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영월군 하동면으로 불리었다가 김삿갓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시인 김병연의 묘가 발견되면서부터 김삿갓면으로 지역의 이름을 바꾸었다.
■ 옥동리(玉洞里)
하동의 면 소재지이다. 예밀리(禮密里) 밀동(密洞)은 1167년 고려 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廳舍)가 있었던 곳이며,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이 옥동리의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옥(獄)이 있었던 마을이므로 '옥동(獄洞)'이라고 했으나 어감(語感)이 좋지 않다고 하여 '獄洞→玉洞'으로 고쳤다. 현재는 130가구에 433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옥동중학교와, 하동지서, 하동농협, 하동우체국 등의 행정 관서가 있다. 옥동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삼척 김씨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장군의 사당이 있었으나 관리 소흘로 없어졌고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워 그의 높은 공적을 기리고 있다.
■ 뱃나드리
김삿갓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각동(角洞)으로 이어지는 나루터이다. 1950년 전만 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영월 지방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계곡 사이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돛단배를 띄어놓고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뱃사공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 석유 등의 생필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 칠성백이
덕내 북쪽 수리봉 밑에 있다. 절벽이 무너져 움푹 파인 곳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칠성백이'라고 부른다.
■ 방울재
마대에서 충북 영춘면(永春面) 동대리(東大里)의 베틀 마을과 점터로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이나 노새 등에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는데 그 때 목에 매달았던 방울이 울렸으므로 '방울재'라 하였다. 일설에는 방울처럼 동그란 산봉우리로 난 고개길이라는 얘기도 있다.
■ 고지기재
밀골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와석리로 넘어가는 해발 300m의 험한 고개였으나 1980년에 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차량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 이 재를 넘으면 태백, 동해로 이른다. 와석리(臥石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와석재'라는 이정표를 세웠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고개 본래의 지명은 '고지기재'로 밀동(密洞)의 창터(倉基)에 있었던 두창(杜倉)의 세곡(稅穀)을 지키는 창고지기인 고지기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가족들과의 상봉을 기다리며 든돌에서 서당을 열고 평생을 혼자 살다간 새풍 선생이란 분의 묘가 있다. 그는 통일이 되면 와석리로 찾아 올 자식을 맞아들이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와석리 입구인 고지기재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원래의 고지기재는 밀골 배터거리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998번 도로와 연결되어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로 내려갔다.
■ 음지뜸
외룡리의 남쪽으로 열재와 배나무골이 있는 곳으로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쪽 마을이다. '뜸'이란 큰 마을 가까이에 따로 몇 집씩 모여 사는 '작은 동네'를 말한다.
■ 아우라지
삽짝모랭이 남쪽 계곡으로 내리천과 녹전천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아우라지'라 한다. 이곳은 구보(舊洑)가 있어 외룡리 음지마을 일대의 논물을 대기도 한다. 아우라지는 두 군데의 물이 어우러지는 곳(합쳐지는 곳)이므로 '어우러지기→아우라지기→아우라지'로 변하였다.
김삿갓면 지명 자세히보기
조선시대의 방랑시인.호는 난고(蘭皐).(1807~1863)
전국을 방랑하면서 시로서 세상을 풍자하였다.
작품으로는 <김립시집>이 있다.
김삿갓은 안동김씨로서 본명은 병연(炳淵)이요 호는 난고(蘭皐)인데 그가 다섯 살 때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평안도 선천부사로 있을 때 서북인을 등용하지 않았던 조정에 불만을 품은 홍경래가난을 일으켜 선천 가산군을 수중에 장악하려하자 정시 가산 군수는 끝내 저항하다가 홍경래의 손에 죽었으나,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김익순은 처형되고 그의 부친 김안근도 배소에서 죽었다.
병연이 연루를 피하기 위하여 김익순의 하인이었던 김성수에 의해 그의 공향인 황해도 곡산에서 은신하여 자랐던것이다.
김익순의 죄는 본인에 국한하게 되자 그의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왔고 그 모친은 세상에 떳떳이 살수 없으므로 산골을 찾아 이천, 가평, 평창 등지를 전전하다가 영월 삼옥리에 와서 살게 되었다. 당시 영월은 도호부였으므로 동헌에서 백일장을 보게 되었고, 김병연은 이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제(時題)가 「정시 가산군수의 충성스럽게 죽은 것을 논하고 김익순으 죄를 규탄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사연을 모르고 자란 김병연은 정군수를 예찬하고 김익순의 죄를 호되게 나무란 글을 써서 장원을 하였다.
장원한 뒤 모친의 말에 의해서 김익순은 바로 자기자신의 조부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난 후 삼옥리에서 살 수 없어서 충청도 의풍 가는 길목인 지금의 하동면 와석리 어둔의 무인촌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조상을 지탄한 죄책감과 운명에 대한 회의로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유명한 많은 시를 지었으며 57세때 전라도 동복에서 객사한 것을 둘째 아들 익균이 자기 동네인 지금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다 장사 지냈던 것이다.
그후 120년이 지남에 따라 세상에서 잊혀져 가던 것을 1982년 10월 17일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옹이 이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응수 선생은 김삿갓의 시문은 세계수준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 러시아에서도 김삿갓의 시가 크게 인기가 있다고 1985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삿갓이 세계적인 시인임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김삿갓의 유일한 유적지인 영월에서는 「시선 김삿갓 유적 보전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적 보전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초등학교 : 옥동초등학교
중학교 : 옥동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