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으로 영월군의 중심지이다. 11개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릉, 어라연, 별마로 천문대 등 영월군의 대표 관광지들이 있다.
거운리는 예전 ‘천상면’에 속한 지역으로 아랫말, 중말, 윗말로 나뉜다. 지금은 영월읍 거운리출장소가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거탄소’라는 구역이 있었는데, 이들은 고리짝이나 바구니 같은 물건을 만들어 살림을 꾸려 갔다. 거운리는 남한강 윗부분에 있어, 정선에서 내려오는 큰 나무 뗏목이 지나가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에는 약 60가구가 살고 있으며 담배, 옥수수, 고추, 콩 같은 밭작물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덕포리는 영월군 군내면에 있는 마을로, 웃말, 중말,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나루터 위쪽의 상덕촌(尙德村)의 ‘덕’자와 그 아래 밀적포(密積浦)의 ‘포’자를 따서 ‘덕포리’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덕’은 ‘크다’라는 뜻이다. 옛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덕포리가 강과 나무가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약 1,600가구가 살고 있고, 상리, 중리, 하리, 대내, 옹기점말 등 여러 작은 마을이 있다.
문산리는 원래 천상면에 속했지만 1931년 군내면으로 바뀐 마을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문천리(文川里)와 거산리(巨山里)를 합쳐 ‘문산리’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문산리에는 약 60가구가 살고 있으며 콩, 옥수수, 팥, 고추 같은 밭농사를 주로 짓는다. 이 마을은 영월 엄씨가 많이 사는 집성촌으로 유명하고, ‘문산 농악’이라는 전통놀이도 잘 알려져 있다.
방절리는 영월군 군내면에 있는 마을로, 단종이 이곳에 귀양 왔을 때 그를 지키며 충성을 다한 신하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방절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다시 나누면서 마곡, 청령포, 잔다리, 서강, 날골, 선돌을 하나로 합해 방절리라고 하였고, 1970년에는 방절리를 1리(마곡, 청령포, 잔다리)와 2리(서강, 날골, 선돌)로 나누었다. 방절리에는 약 190가구, 69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주로 농사를 짓는다. 동쪽은 영흥리와 하송리, 남쪽은 남면 광천리와 이웃한다. 예전에는 강물이 청령포, 마굿, 잔다리 쪽으로 크게 굽이쳐 흐르다가 길이 바뀌면서 ‘단구(계단처럼 생긴 평평한 땅)’가 만들어졌는데, 이 모습은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만큼 유명하다.
삼옥리는 원래 영월군 천상면에 속한 지역으로, 예전 면사무소는 ‘평마을’에 있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을 다시 나누면서 닥바우, 번재, 사지막, 송이골, 벌말, 상촌, 먹골, 성안, 섭사, 웃구룬(길운)을 하나로 합해 ‘삼옥리’가 되었다. 이 지역에는 사지막, 섭사처럼 모래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이곳에 고운 모래가 많이 쌓여 있어 예전에는 ‘사모개→사목→삼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삼옥리는 ‘산이 옥처럼 좋고, 물이 옥처럼 맑고, 사람 마음이 옥처럼 착한 마을’이라는 뜻으로도 불린다. 삼옥리는 동쪽은 연하리, 서쪽은 영흥리, 남쪽은 덕포리와 이어져 있으며, 지금은 약 140가구, 560명 정도가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옛날 거운리에 사는 정씨 집안에서 아주 특별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 아기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시렁 위로 올라가 병정놀이를 할 만큼 힘이 셌다. 집안 사람들은 아기가 장차 나라에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하여 여러 방법으로 해 보았지만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래서 독한 술을 3일 동안 먹여 잠들게 한 뒤, 겨드랑이 밑에 있는 작은 날개 모양의 살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죽였다고 전한다.
아기가 죽은 날, 거운 다리 아래의 ‘용마굴’에서는 하얀 말이 튀어나와 산등성이를 따라 3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의 무덤은 강 건너 섭사에 있었지만 1936년, 1972년, 1990년에 큰 홍수가 나면서 사라졌다. 아기장수의 무덤은 지금도 성황당 맞은편에 남아 있으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장수묘’라고 부르고 있다.
