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면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사현면의 일부와 도문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강현면이라 개정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후 북한치하에 있다가 1954년 10월 21일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의 대한민국에 복귀되었으며, 당초에는 강선정(신선이 내려왔음을 기념하는 정자)의 이름을 따서 강선면이라 하였으며, 후에 사현(모래고개)면을 통합하여 강선의 “강”자와 사현의 “현”자를 통하여 강현면이라 칭하였다 한다.
특히 긴백사장과 해송으로 유명한 전국제일의 낙산해수욕장과 설악해수욕장, 정암해수욕장, 물치해수욕장은 여름피서지로 유명하며, 천년고찰 낙산사와 진전사 등 명승고적이 많아 전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는 곳이다.
<출처: 양양군청>
강선리 뒤에 고개가 있는데 거기에 이 서방네 식구들이 묘자리를 두 개 썼어. 묘자리가 좋아서 그런지 그 후 이 서방네 집안에서 힘 좋은 장사가 하나 태어났어. 그 때가 제정 때였는데 일본인들이 장사가 나온 이유가 묘자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강제로 묘를 파냈어. 그러자 그 묘지 속에서 학 두 마리가 나와서 속초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날아갔어. 그 후로 이 서방네는 별로 큰 경사가 생기지 않았어. (강현면 강선리, 1999. 11. 11. / 이승우, 남. 85)
옛날에 성황제 지낼 때 쓸 지성을 몰래 먹은 마을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어요.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영문을 모르니까 횃불을 들고 이 사람을 찾으러 다녔어요. 그렇게 찾아 헤매다가 산속에서 없어진 사람의 시체를 찾았는데 그 뒤에 호랑이가 한 마리 앉아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무서우니까 시체 가까이 가지를 못했는데 마을 사람 중에 키 작은 한 늙은이가 사람을 깔고 앉은 호랑이에게 호통을 쳤더니 호랑이가 도망갔어요. 그렇게 해서 죽은 마을 사람의 시체를 찾아올 수 있었어요. 나중에 마을 사람이 알고 봤더니 이 사람이 몰래 지성을 훔쳐먹어 이렇게 변을 당한 거래요. (강현면 강선리, 1999. 11. 11. / 이문옥, 여. 87)
예전에 늙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계속 밖으로만 나돌았어요. 그러다가 설날이 가까워지자 할아버지가 집에 들어가려고 마당에 들어섰는데 방안에서 할머니는 바람에 떨리고 있는 창호지를 보고 “문풍지야 울지 마라. 내일 모레면 죽는다”고 혼자 말을 했지.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도망을 쳤어요. 왜냐면 할아버지 자신의 이름이 문풍지였기 때문에 착각을 한 거지. (강현면 강선리, 1999. 11. 11. / 이명옥, 여. 61)
옛날 옛날에 옛날얘기로 이제 한사람이 사는데 부자가 살았데. 아주 부자가 살았는데. 도사중이 왔데. “도사중이 와서 동냥 좀 주시오. 시주 좀 하시오” 기리니까 이 영감이 곰 같은 영감이 마구를 치면서 “줄게 뭐 있어. 똥 한 삽 줘야지.” 똥 한 삽 퍽 퍼서 주니까 도사중이 얼른 받더래. 얼른 받아 가지고 가더래. 근데 메눌아기가 쌀을 퍼가지고 나와서 “도사님 이거 가지고선 가시오” 드리니까루 중이 안 받아 가지고 가더래. 그래 저만큼 나가다 하는 말이, 도사중이 한다는 말이, “아가씨는 이 다음에 메치날(며칠날) 여기서 노상벼락을 치고 비가 쏟아 질테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서는 아주 나오라”고 그러데.
근데 참 천둥을 치면 벼락이 치는데 말도 못하겠더래. 기리니께 이 처녀가 쫓겨나가다선 돌아다 보지 말라는데 집이 됐나 이렇게 휘뜩 돌아다 본께.
