑은 물이 흘러내리니 그 유장이 20㎞에 이른다.

  • 용탄리(龍灘里) : 1930년 4월 1일자로 서면이 정선면에 편입되면서 정선면 관내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내벽탄, 외벽탄, 노미, 이평, 세곡, 곡구, 비룡동, 신론, 월평, 행매동 등 10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으며, 용탄은 비룡동의 '용'자와 벽탄의 '탄'자로 리명을 정했다.

  • 광하리(廣河里) : 조선시대 서상면에 속했다가 1924년에 정선면에 병합되었다. 정선의 관문 마전치(麻田峙) 일명『비행기재』밑에 있는 넓은 마을인데 마을 앞에 조양강이 굽이쳐 흐르며 병방산이 층층절벽으로 절경을 이루고, 이 지역은 엽연초, 잠업, 채소가 잘되는 마을이다. 본리는 망하(望河)마을의 하(河)자와 광석(廣石)마을의 광(廣)자를 합쳐 이름 붙였다.

  • 귤암리(橘岩里) : 1930년 4월1일에 서하면에서 정선면으로 합면되었다. 병방산과 나팔봉절벽이 강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순전작 지대다. 본리는 의암과 귤화마을 이름을 합쳐 귤자와 암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일명 줄을곳(注乙串)이라고도 한다.

  • 가수리(佳水里) :조선시대에 서상면에 속했다가 1906년에 서면에 합쳤다가 다시 서면이 정선면에 합병되었다. 지세는 갈래 산맥의 최단이고 서로 월괘봉, 능봉이 둘러싸였고 조양강이 귤암리에 흘러 내려오고 수미 앞에는 남면에서 흐르는 지장천이 합수되어 가탄을 지나 신동 운치로 흐르는 강은 강변에 붉은 기암이 쌓여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가탄과 수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명이다.
     

<출처: 정선군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여주로 옮긴 용탄 벽사

오래 전 용탄리에 '벽절'이라고 불리는 사찰이 있었는데, 보살이 된 과부와 스님이 몰래 사랑하게 되면서 절을 팔아 여주로 옮겨왔다는 설화. 여주에 있는 신륵사는 벽돌탑이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벽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 신륵사 벽돌탑

오래전 옛날 정선읍 용탄리에 벽절이라 불리우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지에 사탑만이 있어 그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이 벽절에는 2~3명의 중이 있었는데 하루는 달빛이 교교한 밤중 조용한 사찰주변에 멀지않은 강변에서 웬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여오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승은 마음이 섬뜩함을 느끼면서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황급히 달려가 보니 나이가 20세 가량 되었을까 말까하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맨버선발을 치맛자락으로 머리를 덮어쓰며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였다. 노승은 급히 가서 물에 빠지려는 여인을 만류하며 「어인 일이신지 몰라도 젊은 나이에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한즉 여인은「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니 차라리 먼저 가신 남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려고 합니다」하고 몸부림을 치니 노승이 위로하기를「부인께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부처님께 자신의 부덕함을 사죄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줌이 옳지 않느냐?」고 타일러서 그날부터 여인은 절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후부터 그녀는 벽절에서 수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시일이 경과할수록 이 노승의 마음은 여인으로 하여 흔들리게 되고 여인 또한 고적한 산중에서 외로움을 견딜수가 없이 노승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의지하게끔 되었다. 이에 마침내 두 사람의 정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앞 뒤 분별도 할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 두 사람만의 은밀한 관계는 마침내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의분의 분에 넘친 젊은이들이 작당하여 두 사람을 징벌키로 정하고 벽절로 몰려가 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벽절은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노승과 여인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이는 분명히 부처님의 노함을 받아 추방되었을 것이라 전하며 뒷날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이 자리를 옮겨 지금의 경기도 여주읍 앞산에 위치하고 있는 같은 이름의 벽절이 되었다고 하며 한때는 이곳 사람들이 여주에 가서 절세를 받아 왔다는 말도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 절터에는 이름없는 석탑이 있을 뿐이다.

#정선 전설 #용탄벽사 #신륵사 

5.2.왕바우 서리

시주를 부탁한 노승에게 쇠똥을 떠 준 정선읍의 황씨라는 부자에게 노승은 이 가문이 곧 망할 것이라고 말을 남김. 화가 난 황씨는 '왕바우'라는 하인에게 노승을 잡아오라고 시켰으나, '왕바우'는 노인을 잡을 수가 없었음. 노승이 악한 주인의 죄를 대신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지팡이를 치니 왕바우가 장승처럼 선 채로 죽음. 이곳을 사람들은 훗날 왕바우 서리라고 부르게 됨.   

