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석

                                                                                                                                                                                                                                                           

1841(현종 7)∼ 1913. 한말의병장으로 춘천 남면 가정리 출신, 본관은 고흥, 일명 홍석(鴻錫), 자는 효백(孝伯), 호는 외당(畏堂), 유인석의 재종형이다. 일찍이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에게 수학하였다.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1896년 1월 유중악·유중락·유봉석·김경달 등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춘천의병을 일으켰다. 그후 1896년 2월 3일(음 12. 20.) 제천의진(호좌의진)이 형성되자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서무를 관장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병들이 정부의 해산책에 회유되어 사기저하와 이탈자가 속출하자 '고병정가'(告兵丁歌 : 210首)를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동년 8월 28일(음 7. 20.) 제천의진이 서북대행군 할 때 초산(楚山)을 거쳐 유인석과 함께 만주로 들어갔다가, 1897년 그와 더불어 환국한 후 춘천 가정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5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유인석과 함께 의거할 것을 논의하였고, 1907년 고종의 퇴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유중악·유영석·유제곤·박선명·박화지 등과 함께 의병 600여명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때 군량과 탄약 등 군자금이 부족하여 유중악이 농우를 내고, 주민들이 적극 협력하여 무기제조장을 설치하고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패하였다. 그 후 1910년 치욕적인 한일병탄으로 1911년 종족과 사우들과 함께 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갔다가 다시 관전현(寬甸縣)으로 옮겨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다가, 73세가 되던 1913년 요동 회인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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