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각산(劍閣山)
광천리와 남면 연당 사이로 각한치(角汗峙)라는 높은 고개가 있으며, 하얀 눈송이가 덮힌 이곳의 낙락장송은 '검각창송(劍閣蒼松)'이라 하여 영월 8경(寧越八景)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곳이다. 산봉우리가 각이 지고 칼처럼 생겼다고하여 '검각산'이라 한다. 일설에는 영월 엄씨의 시조인 엄임의(嚴林義)가 당(唐)나라의 사신인 파락사(坡樂使)로 신라에 와서 귀화하였다. 엄임의는 奈城郡으로 봉해진 후 영월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가 영월로 부임할 때 각한치를 넘어오면서 이곳의 산세가 중국 중경(重慶)에 있는 검각산과 닮았으므로 '검각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 갈골(葛谷)
문성개(영월삼거리)와 옥녀봉(玉女峰)을 비켜 돌아 연당으로 가는 38번 국도 우측에 있다. 남쪽 강 건너로는 드넓은 갯벌로 형성된 문개실 마을이 있다. 이 골짜기에는 춘궁기인 보리고개 때 캐먹던 칡(갈, 葛)이 많았으므로 '갈골'이라 한다. 영월군 분뇨처리장 설치 문제로 영월군과 방절리, 북쌍리 주민들이 대치하던 곳으로 '소장터'와 '도축장'이 있다.
■ 관음당재(觀音堂峙)
새터의 승당(昇堂)에서 조전리(진밭)의 상촌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이다. 고려 인종의 아들인 충희(沖曦)대사가 태화산 서쪽의 흥교사에 있을 때, 그 절에 봉안할 부처님(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이 고개에서 쉬었다가 넘어갔으므로 '관음당제'라 불렀다고 한다.
■ 원골(院谷)
연당역이 있는 되골에서 철도를 넘어 서남쪽으로 약 3마장의 거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孝婦幼學高秀昌妻三陟金氏之碑』라는 열녀각이 세워져 있다. 열녀각 뒤에는 매차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고목은 이 원골 마을의 서낭목(城皇木)으로 신봉되고 있다. 원골 우측에 있는 바른골을 지나면 밝은 밭으로 갈 수 있다. 옛날 행인들에게 숙식(宿食)의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집이 있었으므로 '원골'이라고 한다.
■ 무도리(水回村)
아랫두릉 동남쪽에서 용암사(龍岩寺) 건너편에 있다. 어상천면 석교리(石橋里)에서 흐르는 냇물이 토교천(土橋川)과 합류하여 마을 앞을 돌아서 흐르므로 '물도리→수회촌'이라 하였다. 토교천은 쌍룡, 삽둔, 용동골, 곡금을 지나 후탄리의 산정(산아몰)에서 평창강이 이어진다.
남면 지명 자세히보기
영월과 제천사에 군계를 이루고 있는 남면 토교리 고개를 조리재라고 한다. 송학~쌍용으로 큰 길이 나기 전 옛날에는 이 고개를 통하는 길이 유일한 상로(商路)였다.
경상도 어느 곳에 키가 작고 아주 왜소한 몸매의 김씨가 살았는데, 사람이 작으면 경망하기 마련인지 그 김씨도 행동이 몹시 경망하여 김조리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쌀을 일 때 조리를 쓰게 되는데 그 조리는 항상 촐랑대기 마련이니, 김씨의 경망하고 촐랑대는 그 행동과 인품을 풍자한 별명이었다.
이 김조리는 농사를 지어 보아도 잘 되지 않고 엿장사를 시작하여 열심히 뛰어 보았으나 이것 역시 성공할 길이 없었다. 무엇을 해봐도 뜻대로 되질 않으니 김씨는 허탈해지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되면 조상탓이라고 이 김조리도 아버지 산소나 명산을 찾아 옮겨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형편에 좋은 묘자리를 구하는 길도 없었다.