옛날 정선읍에 황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됨이 인색(吝嗇)하고 성질이 거칠어 이웃간에 돈만 아는 먹통이라고 별명이 붙어 미움을 받아 왔는데 하루는 홀연히 노승이 나타나 황부자에게 시주를 청하니 괴벽스런 황부자는 시주할 쌀이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를 벌컥 지르며 마구간에 들어가 쇠똥을 한 삽 떠주니 늙은 스님은 바랑을 벌려 받아 넣고 합장 배례하고 돌아서면서 이 집의 가운(家運)이 이제 다 됐으니 곧 망하리라 한마디 남기고 죽장망해를 끌며 떠났다.이 말을 들은 황부자는 화가 치밀어 참지를 못하고 펄쩍 뛰며 자기 집에 있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쌘 왕바우란 하인을 시켜 그 중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왕바우가 부랴부랴 짚신 끈을 매고 노승을 뒤쫓아 힘껏 달려갔으나 이상하게도 노승은 잡힐 듯 하면서도 따를 수가 없었다. 애가 타서 숨을 헐떡거리는 왕바우는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데도 노승은 여전히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노승이 돌아서더니 너는 악한 주인의 죄를 대신 받아야 하느니라 하고 말하며 지팡이로 땅을 세 번 울리니 이게 웬일인가, 왕바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고 발이 붙어 떨어지질 않고 차차 혈맥이 굳어져 장승처럼 선 채로 죽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 이곳은 비명에 간 왕바우 서리라고 불리워졌으며 그후 얼마 안가 노승의 말대로 황부자도 벼락을 맞아 집과 가솔이 몰살을 당해 이름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이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는 이 왕바우 서리에는 조양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정선 전설 #왕바우 # 왕바우 서리

 

5.3.삼봉산이 떠내려가 생긴 도담 삼봉

정선읍 봉양 7리에 있던 마을의 삼봉산이 홍수에 밀려 떠내려갔는데, 찾아보니 충북 단양의 도담강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잃어버린 산을 찾은 마을 사람들은 매년 가을에 단양의 도담에 가서 산세를 받아왔다는 이야기

인심은 조석(朝夕)변이요, 강산도 십년이면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어렵다는 말과도 뜻이 상통되는 이야기라고 보면 때로 인간은 신의 섭리를 쫓아 자연과 더불어 생존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초에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고 또 이를 조화시키기 위해 각처의 명산을 끌어 모아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꾸몄다 하니 무한한 신의 힘을 인간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을 수밖에, 그러나 여기 전하여지는 전설이 있다. 정선읍 봉양 7리 속칭 적거리(원명:덕거리)라는 자연부락이 있다.지금은 산천이 변해 이 마을의 옛 초가집은 간데 없고 상수도 수원지와 주택이 개량된 현대식 건물이지만 옛날에는 정선읍내에서도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이름난 곳이였고 마을 앞에는 가지런히 세(三)봉우리의 아담한 산이 있었으니 이 산이 바로 삼봉산이란 유명한 명산이었다. 당시 이 산 중턱에는 이 고을 향교가 위치했고 산새소리와 함께 절벽 밑으로는 조양강(朝陽江) 맑은 물이 구비쳐 흘렀으니 보는 사람마다 그 아름다움을 감탄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있은지 13년 후 을사년(乙巳年)에 큰 홍수가나 하루밤 사이에 이 삼봉산은 홍수에 밀려 떠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삼봉산을 잃어버린 이 마을 사람들은 홍수가 줄어들자 유실된 삼봉산을 찾고자 의논한 끝에 기골이 장대한 장정 다섯 사람을 뽑아 강물을 따라 산을 찾으러 떠났다. 그러나 보름이 넘도록 고생을 무릎 쓰고 헤매였으나 삼봉산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숲속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해가 떠오를 때였다. 한 장정이 갑자기 산을 찾았다고 소리쳐 일행이 눈을 모아 바라보니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곳에 세 봉우리의 산이 있지 않은가? 모두가 기뻐서 숨가쁘게 달려가 보니 도담(충북 단양군 매포면)강 물 가운데 떠내려오다 자리잡힌 봉우리들이 흙은 홍수에 씻겨 떠내려가 버리고 바위만 남았으니 산세로 미루어 보아 삼봉산이 틀림없었다. 잃어버린 산을 찾은 이 마을 사람들은 그로부터 수 십년 동안 해마다 가을이면 단양군 매포면 도담에 가 삼봉산의 산세를 꼬박꼬박 받아왔다. 그러던 어느해 예년대로 산세를 받으러 갔는데 마침 산세를 줄 돈 준비가 안돼서 “돈내라” “좀 기다려라”하며 서로간의 언쟁이 벌어져 떠들썩한 판인데 그때 겨우 대여섯살 남짓한 동자가 앞에 나서며 “산세를 들어드릴 수 없으니 당장이라도 삼봉산을 다시 가져 가십시요.”라고 거부하니 돈 받으러 간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답변할 말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지금의 옛 삼봉산 자리에는 봉양초등학교와 정선역이 자리잡고 있어 상전벽해란 말이 이를 두고 말한 것 같다.

