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마리(金馬里)
금마리는 원주군 우변면 지역으로 윗기마동이라고 부르고 용석리(龍石里)는 아랫기마동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삼국 시대부터 이곳에는 '금마곡소(金馬谷所)'라는 천민 집단구역이 있다. 수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그 위치는 『金馬谷所 在酒泉縣南十五里, 금마곡소는 주천현 남쪽 1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도천리(桃川里), 되내
본래 영월군 우변면(右邊面)에 딸린 지역으로 태기산과 치악산에서 내려오는 섬안이 강이 마을을 돌아서 흐르므로 '도는내→되내→도천'으로 부르다가 후에 건너 마을인 도원리(桃源里)와같은 의미로 '도천리(桃川里)'라 하였다. 도원리는 섬안이강 안쪽에 있으므로 '안도내'라 칭하고, 도천리는 바깥쪽에 있으므로 '바깥도내'라 불렀다.
■ 신일리(新日里)
한때는 원주군 우변면(右邊面) 지역이었으나 영월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흥리(新興里), 일오곡리(日午谷里), 공순원(公順院)을 병합할 때 신흥과 일오곡의 이름을 따서 '신일리(新日里)'라 하여 양변면(주천)에 편입시켰다.
■ 용석리
원주군 우변면(右邊面)에 속했던 곳으로1905년(고종 24)에 영월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수곡(龍水谷), 석교리(石橋里), 대촌(大村), 한전리(閑田里), 상신평(上新坪), 외신평(外新坪), 내신평(內新坪), 사슬치 등을 병합할 때 '용수(龍水)'와 석교(石橋)'의 이름을 따서 '용석리'라 부르게 되었다.
■ 주천리(酒泉里)
고려때 주천현(酒泉縣)이 있었던 곳으로 원주목에 소속되었다가 1905년(고종 42)에 영월군으로 편입되었다. '주천'이라는 지명은 술이 샘솟는다는 주천석(酒泉石)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망산 밑에는 주천이라는 샘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 판운리(板雲里)
원주군 좌변면(左邊面)에 딸린 지역이었으나 1905년(고종 42)에 영월군에 귀속되었다. 좌변면이란 주천강을 중심으로 원주쪽에서 좌측을 좌변면, 우측을 우변면이라 하였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구름과 안개가 넓게 끼이는 곳이므로 '널운' 또는 '너룬'이라 했으나 일제 시대인 1914년에 유목정, 삼거리, 밤뒤, 새벌, 둔전동, 가마동, 장충리 등의 행정구역을 병합하면서 '판운리'라 부르게 되었다. 판운리는 4개 행정리에 188가구 672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콩, 옥수수 등의 밭농사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주천면 지명 자세히보기
① 주천면의 망산(望山) 밑 주천 강변에 있는 ‘주천’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예전 한때 술이 나왔던 샘이라고 한다. 인근 마을에 부인을 잃고 상심하여 마냥 술타령만 일삼는 사람이 있었다. 돈이 없는데도 아이들이게 술을 받아오라고 하여 자식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술을 받아오라고 하자 막내아이는 할 수 없이 이 샘물을 퍼담아 갖다 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맛좋게 마시고서 더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샘물을 퍼다가 드렸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는 돈이 없는데도 아이들이 거침없이 술을 가져오는 것이 의아해서 한번은 몰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샘물을 퍼오고, 그것을 마시니 술이 아닌가. 이러한 조화를 보게 된 아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술을 끊고 가정을 잘 돌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부터는 술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② 옛날 주천에는 한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은 항시 술이 솟아오르고 있었다고 해서 주천(酒泉)이라 불리웠다. 그런데 이 우물은 신기하게 신분이 낮은 상놈이 마시면 탁주로 변하고 신분이 높은 양반이 마시면 약주로 변했다고 한다.
어느 날 낮은 신분이었던 한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 후 그는 고향인 주천으로 내려와 우물 앞에 서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도 이제는 신분이 높아졌으니 내가 이 우물을 뜨면 그 물은 약주로 변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그 우물을 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젊은이의 신분은 상승되었는데도 물은 약주가 아닌 탁주였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몇 번을 거듭해서 퍼 보았으나 계속 탁주만 나왔다. 화가 난 이 젊은이는 커다란 돌맹이를 그 우물안으로 던졌다. 그 후 그 우물은 젊은이가 던진 커다란 돌맹이에 막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메말라 버렸다고 한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금산 밑에 한 무덤과 의호총이란 비석이 서 있다.
