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원균과 이순신과 함께 옥포와 합포 해전에 참전하여 싸웠으며, 미조항 싸움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헌신으로 조선의 안전을 위해 힘썼던 무신입니다.
►성별 : 남 ►시대 : 조선 중기 ►출생~사망 : 1555년 ~ 1592년 ►출생지 : 춘천 서면 당산리(棠山里, 현재 방동) ►본관 : 청주(淸州) ►주요업적 : | ![]() |
충장공 한백록은 조선조 명종 10년(1555)에 춘천 서면 당산리(현재의 방동)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수지라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영리해서 경전과 병서를 읽는 데 능했고, 어른이 되면서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읽으며 무인(무예가, 무술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26세 때에는 알성무과에 급제하였는데, 그 때는 북쪽 변경에서는 오랑캐들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 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으며, 나라 안에서는 붕당정치로 국가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한백록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무인의 길을 택하고, 알성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습니다. 그 후 종6품직인 진잠현감으로 임명되었고, 잠업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통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1590년에는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고, 귀국한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서가 서로 달라 혼란이 생겼습니다. 그 때 한백록은 조정으로부터 재간과 굳센 힘이 있다는 평판을 받아 남쪽 지방의 중요한 지세포만호(지세포만 거주지역)를 맡게 되었습니다.
한백록은 지세포만호, 경상우수사, 부산진첨사에서 역임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는데, 한백록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만들어 대비를 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지세포만호에서 출동하여 옥포와 합포 해전에 참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 수군이 불리한 상태였지만, 한백록의 용맹한 싸움과 역투로 사기를 끌어올려 대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전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한백록은 미조항 싸움에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겨우 38세였어요. '선조실록' 25년 8월 신해조에서는 “만호 한백록의 전후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장군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쓰여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백록은 충장공으로 불리며, 뛰어난 무인으로서 전쟁에서 힘썼고, 그의 행동은 조선 수군과 일본군에게 모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백록 장군은 '여지도서(지역지도와 인물 기록을 담은 책)'인 '강원도 춘천현 인물조'에 충신으로 유일하게 정표되어 있습니다. 그의 공로는 인정받아 선조 38년에 선무원종공신이등(공으로 책록된 사람 중 2등급)으로 책록되었으며, 영조 27년에 정려(목판 또는 동판에 새기는 표)가 내려지고, 순조 8년에 자헌대부병조판서(군사 관련 고위 관직)에 증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조 11년 6월 19일에는 '충장(충성하고 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증시(묘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순조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한백록 장군은 배위인인(정부인) 창녕 성씨와 결혼하여 아들 우천을 두었고, 그의 자손들도 춘천에서 중요한 충신으로 추모받았습니다.
충장공 한백록의 묘역과 정려각은 춘천시 서면 금산리와 방동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백록 장군은 임진왜란 7년전쟁에서 조선쪽으로 승기를 돌릴 수 있도록 옥포해전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공로와 충성정신은 후세에도 잊혀지지 않고 춘천출신으로서 여전히 추모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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