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으로 영월군의 중심지이다. 11개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릉, 어라연, 별마로 천문대 등 영월군의 대표 관광지들이 있다.
■ 거운리(巨雲里)
천상면(川上面)지역으로 아랫말(거운분교), 중말(마을회관), 윗말(송어장 부근)로 구분되며 지금은 영월읍 거운리출장소가 있다. 옛날에는 '거탄소(居呑所)라는 천민 집단 구역이 있어서 고리짝이나 치등을 생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거운리는 남한강 상류로 정선 조양강에서 내려오는 골뗏목으로 유명한 곳이며, 행정1개 리에 64가구 219명(1992년 기준)이 벌메, 장화동, 노가리, 만지, 마차, 길운 등지에서 담배, 옥수수, 고추, 콩 등 밭농사를 주로하고 있다.
■ 덕포리(德浦里)
영월군 군내면 지역으로 크게 웃말(上里), 중말(中里), 아랫마을(下里)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 일제 시대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나루터(현재 동강교) 위쪽인 상덕촌(尙德村)과 그 아래쪽 밀적포(密積浦)에서 '德'자와 '浦'자를 따서 '德浦里'라 하였으며 '德'은 '크다'는 뜻이다. 조선 성종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정에서 바라다 본 덕포리의 풍경을 『강 건너로는 상덕촌(尙德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초가집과 울타리들이 뽕나무 사이로 숨었다 보였다 하며, 그 남쪽 밀적포(密積浦)에는 나무들이 울창하여 마을의 연기와 물기운이 은은히 가리우고 어른거려서 그곳을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덕포리는 현재 1,664가구에 6,935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상리, 중리, 하리, 대내, 옹기점말 등에서 거주하고 있다.
■ 문산리(文山里)
본래 영월군의 동강 위에 있는 천상면(川上面)이었으나 1931년 3월 군내면(郡內面)에 포함되었다. 문산리라는 지명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1914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지방 행정 구역 조정 때 '문천리(文川里)'와 '거산리(巨山里)'를 병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행정 2개리 65가구 277명의 주민들이 문천리, 달운, 가정리, 금이, 뉘룬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콩, 옥수수, 팥, 고추 등의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영월 엄씨들의 집성촌인데 문산농악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 방절리(芳節里)
寧越郡 郡內面 지역으로 端宗이 이 곳에 와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를 따르며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방절리'라 한다. 1914년에 실시된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마곡(麻谷), 청령포(淸浦), 잔다리(細橋), 서강(後津), 날골(日谷), 선돌(立石)을 병합하여 방절리라 했으며 1970년 행정 구역 정비 때 방절리를 1리(마곡, 청령포, 잔다리)와 2리(서강, 날골, 선돌)로 분할하였다. 방절리는 192가구 694명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영흥리, 하송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면 광천리와 경계가 된다. 옛날에는 청령포, 마굿, 잔다리로 돌아서 흐르던 강물이 곡류(曲流)의 절단(切斷)으로 인한 계단 모양의 단구면(段丘面)이 형성된 지형으로 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까지 수록되었다.
■ 삼옥리(三玉里, 사목)
본래 寧越郡 川上面지역으로 면 소재지는 '평마을'에 있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땍빼리(닥바우), 번재, 사지막, 송이골, 벌말, 상촌, 먹골, 성안, 섭사, 웃구룬(길운)을 합하여 '삼옥리(三玉里)'라고 하였다. 삼옥의 자연 부락에는 사지막(砂地幕), 섭사(涉砂)등 모래와 관계된 지명이 많이 있듯이 이곳은 입자가 가는 모래가 많은 갯가 이므로 '사모새→사모개→사목→삼옥'으로 그 지명이 변하였다. 즉, 원래의 땅이름은 물결에 밀린 모래가 쌓인 보드랍고 고운 모래가 많은 동네이므로 '사모개'라 하였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삼옥을 '山如玉, 水如玉, 人如玉'이라 하여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마을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동쪽은 연하리, 서쪽은 영흥리, 남쪽은 덕포리와 접해 있으며 현재 3개 행정리 140여 가구에 560명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 용마굴, 용담
거운리에 사는 정씨(丁氏)네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3일 만에 시렁 위에 올라가서 병정놀이를 하는 등 보통아이와는 달랐다. 집안에서는 역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작두로 목을 잘라도, 큰 연자방아로 눌러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기장수에게 독한 술을 3일 동안 먹이고 잠이 든 후에 겨드랑이 밑에 있는 참새 날개만한 쭉지를 인두로 태워서 죽였다. 그 후 거운 다리 밑의 용마굴에서는 흰 백마가 나와서 만지 쪽으로 뻗은 백말등(산능성이)을 치달리며 3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은 강 건너 섭사에 있었는데, 1936년, 1972년, 1990년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아기가수의 무덤은 성황당 터 건너편에 있는데, 지금도 장수묘라고 부르고 있다.