이 여자가 그만 나가다 저 중이 돌아다 그렇게 됐어 바우가 됐어. 그리고 거기 뭐 또갑소라는 데가 그럼 저 귀에 아래 또갑소, 위 또갑소. 아래 또갑소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랬지. 다 떠내려가서 집이 바다로 떠내려갔는데 장단지만 요렇게 동동 떠내려 가드래. 소가 인제 대 메워주고선 없어. 지금은 없지. 또갑소에 없어 그냥 맹물 조금해요. 그 깊은 소가 다 없어지고 싹 밀었거든. 병자년 그래 옛날에 우리 할머니들이 그렇게 말했어. 그래 중이 와서 그런 걸. (강현면 강선리, 1999. 6. 29. / 김매월, 여. 81)
경주 이씨네가 어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저 파명당이라고 설악산 가는 고개 노루목이라고 있거던. 거기 뫼 산자리가 좋아 가지고 거기다 갖다 썼데. 그 썬 후로 그 자손 어느 자손이 한 양반 장사가 되어 가지고 명주를 명주 한 필이 이 바늘, 우리 옛날 우리들은 바느질 자루를 썼거든. 바느질 자루라는 게 길이가 마흔자를, 사십자를 한 필이라고 했거든. 그거를 머리에 이렇게 다 감어. 칭칭 감고는 저 가물치까지 내려 꿰도 그 끝이 땅에 안 닿더래.
그 사람이 장사가 되어서 일본 사람들이 심사할 적에 아 이런 장사가 났으니까 큰일났다고 안 된다고 이래가지고 거기 가서 묘를 파 뒤집었거던. 이 묘를 쓰고 그런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묘를 파내야 한다고. 그 묘를 파내니까 거기서 학이 두 마리가 하얀 학이 두 마리가 나오더니, 저 속초에 속초 부월리에서 그랬어. 속초바다에 산이 있잖아 섬 있잖아. 거기 가서 학이 두 마리 앉드래. 그래서 그 집안에서 “하이고 잘못 됐다”고 “이걸 파내지 말아야 하는 건데 잘 못 됐다”고 도로 파묻고 장사도 다 없어졌지. 이랬는데 그 산 자리가 좋아 가지고 저 속초 있는 사람이 그 걸 밤에 가만히 자기네 시체를 거기에다 갔다가 썼거든. 썼는데 그거를 집안에서 알고는 아 속초경찰서로 돌아 다니면서 그 사람을 찾아 가지고 도로 파내 가라고 해서 파 내가고 지금 빈자리가 이렇게 아마 복만 있는지. 거기를 또 여니 할아버지가 거기 가셨는지 그러니까 일 년에 한 번 씩 벌초, 벌초 하러가 안에는 아무 것도 없지. 거기 있거든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이래 놨겠지. 혼은 다 나갔는데 시체 삭은 건 있겠지. 그 이후로는 장사 같은 건 산을 파내도 몇 천년이 돼야지, 그 산이 음기가 도로 선데. 몇 천년이 지나면 다시 음기가 돋아 그 다음에 그 속초사람이 거기다 묘 갖다 썬거 아주 그 놈을 밝힐려고 속초를 드나들었는지 그래 가지고 파 내가게 했잖아. 그 사람이 워낙 힘이 쌔가지고 그 긴 것도 땅에 안 닿고 그렇게 빨리 달렸나 보지. (강현면 강선리, 1999. 6. 29. / 김매월, 여. 81. 김광춘, 여. 71)
물치리라는 마을하고 강선리라는 마을 사이에 제일 높은 봉이 ‘신선봉’이라고 그럽니다. 옛날에 신라가 성행하면서 옷이 아주 귀한 때인데 화랑도들이 와서 수양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말을 타고 장재터를 오르내리니까 그 당시 여기 사람들 보기에는 신선들이거든요. 하얀 옷을 입으니까. 신선이라 그 얘기야. 강선리를 그래서 내릴강 신선선 마을리 강선리라고 그러지. (강현면 강선리, 1999. 6. 29. / 문동재, 남. 70)
옛날에 바우를 요렇게 돌러 파고서 팥을 넣고 갈아서 팥죽을 쑤어 먹고 그랬거던. 지금도 파면 거기 있어. 그 돌맹이가 있었는데 사람이 안 사니 안 쓴다 말이야. 요 앞에 나가면 옛날에 큰 우물이 있었거던. 있었는데 그걸 먹으려니 팥 우물이 있어야지. 사람이 몇 집 안 사는 모양이야. 큰 우물에다 갔다 놨단 말이야.
