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헌종 8)∼1922. 춘천 남면 발산리 출신으로 자는 사원(士源)이요, 호는 오천(午川)이다. 을미개혁의 변복령과 민비시해인 을미사변 그리고 단발령 공포로 민심이 동요하고 국수보복을 위한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봉기하자, 1896년 1월 의병장 이소응의 춘천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때 유중락은 유중악·유봉석(柳鳳錫)·유홍석(柳弘錫)등과 합께 춘천의병진에 가담하여 가평일대에서 접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1907년 8월 고종퇴위에 이어 한국군대의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유홍석의 춘천의병에 참가하여 가평의 주길리(珠吉里)와 춘천의 진병산 전투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유홍석이 부상당하고 유영석이 전사하는 등 격전을 치렀으나 패전하였다. 이에 유중락은 은신하면서 후진교육에 전력하다가 1922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