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철종 3)∼1930. 한말의병대장으로 춘천 남면 하방곡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일명 의신(宜愼)·직신(直愼),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제(習齊)·사정거사(思靖居士)이다. 김평묵·유중교에게 사사(師事)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인품이 고매하여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유중악·유중락·유봉석·유홍석·이면수·이진응 등 유생과 정인회·박현성 등 농상민(農商民) 그리고 성익현 등 춘천진위대 일부병사와 포수 4백여명이 합세한 1천여명의 군중들이 춘천관찰부 관아(官衙)를 습격 점령하고, 탐관오리 민두호의 생사당을 파괴하여 의세가 충천하였으며, 동년 1월 20일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춘천의진의 이소응은 척사위정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을 왜노(倭奴)로 규정하고 격문을 각지에 보내 함께 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처단하여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던 춘천의진은 관군과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게 되었다. 이에 이소응은 유인석의 제천의진(호좌의병진),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으로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후 이소응은 한일병탄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유홍석 등 종족(宗族)·사우(士友)들과 같이 요동으로 망명하여 유인석·유홍석과 합께 본토진공의 방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1930년 4월 23일(음 3. 25.) 만주 봉천성 강평현(奉天省 康平縣)에서 79세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