■ 딱밭굴
서낭당 터 밑으로 거운리 남쪽 강가에 있다. 백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굴로 둔덕 위에 있는 밭두렁이 문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밭이 있어서 '딱밭굴'이라고 한다. 그 앞에 있는 '딱밭소'에다 닥나무를 담그었다가 가마솥에 푹 삶은 다음 노끈이나 종이를 만들었다.
■ 약물내기
상리를 지나 연하리로 가기 직전인 약물내기 약수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있는 약수는 많은 사람들이 위장병을 고쳤다고 하여 '약물내기'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으며, 수량이 풍부하여 이 마을에 있는 수십 마지기의 논농사에도 이용되고 있다. 특히 갈수기인 봄에 물이 모자라면 메를 지어 놓고 치성을 드리면 많은 물이 나온다는 신비스러운 샘이다.
이 마을 남쪽으로는 대내로 가는 길이 있다.
■ 감자골
무내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궁굴터골과 쑥밭재가 있는 접산을 넘고, 학전이의 빈터거리를 지나면 북면 마차리이다. 그 북쪽에 있는 옆길로 가면 평창군 미탄으로 갈 수 있다. 지형이 감자 구덩이처럼 움푹 파였으므로 '감자골'이라 한다.
■ 땍빼리(닥바우)
번재(番峙)에서 덕포로 가는 길가에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신작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꽃밭여울에 있는 구길을 이용하여 읍내로 다녔는데, 그 길가에 큰 벼랑이 똑바로 서 있으므로 '땍빼리'라고 한다.
■ 번재(番峙)
덕포리에서 삼옥으로 가는 첫 번째 마을로 자연암 앞에 있다. '번(番)'이란 돌아서 간다는 뜻이고 '치(峙)'는 '고개'를 뜻한다. 삼옥으로 가는 신작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이 마을로 가자면 벼랑(병창) 밑을 빙글빙글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번재(番峙)'라고 하였다.
■ 안돌
번재서 땍빼리를 지나 강을 따라 이어지는 옛 길이 있는 바위이다. 먹골어구로 도로가 나기 전에는 이 바위를 한 사람이 겨우 안고서 돌아가야할 정도로 좁은 벼랑길이었다. 예전에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 윗마을 먹골의 처녀가 내려오고, 번재의 총각이 먹골로 가다가 두 사람은 이 벼랑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길이 좁아 서로 꽉 껴안고 지나갔는데, 결국은 그 인연으로 결혼을 하여 잘 살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는 처녀, 총각이 서로 안고 돌았던 바위므로 '안돌'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영월읍 지명 자세히보기
영월읍 흥월리에 잣나무백이라는 마을에 신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살림이 부유하여 첩까지 두고 지냈다. 그런데 첩의 몸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은 준수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장사였다.
그때는 재산이 있고 행세깨나 한다는 집에서는 첩을 두기가 일쑤였는데, 첩의 몸에서 난 자식은 서자라 하여 차별대우가 극심하였고, 재산 상속권을 위시하여 조상 제사 때에도 서자는 제청에 들지 못하고 뜰 아래에서 절을 해야만 했다. 그뿐 아니라 글공부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으니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한 그는 홧김에 술을 마시게 되었고 만취가 되니 불만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하였으므로 누구도 제지하지 못하였으며, 그 집안에서도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온 집안이 장사 준비로 골몰했는데, 그의 행패는 더욱더 심해져만 갔다. 그래도 유일하게 의지하던 부친이 작고하였으니 허탈한 마을을 가눌수가 없었고, 또 온 식구들의 미움의 눈총을 노골화되어 갔다. 이에 그의 분노는 점점 가중되었고, 아침부터 대취하여 있으니 집안에서는 장사준비로 바빴다 방해꾼이 생겨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윽고 장사날이 되니 묘역(墓域)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하관 후 회다지가 끝나고 봉분을 짓기 위하여 많은 흙을 파게 되니 그 흙을 판 구덩이가 제법 크고 깊었다. 모두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의 행패는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의 시체가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나니 심사가 더욱 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본 문중 사람들은 참다못하여 술취한 그를 그 흙구덩이에 밀어 넣고, 마침 술이 담긴 큰독을 번쩍 들어 그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흙이며 돌을 마구 던졌다. 본래 미움을 받던 그인지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군중심리가 작용하여 모두 돌을 던지고 흙 메우는데 참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날 신씨의 집에서는 두 사람의 장사를 치르고 돌아왔다.
