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 춘천 신북읍 출신, 1939년 춘천중학교(춘천고등보통학교의 개명) 재학 중에 교내 독서회에 참가하여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춘중(春中)의 독서회는 조직의형성은 없었으나 독서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심화시켜갔다. 1938년 가을에 항일학생결사인 춘천고보의 상록회(常綠會)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어 전 회원이 검거된 후, 춘중학생들은 시내의 북성당(北星堂) 서점에서 민족의식이 담긴 서적(흙, 상록수,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을 구독하고 독후감을 교환 토론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고자 자생적으로 형성된 모임체가 독서회였다. 특히 뜻있는 학생들은 이란의 부친인 이림수(李林洙, 關東病院 경영)가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여운형과 독립군 후원관계로 친교를 맺고 있어 여운형이 춘천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때마다 학생들이 방문하여 인도의 '간디'이야기, 상해임시정부의 활동, 중일전쟁의 전망, 세계정세의 동향과 조선인 학생의 진로 등 항일의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러던 중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 김화)·원후정(元厚貞, 횡성)·김영근(金榮根, 회양)·박영한(朴泳漢)·권혁민(權赫民, 평강)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년 3월 10일(일본육군기념일) 모의시가전을 벌일 때 일본인 학생과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일본인 교관(大町소위)이 고발함으로써 동년 3월 23일 춘천경찰서 형사들이 관련학생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독서운동이 탄로되었다. 이로 인하여 체포된 그는 7월 검찰(춘천지청)에 송치되었고, 동년 11월 1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2년 3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 장기 3년형의 부정기형(不定期刑) 선고를 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0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