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면

                                                                                                                                                                                                                                                           

1.개요

영월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본래 서면이라고 부르다가 2009년 한반도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곳 쌍룡리 일대에는 카르스트 지형이 잘 발달되어 있고, 시멘트 공장이 위치하고 있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1,256총 인구수
702인구(남)
554인구(여)

4.지명의 유래


■ 광전리(廣錢里)
광전리는 일제 시대인 1914년에 '광운리(廣雲里)'에서 '광'자를 '전동리(錢洞里)'에서 '전'자를 취하여 '광전리'라 했는데 남면 광천리와 혼동하는 일이 많다.
광전리는 평창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로 여촌을 중심으로 배일치, 뱃말, 광탄, 동골, 쇠목, 매운 등의 자연 부락을 중심으로 3개 행정리에 134가구 459명의(1992년 기준) 주민들이 콩, 옥수수, 고추, 담배를 재배하고 약간의 논농사도 짓고 있다. 특히, 광전리는 석회석이 풍부한 곳으로 배거리산에는 현대시멘트 채석광이 있다. 



■ 신천리(新川里)
서면 신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도 그 명칭이 바꾸어지지 않은 곳으로 원래의 지명은 순수한 우리식 땅이름인 '새내'라고 불렀는데 한자식 땅이름의 영향을 받아 '신천리'라 하였다.
새내의 유래는 오대산 우통수에서 시작되는 평창강과 횡성, 평창, 접경지역인 태기산을 발원지로 하는 주천강이 합수되는 두 강 사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사잇내→새내'라고 부르게 되었고, 합수지점 안 쪽을 '안새내', 바깥쪽을 '바깥새내'라고 하였다.
서면의 소재지는 북쌍리였으나 1906년 신천리의 장터들로 옮겼다. 이곳에 있던 면사무소가 1936년 병자년 홍수로 떠내려가자 1937년 우래실로 다시 옮겼다. 신천리는 3개 행정리에 133가구 1,315명의 주민들이 우래실(명라곡), 정동, 안새내, 바깥새내 등의 자연 부락을 중심으로 콩, 옥수수, 감자, 담배를 재배하고 일부에서는 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현대시멘트 공장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신천리의 경제가 많이 활성화되고 있다. 



■ 쌍룡리(雙龍里)
영월군 서면 구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용들 위 쪽인 용상리(龍上里)와 아래 쪽은 용하리(龍下里)일부를 합하여 '쌍룡리'라 하였다. 곳집마을 뒷산(쌍룡양회 원석광이 개발되기 전)에 올라보면 쌍룡리의 지세는 마치 용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므로 용에 관계된 많은 지명이 있다. 즉, 탑골과 용정원은 용의 머리에 해당되고 용들은 허리, 그리고 삽둔, 용동골, 곡금이는 꼬리 부분에 속한다.
쌍룡은 넓은 들녘의 논이 많은데 8개 행정리에 987가구 3,687명의 인구가 농사에 종사하고 일부는 상업과 쌍룡양회공장에 근무한다. 자연 부락으로는 용정원, 고촌, 신촌, 월촌, 삽둔, 무동, 산막골 등이 있다. 



■ 옹정리(甕亭里)
1914년 3월 1일에 시행한 조선총독부령 111호인 지방 행정 구역 폐합 때 옹산리(甕山里)의 '옹'자와 사정리(射亭里)의 '정'자를 따서 '옹정리'라 하였다
1개리 61가구 234명의 주민들이 사정리, 둔덕마을, 도장골, 옹산리, 동정, 선암 등지의 자연 부락을 중심으로 주로 콩, 고추, 옥수수, 감자 등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평창강이 흐르고 강 건너는 서면 후탄리와 경계이다. 옹정리는 남면 북쌍 1리인 들골을 지나거나 서면 광전리의 여촌을 거쳐서 갈 수 있다. 


■ 후탄리(後灘里)
일제시대인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폐합 때 용하리(龍下里) 일부와 광탄리(廣灘里)를 병합한 후 후평(後坪)과 광탄(廣灘)에서 한 자씩을 취하여 '후탄리'라 하였다. 그 땅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후탄리는 평창강을 끼고 형성된 마을로 2개 행정리에 114가구 403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연정, 문둔, 광탄, 꽃병, 뒷들, 곡금, 산정, 용동골 등 촌락을 중심으로 콩, 팥, 감자, 옥수수, 고추 등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오노산(오리봉, 520.5m)줄기가 뻗어 있으며 그 산자락 끝으로 산촌마을이 형성되었다. 후탄리로 가는 길은 연당에서 참나무재를 넘어가거나 쌍룡리의 삽둔을 지나서 가는 길이 있다. 