그는 강원도는 산수가 좋다고 하니 강원도에 가서 산소자리를 구하여 볼까 하고 아버지의 묘를 파서 유골을 정중하게 포장하여 괴나리 봇짐으로 만들어 짊어지고 강원도를 찾아오는 길이었다. 영주, 단양, 제천을 거쳐 영월 땅으로 향하여 오는 길이었는데, 제천과 영월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도부(到付) 장사꾼이 많았다. 때문에 김조리도 여러 사람과 함께 그 주막 목로방에서 합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조리는 자기 아버지의 유골이 들어있는 괴나리봇짐은 없어지고 참빗장사 보따리 좌판 하나가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잃어버린 그는 앞이 캄캄하였다. 그는 지극히 송구스러웠으나 하는 수 없어서 체념을 하고 아버지의 유골과 바뀐 참빗좌판을 둘러메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참빗장사는 의외로 잘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었고,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가서 논과 밭을 많이 장만하여 잘 살고 있었다.
한편 그 주막집 목로방에서 같이 자던 참빗장수는 도무지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곤궁한 편이었는데, 한방에 투숙한 키 작은 사람이 괴나리봇짐을 유난히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을 보고 필시 귀중품일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욕심이 나서 새벽에 그 유골이 든 괴나리 봇짐을 훔쳐 가지고 영월땅으로 향했다.
고개마루턱을 넘어 영월 땅 어느 으슥한 곳에 이르니 아직 새벽이라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으므로 괴나리봇짐의 내용이 궁금하여 끌러 보았더니 뜻밖에도 유골이었다. 이 참빗장수는 기대에 어긋났으므로 참빗좌판만 잃어버린 것이 화가 나서 그 유골을 홧김에 여기 저기 사방으로 팽개쳐 버리고 하는 수 없이 농촌으로 들어가 머슴으로 전전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어느 해 경상도 어느 부자집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은 추석이 다가와도 아버지 산소에 벌초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석날이 되니 주인과 머슴은 한가하게 술상을 차려놓고 술을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머슴을 위로하기 위해 “나도 젊었을 때는 그대와 같이 머슴도 살았고 행상도 하면서 무척 고생을 해 보았다네. 그러니 그대의 사정도 알만하다. 때가 되면 성공할 수도 있으니 참고 살아가라.”고 하면서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인은 지난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일을 해도 잘 안되어 아버지의 산소를 파서 강원도로 짊어지고 갔던 이야기와 그 유골 보따리를 제천에 잃어버린 이야기. 참빗장사를 해서 돈을 벌게 된 연유를 모두 털어놓게 되었다.
주인이 하는 말을 모두 들은 머슴은 바로 자기가 저질렀던 일이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 머슴은 원래 제주도 사람으로 그때는 제주도의 참빗이 유명하였으므로 참빗장사를 하러 육지에 왔던 것이다. 그 주인은 반색을 하며 자기 아버지의 유골을 어디에다 묻었는지 그것을 찾게 해달라고 도리어 사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월 땅으로 와서 그 고개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여기저기에다 팽개친 유골을 수십년 후에 찾으려고 하니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종일토록 산을 편답(遍踏)하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물이 있는 골짜기를 찾아가 점심을 먹으면서 보니 그 물 웅덩이에 바로 사람의 두개골이 있었다. 그 머슴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내던진 두개골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다 봉분(封墳)을 쌓고 소중하게 산소를 만들었다. 김조리는 아버지의 산소를 쓰고 난 다음 제주도 머슴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잘 살게 하였다. 그 후 이곳은 김조리의 아버지 유골을 버려서 묻었다고 하여 조리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들꽃민속관
윗들골의 가냇절이 있는데, 수백 년 지난 큰 느티나무와 영월의 전통 가옥으로 지정된 우구정씨 집이 있다. 민속관 앞에는 푸른 잔디밭 사이로 광탄리의 넓은 여울과 오루봉이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들꽃민속관은 권정인씨가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민예품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농기구, 토기, 여성들의 장신구, 옹기그릇 등을 진열했는데 들꽃민속관이란 이름은 관장인 권정인여사가 들녘에 피어나는 들꽃을 너무 좋아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초등학교 : 연당초등학교
중학교 : 연당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