아주 옛날에 그 팥 뜬물을 소리를 지르잖아. 영차 소리에 잠을 못자서 도로갔다 놨데. 옛날에 그랬다는 얘기가 있어. 내 자리가 있는데 갔다 놨냐? 영차소리에 잠을 못잤데. 도로 갔나 났데. 그게 있어야 물을 먹는 게 아니라 필요하잖아. 물가는 게 있어야지 돌로 갈아 먹었단 말이야. 거기다 쌀을 갈던지 동그래 싹싹 갈아 가지고 지금은 없어. 파면 있을 꺼야 그런 전설은 그런 얘기가 있다고 그랬다고. (강현면 강선리, 1999. 6. 30. / 김남두, 남. 77)
할 애비소와 할미소라는 골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긴데 그 곳에는 소(沼)모양을 한 큰 웅덩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바위에 여자 고무신 자국과 남자 고무신 자국이 바위에 찍혀져 선명하게 보여. 이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시고 할머니께서 너무 속이 상해 그만 골에 가서 고무신을 나란히 벗어 놓고 웅덩이에 빠져 돌아가셨지. 그러자 할아버지는 “자기가 잘못하여 할머니가 죽었다”고 한탄하시며 할머니가 벗어 놓은 신발 옆에 고무신을 나란히 벗어 놓고 그만 돌아가셨지. 그 뒤로 바위에는 이상하게도 고무신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지금도 자국이 있어. (강현면 강선리, 2000. 5. 3. / 김선자, 여. 78)
옛날에 당금애기가 살았는데 중이 시주를 받으러와서는 시주 받은 쌀을 일부러 떨어뜨려서 놋젓가락으로 주어 담아야 한다고 했어. 놋젓가락으로 담으니까 해가 다 가서 중이 자고 가야 하는데 잘 데가 없어. 아들의 요술을 시험해서 초지버선을 신고 강을 건너서 안 젖으면 아들이라고 해서 초지버선을 신고 그 아래를 갔다 왔는데도, “난 니 아버지가 아니다”하고 세상 재주를 다 가르치느라고 아버지가 뭘, 뭘 시키면서 다 그게 아니라고 우겼어. 도가 차니까 그제서야 큰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내가 여기다가 피를 떨굴테니 너희도 피를 떨궈 뭉치면 아들이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아버지의 피에 뭉쳐서 한피로 됐다. 서가월이 아버지를 찾고 그 때쯤에 어머니를 모셔와서 잘 살았다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강현면 회룡리, 1999. 6. 27. / 오규원, 여. 72)
사람들이 칭찬했지. 일가도 없고 해서 매일 혼자서 남에 집일도 하고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매일같이 집에 들어오면 부모님 생각이 나니까 오래 된 고목을 보면 부모님 생각이 더 나니까 고목 나무를 부모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아침저녁으로 나무에 밥과 물을 먹여드렸대요. 그런데 이웃에 사는 사람이 그가 착실해서 돈을 좀 벌어서 그 돈을 빌려갔는데 그 착한 노총각이 달라고 하니까 갚기는 싫고 그래서 이웃 마을에 살인이 일어났는데 그 총각에게 뒤집어 씌웠어. 그래서 관가에 붙잡혀 갔지. 그래서 원님이 “마지막 소원이 무어냐”고 물으니까 “집에 한 번만 가고 싶다”고 하드래. 그래서 원님이 직접 데리고 집에 갔대요. 갔더니 집안에 고목을 보고 절을 하면서 “이제 제가 모함을 받아서 죽게되어 부모님을 뵙지 못해요” 했더니 나무가 눈물을 흘리드래요. 그것을 보고 원님이 이렇게 착한 사람이 사람을 죽였을 리 없다고 하면서 보내주었데요. (강현면 장산리, 1997. 3. 2. / 이성녀, 여. 81)