한반도면 지명 자세히보기

5.지역의 옛이야기

5.1.배거리산

한반도면에 옥녀봉이 있는데 배거리산이라고도 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 고을 사람들은 노략질과 방탕을 일삼아서 그 원성이 하늘에까지 닿았다. 그래서 하늘이 징벌을 내리고자 하였는데, 마침 이 마을에 착한 사람이 있으므로 그를 구제하기로 하였다. 그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에 신령이 나타나 “옥녀봉으로 가라”고 하였다. 꿈속이기는 하지만 그 계시가 하도 생생하여 그는 급히 옥녀봉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거의 이르렀을 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뇌성벽력이 치더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배 한척이 떠오르더니 정상에서 멈추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생명을 구하게 되었으며,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면서 배가 산에 걸려 얹히게 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배가 산에 걸렸었다고 해서 배거리산이라고 불러왔다.

 

5.2.도깨비 덕에 부자가 된 하대룡

하대룡은 지금의 영월군 한반도면 쌍용1리 용정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진양이고, 시조인 고려 사직공 하진의 27대 손이며, 수중좌리 공신 대광보국승록대부 진산부원군 하윤원의 18대 손이다. 그의 부친은 우태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릴때 조실부모하여 너무도 생활이 어렵고 구차하여 할 수 없이 그 지방의 토호인 김모씨 집의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무더운 여름날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데 지금의 영월군 남면 창원리와 한반도면 쌍용리의 경계인 쌍용교 밑에서 풀을 베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백발노승이 육환장을 짚고 한 사람의 상제와 더불어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인즉 “이 산 너머 골짜기 고목나무 밑에 집을 짓고 살면 당대의 만석군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고 하대룡은 낫을 꼰아들고 나는 듯이 노승 앞으로 달려들어 “지금 무어라 하였는지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위협하니, 노승은 침통한 어조로 하는 말이 “이는 그대의 분복이니 할 수 없이 말해주겠다. 이 산 너머 골짜기 고목나무 밑에 집을 짓고 살면 크게 부귀하게 될 것이요.”하였다.

그 말을 들은 하대룡은 노승 앞에 무릎을 꿇고 사례하고 돌아와 고목나무 밑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낮에는 주인집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이 움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

그렇게 지낸 몇 달 뒤에 또 앞서 노승을 만났던 개울가 다리 밑으로 소풀을 베기 위해 갔다. 한참 소풀을 베고 있는데, 갑자기 상두 소리가 들려왔다. 상여소리는 점차 크게 들려오더니 하대룡이 있는 다리 부근가지 왔을까 말까 할 즈음에 갑자기 뚝 그치고 주위는 너무도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하대룡은 이상하게 여기고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으며 인기척조차도 없었다. 더욱 의문이 생긴 하대룡은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상여소리가 나던 쪽으로 가보았더니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고 번쩍 번쩍 빛나는 상여만이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마음을 진정 시키고 상여 앞으로 다가갔다.

상여의 뚜껑을 여는 순간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황금덩이가 그 속에 가득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대룡은 너무도 기뻐서 하늘을 우러러 수없이 절을 한 뒤 그 황금을 팔아 땅을 샀다. 그래서 하대룡은 일약 머슴살이에서 만석군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룻밤에는 난데없이 수많은 도깨비 떼들이 나타나서 하대룡의 논밭을 전부 가져가겠다고 하면서 논밭을 전부 떼메어 가려 하였으나, 땅이 움직일 까닭도 없을뿐더러 미동도 하지 않았으므로 도깨비떼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당시 하대룡의 재산은 전답이 수백리에 이르렀는데, 많은 토지를 당시 세도가였던 김모 재상에게 헌납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가선대부의 벼슬을 중직 하였으며, 그의 아들 만원은 성균관 생원진사에, 그의 손자 택주는 통훈대부 선공감역에 이르렀다. 지금도 쌍용1리 용정원에는 그의 5대손인 하시백·하시욱·하시문 등 종형제가 살고 있으며, 그의 7대 종선인 봉수·완수·동수·상수 등 4형제가 살고 있었으나 수년전에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으로 이사를 가버렸다고 한다.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쌍룡초등학교, 신천초등학교
중학교 : 쌍룡중학교, 신천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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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