 

5.4.새끼 두 마리를 다 읽은 범여울

정선읍 덕송리의 범여울이라는 여울이 있는데, 어미 호랑이가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여울을 건너려다가 두 마리를 모두 잃고 슬퍼 어미 호랑이가 밤마다 울어 범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   

정선군 정선읍 덕송리 월천동(月川洞) 앞에는 범여울이라는 여울이 있다. 이 여울은 남한강 상류에서 지금부터 약 100여년전 어미 호랑이 한 마리가 새끼호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이 여울을 건너려고 하자 두 마리 어린 호랑이는 함께 어미 호랑이를 따라 가려고 앙탈을 부리니 어미 호랑이는 새끼 두 마리를 함께 물고 건널수가 없어서 한 마리씩 물어 나르기로 작정하고 큰돌로 한 마리를 눌러놓고 다른 한 마리를 물고 강을 건너 놓으니 그놈이 어미 호랑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앙탈을 하여 어미 호랑이는 할 수 없이 또 큰돌로 그 새끼 호랑이를 눌러놓고 강 저편에 있는 새끼 호랑이를 데리러 와보니 돌 밑에 어린 호랑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어미호랑이는 울부짖으며 강을 도로 건너와 보니 이쪽의 돌밑에 있는 호랑이도 이미 죽어있는지라 어미 호랑이는 미쳐 날뛰며 밤새워 울다가 날이 밝으니 뒷산으로 숨어버렸다가 다시 밤이 되면 또 나타나서 울부짖기를 며칠밤이나 계속함으로 동네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다가 서로 의논한 끝에 나무를 강변에 많이 쌓아놓고 밤마다 불을 놓아 나무를 태웠더니 범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자정 때의 물 흐르는 소리는 그 당시 범이 울부짖는 소리같이 들린다고 한다.

 

5.5.취적옥과 김팔발(덕우리)

연산군을 유배시킨 반공공신들이 폐서자 노와 어린 형제들을 정선의 취적옥으로 유배시키는데, 아는 바 없어도 들은 풍월로 문자와 말을 잘 쓰는 김팔발이 폐서자와 형제들을 도와주자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며 거사를 도모함. 역적모의가 발각되었으나, 김팔발과 가족들은 이미 도망가고 순진한 동네 사람들만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이야기   

서기 1506년(연산 12년) 연산의 폭정은 마침내 반정을 부르고 반공공신들은 그날 밤으로 연산군을 강화섬 건너 교동도에 유배시키고 폐서자 노와 어린 형제들은 정선으로 유배시켰다. 그 유배지가 정선 동계팔경중의 하나인 취적옥(吹笛屋)이라 전해지는데 이곳에는 김팔발(金八發)이라는 기운이 황소 같고 깊이 아는 바는 없지만 들은 풍월로 제법 문자께나 쓰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가 하루는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옷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무릇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하는 법 만일 의리가 없다면 개나 돼지에게 옷을 입혀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라며 동네 사람들 중에 취적옥에 가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동네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다시 비장한 어조로 그 취적옥에는 연산임금의 어린 네 분의 왕자님이 귀향 살이를 하고 계신다네, 그 네 분 왕자님 중에는 세자이신 노 마마도 계신다네, 한데 이 돼지 같은 인간들아 보고만 있을 것이냐, 진짜 어린 왕자들은 먹을 것이라곤 다 떨어진 소쿠리에 삶은 감자 몇 알이 전부이고 무서움과 배고픔에 울기라도 하면 무서운 병사들의 고통에 울 수도 없는 실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연지상(凄然之相)이었다. 금지 옥엽 하던 왕자들의 그런 처참한 모습을 김팔발이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는 그 연산임금 치하에서 12년 동안 백성노릇을 했고 그 분이 폭군이었든 어진 임금이었든 임금은 임금, 백성은 백성이다. 우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에겐 충분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데 그런 왕자님들이 짐승 같은 대접을 받고 계시네, 의리란 무엇이고 충성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의리와 충성을 아는 자가 올바른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평소엔 모르다가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상대방의 진정이 들어나는 법, 김팔발의 말은 백번 옳은 것이다. 동네사람들의 호응에 우쭐한 그는 우리가 잘되면 일등공신이요 못되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폐세자 노마마를 옹립하고 나서면 강원도와 충청도, 황해도 일부에서 틀림없이 우리편이 되어 줄 것이요, 그리하여 군세가 어느 정도 갖춰지면 즉시 노마마를 모시고 서울로 진군합시다. 일단 거사했다 실패하면 금강산이나 오대산 깊숙이 숨어버릴 각오를 한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새임금 만세! 노마마 만세” 이들은 앞으로 닥쳐올 시련도 모른체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웅성거렸다.순박한 이곳 사람들은 어린 왕자 들이 딱한 곤욕을 치르는 것만 알았지 부왕연산이 천명을 버리고 10년 폭정을 계속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정선고을 본관은 정광보(鄭光輔)였다. 그는 천성이 중후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는데 김팔발의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김팔발을 비롯하여 가담자 모두를 잡아드리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거기에 연류된 동네의 몇 사람만 체포되었을 뿐 주모자인 김팔발과 그의 가족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조정에선 정선군수의 장계(狀啓)을 받고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공신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모에 연류된 범인들은 목을 쳐 효시(梟示)하고 주범 김팔발은 끝까지 추적하여 체포하고 즉시 서울로 압송할 것이며 만일 도망중인 죄인에게 식량이나 의복을 제공하는 자가 있을시는 그 또한 역적으로 간주하여 극형에 처할 것이며, 김팔발을 고발한 자는 상금 천냥을 내린다는 수배문이 마을 곳곳에 나붙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정선고을에 역모에 연류된 자들의 잘린 목이 내 걸리고 그야말로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그 일로하여 날벼락을 맞은 사람은 폐주연산의 아들들이었다. 이날이 1506년 9월 24일로 중정 임금의 반정이 일어난지 불과 23일 후였다. 이렇게 하여 폭군 연산의 네 아들은 이곳 정선의 취적옥에서 그 짧은 일생을 끝마쳤다 한다.

