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강현면(降峴面), 서쪽으로 서면(西面), 남동쪽으로 손양면(巽陽面)에 접하고, 동쪽으로 동해와 맞닿아 있다. 1397년(조선 태조 6)부터 부내면(府內面)이라 불려오다가 1894년(고종 31)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고, 1917년 부남면(部南面)과 위산면(位山面)을 편입하여 양양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읍으로 승격되어 양양군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출처: 양양군청>
3․1운동 당시 돌아가신 열 두 분의 열사와 위패와 항일운동에 앞장서신 18인의 의사와 위패가 있는 곳은 충렬사거든. 신라시대에 성황사를 건립하고, 전시에 외부세력에 항거하다가 돌아가신 영령을 모시고, 부국강병과 민생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가 있는데, 성황제를 하는 기간은 봄과 가을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단오절을 시작으로 성황제를 지냈고, 일제시대에는 문화 말살정책으로 금지시켰었고. 광복절부터 미신이라 하여 강제 중지시켰지. 6․25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단다. 1960년대 군행리의 군민들로 인해 성황사를 다시 건립했어. 그 후로 매년 단오절과 현산문화제때 성황제를 지내고 있고, 매년 정월에는 길일날 성황제를 지내고 있지. 군행리에는 나라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분들이 많기에 이러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지. (양양읍 군행리, 1999. 11. 21. / 최동근, 남. 71)
성황사 관련 블로그연창리 주변으로 해서 전체적으로 용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그중 연창리는 용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데. 연창리에 가보면 우물 두 개가 용의 두 눈을 나타내는데, 그 중 하나는 양수(남자)이고, 나머지 하나는 음수(여자)를 나타냈어. 양수에 있는 우물은 물이 맑고 음수의 우물은 물이 탁했었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두 우물이 있는 물을 떠서 비교해 보면 둘 다 깨끗하다고 해. 그런데 음수는 도로가 생김으로 인해 사라져 버리고 상 동네 우물, 용의 오른쪽 눈(양수)만이 존재하고 있고, 그 양수는 깊이가 약 3~5m 정도고 30년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 우물을 먹었다고 하지. 그 음수와 양수의 사이에는 용의 이마와 코를 나타내는 부위가 있는데 지금은 가정집이 들어서 있고, 그 가정집 밑에 쪽에는 연당(연못)이 있어서 용의 입이라고 불리었지. 하지만 그곳은 90년대 초 택지조성으로 인해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현재 양양터미널 쪽은 용의 꼬리로써 꼬리근처에 배꼽이 있었는데 그 배꼽이 바로 옛날에 성황당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었다고 하지. (양양읍 연창리, 1999. 12. 3. / 김정환, 남. 59)
포월리는 시내에서 버스로 약 10분 거리로 자연부락명은 ‘갯다리’이었지. 옛날에는 갯벌이 안쪽에서 들어와 있었고 달이 마을 앞 개울이 비치는 것이 물에 떠 있는 듯하다고 그렇게 이름이 붙었는데 58년에 수해가 나서 개울은 없어지고 양양 바깥으로 제방을 쌓았고, 행정명의 포월리는 갯다리의 한문 번역으로 개 포(浦) 자에 달 월(月) 자가 쓰였지. 3반까지 있는데 옷말, 음지말, 양지말로 나뉘며 10여년 전 음지말 옆에 마을이 형성되어 새말이라 불린단다. 주로 강릉 김씨가 많이 살고 논농사를 지으며 서낭은 있으나 따로 모시지는 않아. (양양읍 포월리, 1989. 11. 11. / 최인수, 남. 64)
요기 올라가면 사천이라는 동네가 있어. 거기에 강릉서 들어온 강릉 최씨인 양반이, 돈재공이라는 정자 입자 할아버지가 살았어요. 저 쪽에 가면 도적동이라는 고을이 있어. 길 도(道)자, 쌓을 적(積)자 도적동인데 거기에는 옛날에 신을 모시는 귀각집 같은 곳이 있었어. 거기에 귀신이 있으니까 그 곳을 지나가려면 아무리 높은 사람이 말을 타고 가더라도 말에서 내려 가지고 걸어서 그 앞을 지나가야지 그냥 말을 타고 가면 그 귀신이 말이고 뭐고 다 잡아 죽인단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돈재공 그 할아버지가 술이 얼큰하게 취해 가지고 말을 타고 그 곳을 지나가자 사람들이
“할아버지 이 앞으로 말을 타고 가면 큰일나요. 할아버지,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지 여기에 귀신이 있으니까 말을 타고는 못 가요.”하고 말렸지. 그러나 할아버지는
“무슨 소릴 하느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
하면서 그대로 타고 갔어.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말에서 내리더니 그 비각을 발로 차고 돌로 때려부수면서
“이 망할 놈의 요신아. 네까짓 게 어찌 감히 가고 오는 사람을 괴롭히는냐.”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대. 그러자 과연 타고 가던 그 말의 다리 하나가 뚝 부러지더래.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말한테 계속 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세 다리밖에 안 되는 말을 그냥 타고 가려고 했지. 그러나 말이 세 다리로 걸으려 해도 가지 못하니까 그 할아버지는 말에서 다시 내려와 비각을 온통 부셔버리니 이상하게도 말이 세 다리만으로 가더래.