그 뒤 워낙 말썽 많은 인간 망나니의 죽음인지라 서자의 집에서도 문제삼지 않고 쉬쉬하면서 지나갔다. 얼마 후 그 마을에서는 인마(人馬)가 질환에 걸리는 등 이상한 재앙이 발생하였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물어본 즉 원귀의 작희(作戱)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자의 집에서는 남몰래 푸닥거리까지 하였다.
그 후 신 씨의 본집은 망해버렸고, 훨씬 후대에 와서 그 서자의 자손은 잘 살았는데, 인근 사람들은 서자를 생매장한 그 흙구덩이가 바로 명당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영월읍 연하리(영월에서 10km지점)에 ‘오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어느 산맥에도 속하지 않는 개울가에 독립된 산이 있다. 바로 이 산을 삼척산이라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주 옛날 삼척에 한 김씨가 살고 있었는데, 인품이 유순하고 재산도 많았다. 그런데 그 지방의 토호(土豪)가 김씨의 재산을 탐내어 죄를 씌워서 재산을 뺏으려 하였다. 몹시 억울했던 김씨는 피신하여 영월에 와서 살았는데, 그 산이 있는 근처에서 정착하면서 토지를 사들일 때 이 산도 겹쳐 사놓았다.
한동안 지난후 삼척 사는 토호는 김씨가 영월에 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영월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이 산이 김씨의 산인 것을 알게 할 것이니 이 산에 대한 세금을 매년 삼척에 바치라고 하였다. 그때는 그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매년 세금을 바쳐왔다. 이렇게 지내오는 동안 삼척의 토호는 늙고 병들어 세금 받는 일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삼척원을 개입시켰다.
삼척원은 그 납세자가 자기 고을 백성도 아니고 해서 마음대로 세금을 인상하였다. 김씨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세금을 내게 되니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김씨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만득(晩得)이라는 일곱 살난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 아이는 유달리 영특하여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는데, 하루는 만득이가 아버지의 근심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그 이유를 캐 물었다. 아버지는 나이 어린 네가 알 일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막득이는 더욱 집요하게 캐어 물었다. 아이가 남달리 영특하길래 어린 것이기는 하나 행여나 무슨 도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버지는 만득에게 그 삼척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만득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아버지가 그 세금을 물지 않고 있으면 기다리다 못해 그들이 세금을 받으러 올 것입니다. 그때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몹시 고민하던 김 씨는 어린아이의 말이기는 하나 얼마간 위로가 되어 세금을 내지 않고 미루어 두었다. 이윽고 삼척의 벼슬아치가 이른 봅에 세금을 받으러 왔는데, 그 집 사랑방에 자리를 잡고 거만스럽고 도도하게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그 방에 없는 틈을 타서 수작을 붙여 보는 것이었다.
“이 산을 삼척의 산이라고 하여 높은 세금을 매긴 모양인데, 이 산에서는 소출도 없고, 우리에게는 이 산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 산을 아예 삼척으로 가져가십시오. 우리는 가져가시기 좋게 그 둘레에 칡을 심어 놓을 것인즉, 올 가을에는 칡덩쿨이 자랄 것이니 칡으로 얽어 가지고 가져 가도록 하시고, 세금을 받아갈 생각을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벼슬아치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조리가 정연한 데는 할말이 없어 그냥 돌아가 삼척원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더니, 삼척원은 무릎을 탁치며 “과연 기발한 응답이로다. 세금을 또 받으러 갔다가는 그 아이한테서 무슨 봉변을 당할른지 모를 일이로다.”하고 김씨에게 세금 받는 일을 중단시켰다. 한편 김씨네는 다가올 사태에 대비하여 그 산 기슭에다가 많은 칡을 심어두었다.
지금도 삼척산에는 칡이 무성하여 김씨네 후손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까지 연중 필요해 칡을 채집하여 이용한다고 한다.
영월읍 문산2리에 운중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북면 마차리 요봉에서 오른편 산골을 거쳐 올라가면 한 고개가 나오는데,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꺽어 올라가면 바로 이곳에 운중암이 있다. 30m나 되는 폭포가 있는 이 벼랑밑에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암자가 바로 그것이다.