 

5.6.의상대와 화주일춘

정선읍에서 세인의 존경을 받아 온 관음사의 일춘대사가 민가의 재물을 착복하여 부처님의 죄를 받아 큰 먹구렁이로 변함. 10여년이 지나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는 네명의 선비가 주막에서 묵던 중 꿈에 한 노스잉 나와 자신의 죄를 말하며 '화주일춘'이라는 글을 석벽에 새겨 주면 과거에 급제할 것이고, 소승도 불문의 죄를 면할 것이라 부탁함. 네 명의 선비는 '화주일춘'글자를 하나씩 나누어 석벽에 새겨 네 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행인의 발길을 막던 구렁이도 사라졌다는 이야기   

옛날 관음사(정선읍 봉양 6리)에 일춘대사라는 중이 있었다. 이 중은 불도에 정통(精通)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아 왔는데 한때 일춘대사는 관음벼루 절벽 아래다 인마(人馬)가 통행할 수 있는 교량을 가설하겠다고 민가의 재물과 고철을 수집하였으나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약속을 어기고 이를 팔아 착복하였으니 일춘대사는 금시에 부자(富者)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문(佛門)에 죄를 얻은 대사는 얼마후 부처님의 죄를 받아 큰 먹구렁이로 변해 통로를 가로막아 관음사를 찾아드는 행객(行客)은 끊어지고 절은 얼마 안가서 쑥대밭에 묻히게 됐다. 그로부터 십여년 세월이 흘러간 후 어느해 봄의 일이다. 때마침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 4사람이 정선을 지나가게 되어 주막에서 유숙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의 꿈에 백살노인이 머리에 송낙을 쓰고 목에는 백팔 염주를 걸고 점란가사에 구절죽장을 짚고 와서 합장하고 허리를 구부려 정중히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곳 관음사에 있는 중으로 불문에 득죄(得罪)하여 뱀으로 변신된지 오래였는데 지금 다행히 귀인을 만났으니 바라건데 공(公)은 노고를 아끼지 말고 화주일춘(化主一春) 네 자만 관음벼루 석벽에 새겨 왕래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주면 공은 이번 과거에 급제할 것이며 소승도 불문의 죄를 면하게 될 것이니 내 말을 잊지 말고 꼭 새겨달라고 당부했다. 선비가 잠을 깨니 꿈이라 이상히 여겨 일행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주막주인에게 사실을 물어보니 그런 일이 있다하여 중의 말대로 글씨를 새길 것을 결심하니 같은 일행 중 자기 혼자 과거에 급제하기 보다는 다같이 급제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며 네 사람이 뜻을 모아 한 자씩 화주일춘 넉자를 새겨놓고 한양길을 떠났다. 그후 신기하게도 모두 급제하여 금의귀향 했으며 관음벼루 절벽에 가로누워 행인의 발길을 막던 구렁이는 자취를 감추고 행인은 마음놓고 이곳을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전한다.

7.지역의 명소

7.1.가리왕산

 


가리왕산 휴양림

 

7.2.정선 5일장

정선5일장

 

7.3.정선 알파인경기장

정선 알파인경기장

 

7.4.아라리촌

아라리촌

 

7.5.동강 할미꽃 마을

동강할미꽃마을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정선초등학교,가수분교,봉양초등학교,벽탄초등학교
중학교 : 정선중학교
고등학교 : 정선정보공업고등학교,정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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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