그 다음날에 할아버지가 또 와서 그 요신의 비각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는데 그 후로 다시는 귀신이 안 나타났대. 이래서 귀각집의 귀신을 최정입(돈재공) 할아버지가 없애버린 거지. (양양읍 조산리, 1995. 6. 4. / 최돈식, 남. 72)
옛날 얘기나 한 마디 하것소. 옛날에 옛날에 인제 양반은 하나기 마누라가 둘이여. 마누라가 둘 인기 하두 싸움을 하드래. 싸움을 한기 싸움을 해 싸사서 인제 그 친구가 이러드래. “자네 그러지 말고 옷을 방안에다 옷을 싹 벗어놓고는 우리집에 오라”고.
그린기 인제 친구집에 노루가 있대. 그래서 우리 집에 오라구. 그래서 하루 저녁에 그 집에 방안에다 사람 그이 인저 할아버지 있던 방에다 옷을 싹 벗어놓고는 그 친구집에 가니 아침에 인제 자고 나서 댁네가 인제 아침해 가지구 차려가지구 들어가니 영감이 없고는, 아 노루가 뛰며 이러드래.
그래서 그 인제 할아버지는 옷을 벗어놓고는 친구 집에 가니 그 친구의 노루 키우는 걸 이 방에다 갖다놨대. 이 방에다 갖다 놨어. 갖다 놔서 아유 사람은 없고 “어머니 우리 방에 우리 사랑방에는 뭔 노루가 저렇게 뛴다”구 이러니께네 시어머니가 하는 말씀이 “아이그, 느가 그렇게 싸움을 하면 내가 노루가 된다 그러더이 아범이 노루가 됐구나. 이거 큰일이다. 어떡하겠느냐”고 그리지.
그래가지고 저, 저 두 참 저저. 마누라가 둘이니 두 동서끼리 싸움을 아이하고 그 오래오래 잘살고 시어머니가 참 먼저 돌아가시고 저 그야 말 따나 참 좋은 곳으로 가셨대. 그래서 그 옛날 얘기도 전에 할아버지한테 들은걸 내가 이거를 기억을 해 놨지. 뭐 서방 옛날 노래가 얘기가 그렇게 있나? 하두 싸움을 해싸서 그렇게 다 쐭였대(속였대). (양양읍 감곡리, 1993. 6. 24. / 박길만, 여. 75)
옛날에 인제 밤질(밤길)을 가는데 가는데. 오막살이 집에 불이 아니, 오막살이가 아니라 큰 기와집인데 들어가니 불이 반들반들 한기. 아주 들어가니 마당에 들어서니 고래등같은 지와집인데 주인이 간간하드래.
“아, 이 집이 어떻게 돼 집은 좋은데 주인이 다 없나” 이렇게 하고. 그래서 “이 이렇게 집이 비었나” 하고서내 가만히 가서 인제 들어앉아 있으니 불을 키 놓고 인제 주인이 없더래. 그 들어앉으니 뭐이 문소리가 ‘쿵’하고 나더래. 그래 가만히 있으니 아주 문이 열리매 그러더만에 참 들어오는 기 사람이 피 옷이 된 게 들어 오드래.
인제 그 손님이 “이기 짐승이나 저 사람이나 사람이 어째 이렇게 피 옷이 된 기 이기 커다한 제집엘 들어오느냐”고 이렇게 “그린 게 아이라 내가 이 집에서 살았는데 날 칼로 찔러서 짠지 단지에다 가꿀로(거꾸로) 머릴 박아서 이 집의 새가 돼서 이 집사람을 다 잡아 없앴다”고 그러드래. “내가 이 집을 망했다. 날 칼로 찔러서 짠지 단지에 꺼꿀로 놓었으니 내가 아주 이 집을 죄를 줘서 망했다”구 그러드래. 거 손님을 그 날 밤에 잘 재워서 “참 잘자고 가라” 그러구.