딱밭굴은 서낭당 터 아래, 거운리 남쪽 강가에 있는 큰 굴이다. 백 명 넘게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굴 위쪽 둔덕에는 종이를 만드는 데 쓰는 닥나무를 심은 밭이 있어 ‘딱밭굴’이라고 부른다. 굴 앞의 ‘딱밭소’에서는 닥나무를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가마솥에 삶아 노끈이나 종이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다.
약물내기는 상리를 지나 연하리로 가기 직전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위장병에 좋다고 알려진 약수가 있어 ‘약물내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약수는 물이 풍부하여 마을의 넓은 논농사에도 쓰이고 있다. 특히 봄철처럼 물이 부족할 때는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물이 더 많이 나온다고 전해지는 신기한 샘이다. 마을 남쪽 길로 가면 대내로 이어진다.
감자골은 무내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궁굴터골과 쑥밭재가 있는 접산을 넘고, 학전이의 빈터거리를 지나면 북면 마차리에 도착한다. 또 북쪽 옆길로 가면 평창군 미탄으로도 갈 수 있다. 이 마을의 땅 모양이 감자 구덩이처럼 움푹 파여 있어 ‘감자골’이라고 부른다.
땍빼리는 번재에서 덕포로 가는 길가에 있던 곳이다. 예전에는 신작로(새도로)가 생기기 전이라 사람들이 꽃밭여울 쪽의 옛길을 이용해 읍내로 다녔다. 그 길가에 큰 바위 벼랑이 똑바로 서 있어 ‘땍빼리’라고 불렀다.
번재는 덕포리에서 삼옥으로 가는 첫 번째 마을로, 자연 바위 앞에 있다. ‘번’은 돌아서 간다는 뜻이고, ‘재(峙)’는 고개라는 뜻이다. 삼옥으로 가는 새길이 생기기 전에는 이 마을로 가려면 벼랑 아래를 빙글빙글 돌아가야 해서 ‘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돌은 번재에서 땍빼리를 지나 강을 따라 이어지는 옛길 근처의 바위이다. 지금처럼 도로가 나기 전에는 한 사람이 바위를 꽉 껴안고 돌아가야 할 만큼 좁은 벼랑길이었다. 어느 날 비가 많이 오는 날, 먹골 마을의 한 처녀와 번재의 총각이 이 좁은 길에서 마주쳤다. 길이 너무 좁아 서로 꼭 껴안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안고 돌아간 바위’라는 뜻으로 ‘안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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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월읍 흥월리의 잣나무백 마을에 신 씨라는 집안이 살고 있었다. 이 집은 꽤 넉넉해서 가족이 많았고, 그중에는 함께 지내던 첩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집에 힘이 아주 센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얼굴도 잘생기고 기운도 셌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첩의 자식은 ‘서자’라 해서 다른 형제와 다른 대접을 받았다. 서자는 집안 행사에 마음대로 참여하지도 못하고, 제사 때도 방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공부를 배울 기회도 적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마음속에 슬픔이 쌓이고, 점점 화가 많아져 술을 마시는 날도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제일 의지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집안은 장례를 준비하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고, 아이는 슬픔과 화가 뒤섞여 더 거칠게 굴었다. 장례를 치르는 날,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 흙을 퍼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아이는 더욱 화가 나서 사람들의 일을 자꾸 방해했다. 사람들은 슬픈 날에 계속 소란을 피우는 아이를 말리다 못해, 잠시 조용히 쉬게 하려고 흙을 파낸 큰 구덩이 가까이 데려갔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다투는 사이, 아이는 그만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줄 몰랐지만, 이미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날 사람들은 두 개의 무덤을 만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당시에는 서자였던 아이를 불쌍히 여기거나, 잘못을 따져 묻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말과 소가 병에 걸리고, 사람들 사이에 걱정이 퍼졌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묻자, “마음속 원망이 풀리지 않은 영혼이 노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의 가족은 남몰래 고운 마음으로 위로하는 굿을 했다. 그 뒤로 병은 조금씩 사라졌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사람들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아이가 묻혔던 그 자리는 땅 기운이 아주 좋은 명당자리였고, 이후 그 아이의 자손들이 오히려 더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함부로 대했던 일은 좋지 않았지만, 그 자리가 좋은 땅이었기에, 후손들이 복을 받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영월읍 연하리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 근처 개울가에는 다른 산맥과 이어지지 않은 따로 떨어진 작은 산이 있다. 사람들은 이 산을 삼척산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삼척에는 성격이 순하고 마음씨가 고운 김 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 씨는 살림도 넉넉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지역의 욕심 많은 부자가 김 씨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나쁜 꾀를 냈다. 억울했던 김 씨는 결국 고향을 떠나 영월로 도망 와서 살게 되었고, 새로 정착한 곳 근처의 땅을 사면서 지금의 삼척산도 함께 사게 되었다.