옛날에 높은 사람이 메누리(며느리)를 얻을라구 하는데 다 주문했어. 무슨 데 무슨 데 다 주문했지. 그 색시 말 다 들어봤지. “고개 중에는 무슨 고개가 어려우냐?” 이거 다 물어봤거든. 그래니까 무슨 생각나? 괜히 그것 두 다 배워둬야 알지. 제일 아주 보릿고개가 어렵습니다. 그것두 참 유식하게 자란 사람이지. 보리고개가 왜 어렵냐 하면 먹고 사는 게 어렵거든. 보리가 패서 크잖아? 그 보리 익을 때를 당해 먹을라니 낟알이 모자라는 거여. 그러니까 보리가 익어야 그걸 해서 먹지. 제일 그 때가 어렵다는 거여. 그래 흰 낟알은 없어지고 보리가 날 때에는 뭘 먹구 사나. 그 보리 익을 때만 고대하고 있는데. 그래서 가만 생각하면 뭐 고개가 어렵냐 하면 제일 보리 고개가 어렵거든? 사는 기 그렇겠지. 그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 무슨 고개가 어렵노, 무슨 고개 무슨 고개 그게 저런 산 고개를 얘기 하지만 그 유식하고, 배웠고, 아는 사람 이래야 그런 소리를 하지. 아이 배운 사람은 아누? 그래서 그렇게 내려온 소리여. 옛날에 색시 맘 국량을 들어보려고 주문핸거여. 그래서 그렇게 핸 사람이 국량 널른 사람이라고 추측하고 그랬대. 그기지 뭐. (강현면 석교리, 1999. 6. 3. / 김상봉, 여. 84)
마을 앞에 남쪽하천에 수심 10m 가량의 소가 있는데 이 소에서 예전에 할머니가 익사하였으므로 할미소라고 해요. 병풍산이라고 마을 뒤 북쪽에 위치한 높은 산인데 암석이 병풍처럼 둘러있으며 옛날 호랑이가 인근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으나 병풍산 덕분에 간곡리만은 피해를 입지 않죠. (강현면 간곡리, 1999. 11. 13. / 최종호, 남)
지금은 터만 남은 진전사지에는 정종대왕 때부터 도둑이 많이 들었어. 그래서 진전사지 절터에는 옛날부터 그들이 하룻밤 자고 갔던 굴이 있고 그것을 지금은 도둑구리라 부르고 있어. 그리고 그 옆에는 도둑들이 멱을 감던 도둑소라는 곳이 있고, 또한 바로 옆에는 이무기를 모시던 곳인 예기소가 있으며 그 바로 가까이에 굉바우라 불리우는 바위가 있어. 옛날부터 이 굉바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어서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 먼저 군과 면에서 쌀 한 말로 인부들을 사서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에서 개 한 마리를 사오게 하지. 그리고 나서 이 굉바우에다 그 개의 피를 바르고 인부들이 막 뛰어 놀면 벼락을 치면서 비가 오고 비록 둔전리에서 비가 오지 않더라도 설악산에서는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있지. 이 전설은 결국 굉바우에 묻은 피를 씻어내기 위해서 하느님이 비를 내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일제 시대 때에는 절아래 구멍을 파고 종이 죽으면 나오는 곳이라는 파주리를 돈과 함께 묻어서 건물을 세우고 나서 절이 산으로 넘어가면 난리가 난다는 전설이 있었지. 해방이후 6.25가 일어나기 전인 인공 때에는 절 앞에 중이 죽으면 장단지를 세우는데 도굴꾼들이 이 장단지 아래에 있던 돌을 굴렸다는 전설이 있지.
인공 때에는 70먹은 할머니가 절을 구경하고 나서 하룻밤 자고 다시 절을 보고 가면서 “앞산이 높아서 절을 오래 보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해요. 진전사는 설악산의 해능사와 연년이 같으며 진전사지 절터주위에 있는 한 소는 수심이 매우 깊어서 물이 내려오면 빙빙 돌다가 내려간다고 해요.