나가는걸 뒤로 따라나가니 짐치속으로 들어 가더라잖아. 짐치독이 귀신이지. 죽어서 칼로 찔러 넣었으니 그기 귀신이 새가 돼서 그기 집안 식구를 참 아주 읎앴겠지 뭐. 그야 말따나 참 다 읎어지구는 그 집만 남었지. 그러니 인제 불이 있으니 지나가는 손님이 보고 들어가서 그 날 밤에 그렇게 나타나드래. (양양읍 감곡리, 1993. 6. 24. / 박길만, 여. 75)
이 귀가. 귀가 하나 없어요. 이짝 귀가 없어요. 이게 거북바운데 이게 터가 굉장히 깊었거든요. 이 집에 이 집터가 자리가 좋대요. 옛날에 하도 손님이 많이 와가지고 그러니까 손님이 하도 오니까 남자들은 괜찮은데 여자들이 손님 시중 할려니까 중이 오니까 “우리 집에 어떻게 손님 좀 아니 오게 해 줄 수 없냐”구. 하도 힘드니까 여자들이 힘들게 아니오. 손님이 많이 오니까 여자들이 괜히 스님이 가면서 “그렇다면 방식을 하나 알켜준다”고. “이짝 거북마을 귀를 하나 띠면은 손님이 안온다” 그 이 아주머니가 누구한테 시켜 가지고 이 귀를 하나 띠었다고 그래요.
그냥 옛날에 그러구 손님이 그전에 살던 분이 다 없고 손님이 덜온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이 귀가 하나 없다구. 거기 아주 거북 바위가 귀도 다 있었고 그랬는데 거기 집이 하나 있잖아요. 그 집이 옛날에 아주 잘 살았다고요. 이 마을에서 제일 잘 살았다고.
그런데 어떠한 중이 하나 가면서 그 집에서 시주를 달라고 하니 그 집에서 시주를 조금 줬다고. 시주를 조금 주니까 심술 쓰느라고 이 집에 거북바우 머리를 잘라내면 바우가 거북 형태가 없어졌어요. 그래 가지고 그 집이 쫄라당 망해 가지고 갔다고. 말하자면 그 전설은 돌 중이, 중이라고 하면 기도를 해서 다른 사람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우리가 중으로 보는데, 반대로 남을 못살게 하는 심술을 쓴다. 그렇게 보면 될 거요. 그래서 거북바우가 아주 잘 생겼던 바운데 와서 망궈놨다구.
그래서 집은 망해 가지고 갔어요. 그래 딴 사람이 와 산다구. (양양읍 화일리, 1993. 6. 23. / 박용운, 여. 74)
한 사람이 말이야, 한 사람이 참, 아버지가 잘 살어. 잘 사는데 한 20된 사람이 옛날엔 뭐, 그저 농사짓지 않으면 장사하고 이래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이 이제 아버지 농사를 하는데 참, 잘 사는데 농사를 하기 싫어서 뭔 장사를 좀 하고 수워서(싶어서)돈, 돈 50냥이라고 해서,
“오십 냥을 주면 지가 어딜 가서 장사를 해서 오십 냥을 뭐, 참, 그 오십 냥으로 가지(가져)가서 돈을 이제 많이 벌겠습니다.”
이랬단 말이야. 그래니까 아버지가 오십 냥을 해 주었어. 해 주어서 그 돈을 가지구서 이제 오는 기라. 장사하러 가는 기라. 서울로 가는 기라. 근데 배를 탔단 말이야. 배를 타는데, 배를 타고 보니까 한 사람이 자라를 자라 큰 못(뭣)에다 담가주고 가드래. 그리니 자라가 흐물흐물하지. 그래서 이래 보니깨는 이 자라가 별루 그 사람을 보고선 마치 우는 것처럼 말야 이래거든 그래서,
“이 자라가 이거 한 마린데 인제 오십 마리니깨 한 냥씩이지. 이래면 그기 엄청나게 비싼 자라라. 근데 크고 작은 것 가려 가지고 이렇게 팔 텐데.”
“그 오십 마립니다.” 그래면
“한 마리에 그래면 얼마씩입니까.” 하니깨는,
“한 냥씩.” 이라 그래거든. 그러니까 오십 냥이지. 오십마리니 그래니까,
“아, 그래면 저 자라를 내가 사겠습니다.”