시간이 지난 뒤, 삼척의 그 욕심 많은 부자는 김 씨가 영월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다. 그는 김 씨에게 “이 산은 삼척 사람이 세금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해마다 삼척에 세금을 바치라고 했다. 그때는 이런 말을 거절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김 씨는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내며 살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삼척 원님이 이 일에 끼어들면서 세금을 점점 더 많이 올렸다. 김 씨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세금이 많아지자 걱정이 늘었고, 하루하루 근심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김 씨에게는 일곱 살 난 막내아들 ‘만득’이 있었다. 만득이는 똑똑하고 마음이 깊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만득이는 아버지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이유를 물었다. 처음에는 “어린 네가 알 일 아니다.”라며 말하지 않았지만, 만득이가 계속 묻자 결국 삼척산과 세금 이야기를 모두 하게 되었다. 만득이는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버지, 세금을 잠시 내지 않고 기다려 보세요. 삼척 사람들이 직접 받으러 올 테니까요. 그때 제가 해결해 볼게요.”
김 씨는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만, 똑똑한 아들을 믿고 잠시 세금을 미루었다. 그리고 정말 얼마 뒤, 삼척에서 벼슬아치가 세금을 받으러 왔다. 그는 김 씨 집 사랑방에 앉아 거만하게 굴며 세금을 내라고 했다. 그때 만득이는 아버지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용기를 내어 벼슬아치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 산을 삼척의 산이라고 해서 세금을 많이 매기신 거지요? 그런데 이 산은 아무 소득도 없고, 저희에겐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 아예 이 산을 삼척으로 가져가세요. 저희가 칡을 많이 심어 둘 테니, 가을이 되면 칡 덩굴로 산을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니 세금을 받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벼슬아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말은 기가 막혔지만, 만득이의 대답이 너무나도 똑똑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삼척으로 돌아가 원님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삼척 원님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저 어린아이가 참 기발하구나! 또 세금을 받으러 갔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창피만 당할지도 모르니, 이제 그 집에서 세금은 걷지 말도록 하라.”
그 후 김 씨는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김 씨 가족은 혹시 몰라 산 기슭에 칡을 많이 심어 두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산에는 칡이 무성하게 자랐다. 지금도 삼척산에는 칡이 많아, 마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캐어 쓰고 있다고 한다.

영월읍 문산2리에 운중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북면 마차리 요봉에서 오른편 산골을 거쳐 올라가면 한 고개가 나오는데,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꺽어 올라가면 바로 이곳에 운중암이 있다. 30m나 되는 폭포가 있는 이 벼랑밑에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암자가 바로 그것이다.
옛날 문산리에 정씨 총각이 있었는데, 그는 조실부모 한데다가 재산이라고는 없으니 궁색하게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3대 독자인데도 30살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그는 농사 품으로 혼자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으나, 농사 일거리가 없을때는 약초를 캐다가 팔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의 일이었다. 장마가 오래 계속되니 농사 일거리도 없고, 약초를 캐러 나설수도 없게 되어 그동안 캐놓았던 약초를 영월읍에 가서 팔아 약간의 식량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보덕사(報德寺)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날은 7월 백중날이어서 많은 신도들이 모여 법회를 베풀고 있었다. 정총각은 호기심에 끌려 절로 들어섰다. 난생 처음으로 절에 오게 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불공드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해야 되는것인줄 알고 다른 사람들처럼 수없이 절을 했다. 그리고는 미소짓고 있는 부처님을 보고 무의식중에 “저는 3대 독자이온데 장가 좀 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게 되었다.