비석 표면은 의호총(義虎塚)이라 하고, 뒤편에는 「1743년 계해 월에 순영(巡營 : 조선조 정3품의 외관직으로 각도 관찰사를 보직하던 관원)의 분부에 의하여 세웠으며, 금처사 사하가 1720년에 국상을 당하여 호랑이와 같이 3년상을 마쳤는데, 그 호랑이가 3일후에 죽었기 때문이다」는 뜻의 한문이 새겨져있다. 이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금산 밑에 살던 금사하라는 이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후 어머니마저 병이 나서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봉양하여 왔는데, 갑자기 위중하므로 급히 약을 지어와야 했다. 약방은 강 건너 주천에 있어서 배를 타고 건너야만 했다. 마침 장마가 져서 배를 붙이지 못하자 금효자는 초조하고 황급하여 어쩔줄을 몰라 울면서 강가를 오르내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는 동안 해는 져서 어두운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금효자가 급한 마음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여 강을 건너가서 약을 지어다 드려야 하겠으니 강을 건네주지 않겠느냐.” 하며 하소연을 하니, 그 호랑이가 앞발을 숙이며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기에 금효자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고 약방에서 약을 지어와 그 약으로 모친의 병을 낫게 하였다.
금효자는 또 아버지의 산소에서 3년간 시묘를 살았는데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산골묘소에서 혼자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전에 강을 건네주던 호랑이가 동무하여 주었다. 그는 호랑이와 친숙하여져서 한집안 같이 의지하고 지냈다. 금효자는 아버지의 3년 시묘가 끝나기도 전인 1720년에 숙종대왕이 승하하여 국상을 맞게 되었다.
충성심이 남다른 그는 베옷입고 방갓 쓰고 매일 망산(주천의 남쪽 강건너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서쪽 궁중을 향해 망배하며 3년상을 치렀는데 그 호랑이도 함께 망배하며 행동을 같이 하였다. 국상을 3년을 마친지 3일후에 그 호랑이는 금효자집 마당에 와서 엎드려 죽었다. 금효자는 죽어가는 호랑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마침내 호랑이가 죽자 부친의 산소 옆에 묻어주었다. 그 후 그가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호랑이가 꿈에 나타나 일러주므로 가문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1743년 강원도 순영 중군이 이곳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호랑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 주라고 명하여 호랑이가 죽은지 23년만에 이 비석이 서게 되었다.
또 그 후손들은 계속해서 호랑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금산을 중심으로 사방 10리를 금처사에게 사패전(賜牌田)으로 하사하여 호랑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약 120년전쯤에 욕심많은 강원감사가 와서 그 사패전을 몰수하여 팔아버린 후부터는 호랑이 제사도 끊기고 말았다고 전한다.
심명보(沈明輔)
출생지 /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영월출신 전 국회의원(1935~1994)
언론인,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격동기에 의정활동을 폈으며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1935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태어나 주천 중학교와 주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주천농고 재학시절 주위에서 수재라는 얘기를 들었으며 졸업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법조인으로서의 꿈을 펼치기 위해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졸업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지방부장, 주월특파원, 종합편집부장, 일간스포츠레저부장, 한국일보 체육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에 올랐다.
특히 월남전이 한창일때 주월특파원으로 활약하다가 전두환(全斗煥) ·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후일 신군부(新軍部) 등장과 함께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1987년 한국일보 편집국장 재직때 10 · 26사태후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측으로부터 정계진출 권유를 받고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81년 3월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영월 · 평창 · 정선지구에 민정당 공천후보로 출마 당선되었으며 곧 민주정의당 원내부총무에 기용되어 중앙정치무대의 발판을 넓혔다.
이어 1985년 2월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5만6,932표를 얻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재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제12대국회 재임중에는 2년3개월이라는 최장수 대변인(민정당)을 맡아 언론인 출신다운 탁월한 언로(言路)를 활용하여 야당과의 대화와 협상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88년 소선거구제로 바뀌어 치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영월, 평창 선거구에서 무난히 당선되어 3선의원으로서 국회내에서 중진으로 성장했다.
그는 1992년 제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이종찬후보를 지지, 선거본부장을 맡아 민정계 8인방으로 활약했다.
그는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민정당총재 비서실장, 중앙집행위원,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권력의 핵심부와 호흡을 같이 하는 정치인으로 성장, 지역개발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현안사업은 영월읍중앙시장 배수펌프장, 영월읍 철도이설사업, 평창지역 농공단지 유치, 평창~정선간 비행지 재 · 멧둔재터널 완공, 영월전문대학(현 세경대학 전신)유치등 지역주민의 숙원을 해결하는 열정을 보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되어 4선의원으로서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활약중 그해 가을 지병을 얻어 2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4년 5월 타계했다.
그의 일생은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경동기에 의정활동을 폈으며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초등학교 : 주천초등학교
중학교 : 주천중학교
고등학교 : 주천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