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읍

                                                                                                                                                                                                                                                           

1.개요

상동읍은 영월군의 동쪽에 위치한 읍으로 광산 산업이 발달하며 한 때 인구가 4만명을 넘기도 하였으나, 광산채굴이 중단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해 현재는 인구가 약 1,100명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읍이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1,094총 인구수
570인구(남)
524인구(여)

4.지명의 유래



■ 구래리(九來里)
태백산 줄기인 민잭산과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웃냇뜰(상천평)을 굽이 돌아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 후, 심산유곡을 이루면서 칠랑이의 아우라지에서 구래천과 어우러져 남한강 상류인 맛대로 이어진다.
구래리의 유래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8년간의 고행을 마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왔다. 자장법사는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태백산 갈반지(葛蟠地)'를 찾으려고 상동을 아홉 번이나 다녀갔으므로 이곳을 '구래리(九來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내덕리(內德里)
윗냇뜰(상천평)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어평천과 합류하여 내평리의 먼내벌로 흐른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냇가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내덕'이라 했는데, 후에 한자의 영향으로 '내덕리(內德里)'가 되었다.


■ 덕구리(德邱里)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 강원도 땅이었던 울진군이 경상도로 이속되고, 덕구리와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면으로 편입되었다.
땅이름의 유래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삼동산'의 큰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덕구리'라 하였다. 덕구리는 '고심골, 굽돌이, 양지말, 음지말, 질가부, 중말 등의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75가구 262명(1992년 기준)을 주로 고랭지 채소와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 천평리(川坪里)
본래 경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땅이었으나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울진군(蔚珍郡)이 경상북도로 이속(移屬)되고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읍으로 편입되었다.
천평리의 원래 지명은 '냇들', '내뜨리'라고 불렀으며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다. 이러한 냇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므로 '냇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동읍 지명 자세히보기

5.지역의 옛이야기

5.1.숯가마 전설

영월읍에서 상동읍 쪽으로 4km 정도 올라가면 두평(斗坪)역에 이른다. 이곳을 숯가마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예전에는 그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서편 산 밑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그 일대는 비옥한 밭이었다.

지금의 두평역 동쪽 산 밑에 예전에 한 큰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부자집 앞길은 정선, 태백, 삼척 등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그때는 주막이 많지 않았으므로 그쪽으로 내왕하는 길손은 어김없이 찾아들어 매일 접대할 과객(過客)이 수십명에 이르렀다. 때문에 그 집 주부는 매일같이 몰리는 손님의 치다꺼리에 지쳐서 손님을 치르지 않고 편히 살기를 염원하게 되었다.

하루는 늙은 중 하나가 문밖에 와서 동냥을 청하므로 곡식을 후히 퍼주고 “우리집은 손님 치다꺼리에 볼일을 못 볼 형편인데 어떻게 하면 손님 없이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그 노승이 말하기를 “손님들을 찾아들어 올만하여 찾아오는 것이니 너무 역겨워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원하신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오니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주부는 워낙 손님 치르기에 지쳐있던 터라 방법이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다시 시주를 두둑이 주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노승은 “정이 그러시다면 이 앞들 밭에다가 개울물을 막아 전부 논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주부는 그날 저녁에 앞들을 모두 논으로 만들기를 주장하였고, 김부자도 가만히 생각하니 그것도 그럴듯하여 개울을 막아 모두 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그 부자집은 자연히 손재가 계속되더니 몇 해 안되어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토록 많이 오던 손님들의 발걸음도 자연히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마을은 지명이 숯가마인데, 그것은 숯의 가마이므로 불이 이글이글 하듯이 그 부자집에 재산이 일어났었는데 숯가마 아궁이에다 물을 끌어 들였으니 숯불은 꺼지게 마련이므로 그 김부자집이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5.2.범찬바위 전설

상동읍 내덕리 신우동 개천 건너에 제법 운치가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범찬바위이다. 옛날 내덕리에 힘세고 담력있는 방씨가 살았는데, 하루는 그 아랫마을의 친구 회갑잔치가 있어 하루종일 잘 놀았다. 유쾌하게 놀다가 밤 늦게야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때는 큰 길이 없어서 개천을 따라 왕래하였으므로 이 바위를 지나게 되었다. 술을 많이 먹고 오던 그는 이 부근에 오니 집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취지가 몰려와 이 바위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동안 자던 그는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는데, 뱀같은 차가운 것이 슬그머니 머리 위로 스쳐가기를 두어번 하다가는 한참 있다가 반복하였다. 깜짝 놀란 그는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남산만한 큰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묻혀다가 자기 이마에 적셔주는 것이었다.

방씨는 생각하기를. 호랑이는 영물이라서 잠자는 사람은 먹지 않고 잠을 깨워 놓고 잡아먹나 보다 하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였다.그냥 가만히 있다가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겠기에 자는 척하고 누워 있다가 호랑이가 물을 묻히려고 개천으로 내려가는 순간 벌떡 일어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호랑이의 궁둥이를 걷어찼더니 첨벙하여 호랑이는 물속에 빠져 버렸다.