그는 절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금몽암(禁夢庵) 앞에 이르러 보니 여기도 보덕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법회를 열고 있었다. 정총각은 또 이 절에 들어가 한동안 불공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하루는 약초를 캐러 우연히 폭포가 있는 이 산골에 오게 되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폭포 옆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비를 피하기로 하였다. 굴 속에 들어가 보니 전날 절에서 본 부처같은 불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상 형상을 한 종유석이었다. 순박한 그는 이것 역시 불상으로 알고 그 앞에 절을 하면서 장가를 들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친 다음 약초를 캤는데 평상시보다 많이 캐었으므로 한동안 그곳에만 가게 되었고 그 굴에 들어가 기도하고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루는 폭포 옆에서 점심을 먹고 양지쪽에 앉아 있다가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 산골 일대가 흰 구름으로 가득 차더니 백발 노인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 “정총각은 이 산으로 빨리 가서 곤욕을 치르는 젊은 여인을 구하라. 지체말고 곧 가야한다.” 하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다. 그리고는 구름이 자기 주위로 몰려들면서 점점 무겁게 조여드는 것이었다.
차츰 그 구름의 압박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호흡이 막힐 것 같아 답답하여 몸부림치는 순간 잠이 깨었다. 하도 이상하여 우직한 그는 재빨리 요봉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젊은 한 여인이 무인지경에서 문등병 환자에게 붙들려 그야말로 큰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정총각은 신체가 건강하고 힘이 좋아 금방 그 문둥이를 쫏아 보내고 여인을 구하게 되었다. 그 여인은 단양군 영춘의 조씨가문 출신으로 평창군 미탄면의 권씨 집으로 시집을 갔었는데, 25살이 되도록 애기를 낳지 못한다 하여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총각은 그 여인의 사정을 모두 듣고나니 딱한 생각이 들어 자기와 살기를 청하였고, 그 여인도 친정에 돌아가보아도 별 신통한 일이 있을 리도 없어 결국 같이 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총각은 3대 독자이므로 이 여인이 애기를 낳아줄 지가 근심이 되었고, 그 여인 역시 애기를 낳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 내외는 매일같이 폭포가 있는 곳으로 약초를 캐러 다니면서 한결같이 자식의 점지를 기도하였다.
그들은 항상 둘이 같이 다니면서 약초를 캐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살림도 차차 넉넉해졌고, 그들 내외의 정성이 어찌나 지극하였던지 석달만에 조씨 부인은 잉태하였으며 그 후 삼형제를 두고 행복하게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어느 보살이 이곳에 절을 짓고 ‘구름이 무겁게 압박하였다’는 전설대로 운중암(蕓重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① 옛날 영월읍 거운리의 한 집안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고, 낳자마자 선반 위에 올라가 앉아서 놀곤 했다. 집안에서는 조숙한 아이를 낳아서 대견하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그 아기의 할아버지는 크게 근심하여 “아마도 장사가 탄생한 모양인데 심상치 않은 징조다.” 라고 생각하고, 집안이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 시절은 고리탑탑한 생원님 네가 정권을 잡고 있어서 무장(武將)이 나는 것을 경계하였고, 또 반란이나 역도(役徒)를 두려워하여 장사가 태어나면 사전에 제거하는 예가 있었다. 그러니 그 집에서는 아깝고 애석하기는 하나 죽여 없애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젖도 먹이지 않고 굶어 죽게 하였다. 그 후 수일이 지나 거운리 앞 강가에 있는 굴 속에서 용마가 나타나 공중을 날고 들판에서 뛰놀더니, 이미 장사가 죽은 후였으므로 벼랑을 날며 울부짖다가 끝내 거운리 배터 거리의 서쪽 벼랑 위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거기에는 큰 무덤이 있는데 용마를 묻은 무덤이라고 해서 그것을 용마총(龍馬塚)이라고 한다.