옛날 문산리에 정씨 총각이 있었는데, 그는 조실부모 한데다가 재산이라고는 없으니 궁색하게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3대 독자인데도 30살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그는 농사 품으로 혼자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으나, 농사 일거리가 없을때는 약초를 캐다가 팔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의 일이었다. 장마가 오래 계속되니 농사 일거리도 없고, 약초를 캐러 나설수도 없게 되어 그동안 캐놓았던 약초를 영월읍에 가서 팔아 약간의 식량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보덕사(報德寺)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날은 7월 백중날이어서 많은 신도들이 모여 법회를 베풀고 있었다. 정총각은 호기심에 끌려 절로 들어섰다. 난생 처음으로 절에 오게 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불공드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해야 되는것인줄 알고 다른 사람들처럼 수없이 절을 했다. 그리고는 미소짓고 있는 부처님을 보고 무의식중에 “저는 3대 독자이온데 장가 좀 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게 되었다.
그는 절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금몽암(禁夢庵) 앞에 이르러 보니 여기도 보덕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법회를 열고 있었다. 정총각은 또 이 절에 들어가 한동안 불공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하루는 약초를 캐러 우연히 폭포가 있는 이 산골에 오게 되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폭포 옆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비를 피하기로 하였다. 굴 속에 들어가 보니 전날 절에서 본 부처같은 불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상 형상을 한 종유석이었다. 순박한 그는 이것 역시 불상으로 알고 그 앞에 절을 하면서 장가를 들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친 다음 약초를 캤는데 평상시보다 많이 캐었으므로 한동안 그곳에만 가게 되었고 그 굴에 들어가 기도하고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루는 폭포 옆에서 점심을 먹고 양지쪽에 앉아 있다가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 산골 일대가 흰 구름으로 가득 차더니 백발 노인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 “정총각은 이 산으로 빨리 가서 곤욕을 치르는 젊은 여인을 구하라. 지체말고 곧 가야한다.” 하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다. 그리고는 구름이 자기 주위로 몰려들면서 점점 무겁게 조여드는 것이었다.
차츰 그 구름의 압박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호흡이 막힐 것 같아 답답하여 몸부림치는 순간 잠이 깨었다. 하도 이상하여 우직한 그는 재빨리 요봉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젊은 한 여인이 무인지경에서 문등병 환자에게 붙들려 그야말로 큰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정총각은 신체가 건강하고 힘이 좋아 금방 그 문둥이를 쫏아 보내고 여인을 구하게 되었다. 그 여인은 단양군 영춘의 조씨가문 출신으로 평창군 미탄면의 권씨 집으로 시집을 갔었는데, 25살이 되도록 애기를 낳지 못한다 하여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총각은 그 여인의 사정을 모두 듣고나니 딱한 생각이 들어 자기와 살기를 청하였고, 그 여인도 친정에 돌아가보아도 별 신통한 일이 있을 리도 없어 결국 같이 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총각은 3대 독자이므로 이 여인이 애기를 낳아줄 지가 근심이 되었고, 그 여인 역시 애기를 낳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 내외는 매일같이 폭포가 있는 곳으로 약초를 캐러 다니면서 한결같이 자식의 점지를 기도하였다.
그들은 항상 둘이 같이 다니면서 약초를 캐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살림도 차차 넉넉해졌고, 그들 내외의 정성이 어찌나 지극하였던지 석달만에 조씨 부인은 잉태하였으며 그 후 삼형제를 두고 행복하게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어느 보살이 이곳에 절을 짓고 ‘구름이 무겁게 압박하였다’는 전설대로 운중암(蕓重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① 옛날 영월읍 거운리의 한 집안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고, 낳자마자 선반 위에 올라가 앉아서 놀곤 했다. 집안에서는 조숙한 아이를 낳아서 대견하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그 아기의 할아버지는 크게 근심하여 “아마도 장사가 탄생한 모양인데 심상치 않은 징조다.” 라고 생각하고, 집안이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 시절은 고리탑탑한 생원님 네가 정권을 잡고 있어서 무장(武將)이 나는 것을 경계하였고, 또 반란이나 역도(役徒)를 두려워하여 장사가 태어나면 사전에 제거하는 예가 있었다. 그러니 그 집에서는 아깝고 애석하기는 하나 죽여 없애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젖도 먹이지 않고 굶어 죽게 하였다. 그 후 수일이 지나 거운리 앞 강가에 있는 굴 속에서 용마가 나타나 공중을 날고 들판에서 뛰놀더니, 이미 장사가 죽은 후였으므로 벼랑을 날며 울부짖다가 끝내 거운리 배터 거리의 서쪽 벼랑 위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거기에는 큰 무덤이 있는데 용마를 묻은 무덤이라고 해서 그것을 용마총(龍馬塚)이라고 한다.