방씨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호랑이가 물속에서 나오며 하는 말이 “그 사람 그래도 방효자의 후손이기에 잠을 깨워주려고 했는데 남의공도 모르고 오히려 나를 물속으로 쳐 넣다니 괘씸한 놈이다. 당장 잡아먹을 것이로되 효자의 후손이고 보니 그럴 수도 없고 참말로 미련한 인간이로구나.” 하며 남쪽 산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호랑이의 말을 듣고 효자 조상을 둔 덕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생각하니 승조(勝朝)하는 마음이 더하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씨는 그 동네에 있는 효자문의 후손이었다 하며, 그 후 이 바위를 가리켜 사람들이 ‘범찬바위’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3.고두암 전설과 정철의 예언

영월군 상동읍 구래리에 대한 중석 영월광업소가 있는데, 광업소 현관 바로 뒤에 우뚝 솟은 기암이 속칭 꼴두바위라는 고두암이다. 이 바위는 화강암으로 형성되었는데 바닥 넓이는 천여평, 높이는 15층 정도의 고층건물과 맞먹는다. 이에는 다음의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조선조 선조대왕때 송강 정철(鄭澈)이 강원감사로 재직시(1580~1583년) 이곳을 지나가다 이 바위를 보고 넙죽 절을 하면서 이 큰 바위로 인하여 “이곳 심산유곡에 만인이 살리라”고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과연 예언대로 1930년에 한국인 맹씨(孟氏)가 중석을 발견하고 채굴을 시작하여 일본인 고바야시의 손을 거쳐 대한중석 상동광업소가 자리잡고, 인구 만명이 넘는 읍이 형성되었으니 정철의 예언이 적중하였다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옛날 꼴두바위 밑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된 여인이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주막을 내어 장사를 하였는데, 주막 앞길이 삼척 등지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어서 장사가 잘돼 몇 년 안가서 큰 부자가 되었다.

돈을 많이 모아 남부럽지 않게 된 이 여인은 소원이 있다면 남들처럼 아들을 얻는 일이었다. 또한 주막집 일도 오래 하다보니 손님이 많이 모여 즐거운 비명을 올리다 못해 지쳐버릴 지경이었으나 시어머니의 은근한 감시가 있고 함부로 처신도 할 수 없어 남모르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날이 저물 무렵에 중이 찾아 들었다. 여인은 시어머니 몰래 그 중을 극진히 대접하고 소원이 자식을 하나 두고 싶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신세를 한탄하며 방법을 상의하게 되었다. 중이 말하기를 “아무도 모르게 고두암의 바위머리를 깨어내 보라”고 일러 주었다. 슬기로운 중이 여자의 힘으로 고두암의 머릿돌을 깨라고 함은 이 일에 정신을 모아 성정(性情)에 대한 고민을 잊게 하려고 함이었으리라.

이튿날 일찍부터 여인은 중의 말대로 아무도 모르게 고두암의 머릿돌 깨는 데만 열중하였으니 얼마 후 그 머릿돌은 깨어져 없어지게 되었다. 그 뒤로 이 주막에는 손님이 끊기고 한가한 날을 보내게 되었다. 얼마 후 며느리의 소행을 알게 된 시어머니는 괘씸하게 여기고 며느리를 학대하기 시작했고, 끼니마져 제대로 주지 않아 이 여인은 아들을 낳아 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를 가엾게 여긴 신(神)은 그 여인 대신 고두암으로 하여금 잉태하게 하였으니 곧 그토록 애타게 소원하던 아들을 중석 생산으로써 대신하여 생남(生男)의 소원을 이루게 하였다고 전한다.

6.지역의 인물

김어수(金魚水)


출생지 /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


영월 출신 현대문학의 거성. 시인.


1909년 1월 4일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에서 출생.
13세가 되던 1922년에 부산 범어사로 출가를 하여 25년 간 승려생활을 하다가, 1930년 일본 경도시 화원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마쳤다. 1931년 조선일보에 “弔詩”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여 전국의 신문 및 잡지에 시조와 수필을 발표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은 시작된다. 1941년부터는 교육계에 몸을 담아 부산과 경남각지에서 중고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역임하고, 1969년에 다시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상임 포교사직을 맡으면서 불교활동에 전염을 하게된다. 1983년에는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창설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85. 1. 7일 선종하였다.

김어수(시조)는 평창의 이효석(소설), 춘천의 김유정(소설), 인제의 박인환(시) 등과 함께 현대문학에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한국문학의 거성이며 한국문단의 대표하는 큰 업적을 남긴 민족시인이다.

그는 시인이기에 앞서 불가(佛家)의 거장으로 불문(佛門)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존경받는 불교지도자였다. 이렇게 종교에 심취해 있는 문인들의 작품세계는 흔히 종교적 색채를 띤 교훈적이거나 구도적(求道的) 성향의 한결같은 작품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김어수의 작품들은 “봄비”, “早春漫情”, “裸木” 등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느낀 소박한 정을 노래했고, “望北斷情”, “高地의 回憶” 등에서는 분단조국의 슬픔과 북한공산군의 남침에 대한 분노를 되새김해 놓았다. 또 다른 작품 “蔚山, 鶴城” 같은 작품에서는 임진왜란을 모티브로 한 역사 시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저서로는 시조집에 “回歸線의 꽃구름”, “햇살 쏟아지는 뜨락”, “김어수 시집”이 있고, 수필집으로 “달 안개 피는 언덕길”, “가로수 밑에 부서지는 햇살”이 있으며 불교경전 번역서로 “安樂國 太子經”, “法華經” 등이 있다.

7.지역의 명소



  칠랑이 계곡

   상동읍 천평리 산26의 8번지 일원의 4㎞에 걸친 계곡으로 태백산 줄기의 험한 준령이 빚어낸 태곳적 신비를 갖춘 곳이다.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가 이루는 깊은 그늘과 집채만한 둥근 바위들 사이로 맑은 옥빛의 청정한 물줄기가 쉼없이 흐른다.
<출처: 강원도민일보>












  꼴두바위(고두암)

  아이를 못 낳아 시어머니에게 갖은 구박을 받은 며느리의 애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구래초등학교
중학교 : 상동중학교
고등학교 : 상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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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