② 옛날 무릉도원면 도원리에 살던 손 씨 집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갓난 아기답지 않게 너무 숙성하였고,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았으며, 3일만에 실광 위에 올라가는 등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기가 막힌 그 집안 식구들은 어쩔쭐을 몰라 하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마을의 지각있는 노인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장사가 난 모양인데 앞으로 닥칠 일이 큰일이라고 하였다. 아이를 출산한 집이 무사할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다 못한 그 집에서는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없애 버렸다. 그런지 3일 후에 그 마을 동쪽 강 후미진 깊은 소에서 용마가 나와 주인을 찾아 헤매다녔다. 그 용마는 사방을 날아다니다가, 무릉도원면 무릉면 동북쪽 강 건너 마을의 벼랑을 왕래하며 슬프게 울부짖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말이 났던 곳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마가 나왔던 소를 용소(龍沼)라고 하며, 그 옆에 용마의 무덤까지 있다고 한다. 무릉리의 강 건너 마을은 용마가 울부짖은 곳이라 하여 명마동(鳴馬洞)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③ 영월읍 덕포 상리 상동천 개울가에도 용마굴(龍馬窟)이 잇는데 이 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그 하나는 단종대왕 혼련이 태백산 신령이 되시어 태백산으로 가실 적에 벼랑이 갈라지면서 은안백마(銀鞍白馬)가 나타나서 대왕의 혼령을 모시고 갔다는 전설인데, 곧 충신 추익한(秋益漢)이 단종을 배알했을 때 단종이 타고 있던 백마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월읍 하송리에 살던 엄씨 집안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고, 낳자마자 시렁에 올라가 있었다. 그 부모는 불안하여 아기를 맷돌로 눌러 놓고, 그 위에 콩 쉼을 얹어 놓아 죽게 하였다. 그 후 상동 개울에 있는 굴에서 용마가 나와서 산막까지 뛰어다니며 울부짖다가 주인 장사를 만나지 못하고 용마가 났던 곳에 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송리에도 장사 무덤이 있고, 용마굴 앞에 있는 돌무덤을 용마무덤이라고 한다.
엄흥도(嚴興道)
조선전기의 문신, 지사, 시호는 충의(忠毅).
영월의 호장으로서 단종이 시해되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르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가족들과 같이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호장 엄흥도의 충성은 인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렸다하여 후세인들이 그를 항상 추모하였다.
영월 향교
지정번호 : 제 100호
지정년월일 : 1985. 1. 17
규모.양식 : 향교
시대 : 조선(朝鮮)
소재지 : 영월읍 영흥2리 892
문의처 : 문화관광과 033)370-2531
영월향교는 KBS영월방송국에서 서편으로 약 1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설립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성종 4년(1473)에 번와(燔瓦)하였다.
선조 7년(1574)에 개건, 26년(1593)에 중수(重修), 37년(1604)에는 중창(重創)하였다. 이어 광해군 9년(1617)에는 개조(改造)하였고, 인조 12년(1634)에 번와(燔瓦)하였으며, 숙종 3년(1677)과 정조 19년(1795)에 각각 중수(重修)를 하였고, 순조 25년(1825)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0년에 대성전(大成殿)과 동서와 교직사(校直舍)를 제외한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장의실(掌議室), 풍화루(風化樓)가 전화(戰火)를 입어 불타, 1958년 내삼문, 명륜당, 장의실을 재건하였으며, 1964년에 풍화루를 중건하였다.
1981년에는 명륜당, 풍화루, 내삼문 등을 번와하였으며, 1983년에 대성전을 1986년에 동서무를 해체 복원하였고, 1987년에 교직사를 해체 복원하였다고 한다.
1992년 동제를 개조 중건하였고 풍화루를 번와하였으며, 대성전의 단청과 현판을 개조하였다. 1993년에는 서제를 개조 중건하였다.
영월장릉, 단종역사관, 영월종교미술관, 동강사진박물관, 영월동강생태공원, 별마로천문대, 연하계곡, 정양산성, 하송리 은행나무
초등학교 : 내성초등학교, 영월초등학교, 청령초등학교, 봉래초등학교
중학교 : 영월중학교
고등학교 : 영월고등학교, 석정여자고등학교
대학교 : 세경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