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의 북쪽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마차리이다. 농산물 재배와 함께 양돈과 한우 사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 공기리(恭基里)
문곡삼거리에서 연덕리의 연평을 지나 10km 정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공기는 주로 고추, 담배,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길이 포장되어 교통은 좋은 편이다.
이곳은 도릉계, 굴앞말, 안공기, 지소덕, 기와집말, 가매실, 장재골 등의 자연 부락이 있으며, 행정 2개 리에 91가구 351명(1992년 기준)이 살고 있다. 공기에는 부모님 묘에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한 김선배 효자각과 홍우보(洪寓輔)의 처 선성 김씨(宣城金氏)의 열녀각, 서씨 효자각 등 효자, 효부, 열녀각이 많고 웃어른을 받들어 모시는 살기 좋은 고장이므로 '받들 恭'자와 '터 基'자를 써서 '공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공기는 열두 개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12공기'라는 말이 있다.
■ 덕상리(德上里)
북면 덕상리는 배거리산밑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제덕원(濟德院)이라는 원집이 있어서 고덕치를 넘어 평창 약수역(藥水驛)으로 가는 행인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웃마을인 연덕리 연평에는 '연평역(延平驛)'이 있어서 관원들에게 말을 빌려주었다. 덕상리는 연평의 원동재를 넘어가는 길과 서면 광전리 여촌앞으로 지나는 길이 있다. 지금은 2개 행정리에 75가구 281명의 인구가 주로 콩, 옥수수, 감자농사를 지으면서 원동, 용수골, 윗덕전이, 아랫덕전이, 쇠실, 새마을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 마차리(磨磋里)
마차리는 북면의 면소재지로 동으로 거운리, 문산리와 접하고 서쪽에는 연덕리와 문곡리가 있으며 남으로는 삼옥리, 영흥리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공기리와 평창군 미탄면과 맛닿아 있다. 영월광업소 마차탄광이 전성기였을 때는 종업원이 4,000여명에 달했으며 연간 8천만톤 이상의 무연탄을 생산하였다. 지금은 행정 9개리에 536가구 1,922명의 주민들이 골마차, 절골, 분덕이, 솔치, 학전이 등의 자연부락에서 콩, 옥수수, 감자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 문곡리(文谷里)
영월군 북면 지역으로 이곳 역시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조정으로 문포(文浦, 개간이)와 가느골(細谷里)에서 한자씩을 따서 '문곡리'라 했는데 문포는 일제시대(1919∼1945)북면의 면소재지였다. 행정 4개리에 27가구 1,007명이 논농사와 콩,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의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가느골, 노루골, 장승백이, 강구, 점골, 가래실, 띠앗, 문성개, 두목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문곡리는 1935년 11월 1일 세곡리, 모상리, 모하리를 병합하였다. 특히, 가느골에 있는 송어장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이곳 음곡천(陰谷泉)에서 나오는 물은 가느골과 강구의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 연덕리(延德里)
1914년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령의 의해 북면이라 칭하게 되었고, 연평(延平)의 '연'자와 덕하(德下)의 '덕'자를 따서 '연덕리(延德里)'라 하였다. 연평리는 예전부터 북면의 중심지로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가람마을, 나산이, 성황동, 달앗, 사만이, 오만이 등이 있고, 2개 행정리에 192가구 698명의 인구가 벼, 옥수수, 콩, 팥, 녹두, 고추, 담배 등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성황동 입구에는 삼강레미콘 공장이 있고 연평에는 보건지소, 노인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보안도(保安道) 소속의 '연평역(延平驛)'이 있어서 고덕치의원동을 지나 평창 약수리의 '약수역(藥水驛), 방림역(方林驛), 대화역(大和驛)'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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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우(立石)
산영월(山迎月)을 지나 덕상리 청룡 안으로 가는 경계에 있는데, 채독(싸리나무로 독처럼 만든 다음 한지로 바른 단지모양의 그릇)모양의 큰 바위가 마주보고 서 있으므로 '선바우'라고 한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샘이 솟아나며 예전에는 절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선바우절'이라고 불렀다.
■ 무동실(舞童室)
나산이의 북서쪽에 있으며 마을의 진산(鎭山)인 무동산(522.3m)은 아이가 춤을 추는 형상이므로 '무동실'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옛날 지솟덕(紙所垈)에 살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친상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가 평소에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생전에 정해둔 묫자리를 파면 큰 너럭 바위가 나올 것이니, 내 시신을 그 바위 위에 거꾸로 묻고 그 대신 봉분을 크게 만들어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상주들이 장사를 지내기 위해 그 자리를 파 보았더니 큰 너럭바위가 나왔다. 그러나 상주들은 아버지를 그 바위에다 그냥 모실 수 없다는 생각에 망치로 돌을 깨어 내니 그 속에서 세 마리의 두꺼비가 기어 나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때 김씨집안의 어린 손자가 갑자기 춤을 추며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 집안의 가세(家勢)도 기울어져 버렸으므로 이때부터 이산을 '무동산'이라 하고 이 마을도 '무동실'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 철광이 있었으며, 말구리재를 넘어 평창군 시동과 마지리(馬池里)로 가는 길이 있다.
■ 김씨 효자효부각(孝子孝婦閣)
공기 1리 도릉계와 굴앞말 사이에 있다. 이곳에 사는 김(金)씨 가문에 효자와 효부가 있었는데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죽은 후에도 3년간 시묘를 살았으므로 1924년 6월엣 석비(石碑)와 함께 각(閣)을 세웠다.
초등학교 : 마차초등학교(문곡, 연덕, 공기분교)
중학교 : 마차중학교
고등학교 : 마차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