그래 오십 냥을 주고 샀아. 하니 이 사람은 뭐, 아주 좋아서 말야 오십 냥을 큰 것 잰 것 헤아리지도 않고 오십 냥을 사 가지고 그리 그 자리서 마커(전부) 인제 바다다 넣고는 건네 갔는데, 영감은 말야 그 자라를 팔구선 그 돈 받아 오다가서 배가 폭선이 돼서 고만 빠져서 고만 죽어버렸어. 죽으니깨 그만 돈도 빠지고 사람도 물에 빠지고 이래 됐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집에서 하루 방에 있더니만 하늘이 어루스름한데 말야, 그 검은 옷 입을 똑 같이 입은 청년들이 오십 명이 왔드래. 오십 명이 와 가지고 여 돈 뭉테기를 갖다가 아버질 드리드래. 드리믄서,
“아드님이 장사하러 가서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아서 며칠 계시다가 오신다고 이 돈을 아버질 되 갖다 드리라고 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니까 돈 뭉테기를 자기가 준 돈 뭉태기를 고냥 가지고 야 당장 젖어 드래.
그래서, “이기(이것이) 젖었구나?” 이래니깐, “예 제가 오다가선 물에 떨궈 뜨려 젖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 널어서 말리고 그 얼마를 기다려도 안 와. 안 와서 이 아들을 장사를 하라고 도대체 오십 냥을 맨들어 주었는데, 장사도 못하고 빈손으로 가게 됐네. 아들이 참을 수 없어서 얼매를 있다 왔어. 있다가 빈손으로 할 수 없이 집에는 왔사. 오니께,
“너 어째 그냥 왔느냐?” 이래니깐 얘길 했거든,
“그 제가 가다가서 자라가 그렇게 배에다 싣고 가는데 오십 마린데 한 마리에 한 냥씩 한다고 하는 거 그 자라가 저를 보고 우는 것 같애서 글 다 사서 물을 넣고 왔습니다.” 그래니까 아버지가,
“아, 그 돈이 나한테 왔단 말이야. 그 자라가 그게 참, 다 말이야 살아 가지고 그 은혜를 그래서 자라가 그렇게 은혜를 갚더랍니다. 은혜를 갚고 그기 용궁 용왕의 아들이랍니다. 그게 용왕의 아들이 인간 구경하러 나왔다가 그놈한테 몽땅 잽혀 가지구선 죽을 텐데, 그 청년이 살궈줘서 그래서 검은 옷 입은, 자라가 검잖아. 검은 옷 입은 청년 오십 명이 그 돈을 그냥 갖다 주드래. 그래서 자라가 이제 은혜를 갚았다. 은혜를 갚은 얘기야. (양양읍 남문리, 1981. 9. 23. / 정연옥, 여. 87)
양양향교는 고려 충혜왕 때 창건된 교육시설로 현유(賢儒)[1] 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역 주민의 교육과 교화가 주요 역할이다.
양양향교는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2년에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가 신축되어 유지되고 있다.
양양향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과거 많은 국보급 서화와 조각 등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보존되어 왔으나 6.25 전쟁 때 대부분에 불에 타 사라졌다.
양양시장은 오랜기간 양양의 전통적인 먹거리, 볼거리, 특산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양양시장은 상설시장으로 유지되지만, 오일장 체제도 있어 매월 끝자리가 4일, 9일로 끝나는 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많은 먹거리들이 있지만 특히 양양의 특산물인 송이로 만든 송이닭강정이 유명하다.
양양남대천은 영동지역의 하천 가운데 가장 맑고 긴 강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양군 현북면 인근의 오대산 부연동계곡, 두로봉 등에서 발원하여 삼산리, 법수치리, 어성전리에서 큰 물줄기를 이루어 흐른다. 이후 양양읍과 손양면에서 동해안으로 흘러간다.
이 하천의 상류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물이 맑다는 법수치리 계곡이 있으며, 양양 남대천은 한국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곳으로 매년 11월 중순 쯤이면 하천으로 돌아오는 많은 연어를 볼 수 있다.
양양군 양양읍 송암리에 위치한 공원으로 2008년 남대천변 숲 가꾸기 근로자들이 사업 부산물로 장승, 시소, 그네, 양양의 상징물을 직접 제작해 이곳에 설치하면서 송이 조각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에서는 남대천의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목으로 만든 독특한 조형물들을 감상하기 좋다. 화장실, 주차장, 운동기구, 축구골대 등 편의시설과 체육시설이 준비되어 있어 동호회 체육활동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으며, 가족단위와 어린이들의 소풍 장소로도 유명하다.
초등학교 : 양양초등학교, 조산초등학교
중학교 : 양양중학교
고등학교 : 양양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