② 옛날 무릉도원면 도원리에 살던 손 씨 집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갓난 아기답지 않게 너무 숙성하였고,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았으며, 3일만에 실광 위에 올라가는 등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기가 막힌 그 집안 식구들은 어쩔쭐을 몰라 하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마을의 지각있는 노인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장사가 난 모양인데 앞으로 닥칠 일이 큰일이라고 하였다. 아이를 출산한 집이 무사할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다 못한 그 집에서는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없애 버렸다. 그런지 3일 후에 그 마을 동쪽 강 후미진 깊은 소에서 용마가 나와 주인을 찾아 헤매다녔다. 그 용마는 사방을 날아다니다가, 무릉도원면 무릉면 동북쪽 강 건너 마을의 벼랑을 왕래하며 슬프게 울부짖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말이 났던 곳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마가 나왔던 소를 용소(龍沼)라고 하며, 그 옆에 용마의 무덤까지 있다고 한다. 무릉리의 강 건너 마을은 용마가 울부짖은 곳이라 하여 명마동(鳴馬洞)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③ 영월읍 덕포 상리 상동천 개울가에도 용마굴(龍馬窟)이 잇는데 이 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그 하나는 단종대왕 혼련이 태백산 신령이 되시어 태백산으로 가실 적에 벼랑이 갈라지면서 은안백마(銀鞍白馬)가 나타나서 대왕의 혼령을 모시고 갔다는 전설인데, 곧 충신 추익한(秋益漢)이 단종을 배알했을 때 단종이 타고 있던 백마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월읍 하송리에 살던 엄씨 집안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고, 낳자마자 시렁에 올라가 있었다. 그 부모는 불안하여 아기를 맷돌로 눌러 놓고, 그 위에 콩 쉼을 얹어 놓아 죽게 하였다. 그 후 상동 개울에 있는 굴에서 용마가 나와서 산막까지 뛰어다니며 울부짖다가 주인 장사를 만나지 못하고 용마가 났던 곳에 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송리에도 장사 무덤이 있고, 용마굴 앞에 있는 돌무덤을 용마무덤이라고 한다.
엄흥도(嚴興道)
조선전기의 문신, 지사, 시호는 충의(忠毅).
영월의 호장으로서 단종이 시해되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르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가족들과 같이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호장 엄흥도의 충성은 인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렸다하여 후세인들이 그를 항상 추모하였다.
영월 향교
지정번호 : 제 100호
지정년월일 : 1985. 1. 17
규모.양식 : 향교
시대 : 조선(朝鮮)
소재지 : 영월읍 영흥2리 892
문의처 : 문화관광과 033)370-2531
영월향교는 KBS영월방송국에서 서편으로 약 1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설립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성종 4년(1473)에 번와(燔瓦)하였다.
선조 7년(1574)에 개건, 26년(1593)에 중수(重修), 37년(1604)에는 중창(重創)하였다. 이어 광해군 9년(1617)에는 개조(改造)하였고, 인조 12년(1634)에 번와(燔瓦)하였으며, 숙종 3년(1677)과 정조 19년(1795)에 각각 중수(重修)를 하였고, 순조 25년(1825)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0년에 대성전(大成殿)과 동서와 교직사(校直舍)를 제외한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장의실(掌議室), 풍화루(風化樓)가 전화(戰火)를 입어 불타, 1958년 내삼문, 명륜당, 장의실을 재건하였으며, 1964년에 풍화루를 중건하였다.
1981년에는 명륜당, 풍화루, 내삼문 등을 번와하였으며, 1983년에 대성전을 1986년에 동서무를 해체 복원하였고, 1987년에 교직사를 해체 복원하였다고 한다.
1992년 동제를 개조 중건하였고 풍화루를 번와하였으며, 대성전의 단청과 현판을 개조하였다. 1993년에는 서제를 개조 중건하였다.
영월장릉, 단종역사관, 영월종교미술관, 동강사진박물관, 영월동강생태공원, 별마로천문대, 연하계곡, 정양산성, 하송리 은행나무
초등학교 : 내성초등학교, 영월초등학교, 청령초등학교, 봉래초등학교
중학교 : 영월중학교
고등학교 : 영월고등학교, 석정여자고등학교
대학교 : 세경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