영혈사보다 작은 절이 낙산사라고 하는데 어느날 영혈사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 방망이를 떨어뜨렸다고 해요. 그런데 영혈사보다 낮은 곳에 있던 낙산사에서 하루는 법당의 우물에서 쌀을 씻다가 영혈사에서 떨어뜨린 방망이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어요. (강현면 둔전리, 1998. 4. 10. / 최득수․최완섭, 남)
진전사지 탑 앞에 하천에 수심이 10미터가량 되는 소가 있는데 진전사 창건시 여승이 절을 지으려고 기도를 하는데 현몽하기를 “이 소를 뛰어 건너 갔다오면 절을 짓도록 하여준다” 하므로 여승이 이 소를 뛰어 건너가다가 익사하여 여귀소라고 한답니다. (강현면 둔전리, 1998. 4. 10. / 최득수․최완섭, 남)
300여년 전 방아다리라 칭하던 바 그 후 교량의 가설이 불충분한 한말시대에 부패한 족침목으로 다듬이돌 같은 석재로 임시 가설하였던 유래로 명명했고 마을 한가운데 약 5백년 된 고송이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긴 상징적인 뜻으로 속칭 “방아다리”로 칭하는데 그런데 그게 죽어 가지고 3년 전부터 시들고 지내는 구먼. 아주 죽었잖아. 그렇게 약을 그렇게 줘도 안들어. 그것도 다 시명(수명)이 아마 고만치 있는 기여. 아니 뭐 몇 백년 내려완기 뭐. 아주 그래서 그 솔로 인해서 여기 이름을 지었지. 방아다리라고. 지금 침교리라고 했어. 여길 침교리라고, 삭은다리는 삭은다린데 또 사교리라고 그러구. 적은리는 적은골인데 적은리라고. 그러고 마카 그렇게 동네마다 이름을 그렇게 지었잖아. (강현면 금풍리, 1999. 11. 21. / 이장님, 남)
옛날에 가난하게 살아 가지고 저 아내가 이제 순산 달이 됐는데 땔거리가 없어서 이제 저기 아주 북하고 이제 가지고 잘기(자루)를 하나 가지고 떠났는데요. 가다가다 보니 혼자 사는 여자가 “혼자서 하룻밤을 자고 가자” 이러니까 “들어오라” 그러드래 들어가서 이제 가만히 듣다가 그 여자가 아주 어떻게 들어오시나 그래놓고 저짝 방엘 갔는데 아 그래서 자는데, 여자가 하도 “아프다” 그러드래. 그래서 북을 쳤대요. 북을 쳐 가지고 이제 아 이래 이 마당에 “그럼 내가 고쳐드리겠다”고 북을 치고서 막 그러고 인제 그 여자가 아픈 거를 고쳐주고 주니까 그 여자가 쌀을 그 옛날 이제 무명 보자기 이런 게 있잖아요? 배자기에다 쌀을 한 자루 주더래요. 그래 그 자루를 쌀자루 한 자루 가지고 나와 가지고는 이 집에 아내가 이제 와서 순산을 했는데 그 쌀을 먹고 먹어가며 잘 살았데요. 그렇게 살았데요. (강현면 적은리, 2000. 6. 19. / 홍영자, 여. 76)
여기서 쭉 올라가면 학교가 있어. 적은리라고. 그 학교 그 위에 올라가면 혹이 하나 있어. 그 위 침교리라고 하는데가 양반이 난데야. 그런 양반이 난 일이 있고. 여그매 야할리라고, 야할. 그기 어제 야하리라고 하는데가 있는데 임씨가 살았어.
임씨들이 살았는데 아직도 몇 집 있긴 있지만, 그 임장군이라고 하는 이가 옛날 사람치곤 힘이 있다고. 그리고 강릉 권씨라는 이가 서울에 과거 보러가고. 이 여기서 서울이 오백 오십리라고 옛날 길로. 그리고 당일에 갔다 당일에 오고. 그런 임장군이 강릉을 벌써 떠났다고 그러거든. 강릉서 갔다니 많이 갔겠지. 그런 양반들이 서울을 가니까 동대문 바깥에다가 숙박을 했거든. 그 이 양반은 동대문 안에 들어가서 한 30리 들어가서 숙박을 했다이기야. 하고선 과거를 보고 결국은 둘이 모두 다 과거를 못하고 내려오는 판인데 저 춘천 어디 오다가 보니까 그니까 권장군 먼저 또 떠나오고 임장군 뒤에 쫓아오고 이러는데 그 권장군이 “야! 임장군이 힘이 좋다는데 한 번 좀 봤으면” 그 옛날부터 힘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지금 우리도 그러죠. “야. 그 놈, 힘 좋다는데 한 번 만나 봤으면”
그래서 그런데 임장군이 오다 보니까 선비가 하나 간단 말이야. 그래 간데. 가 딱 만나서 통성하니까 권장군이라고 그러거든. 그래 그 권장군이 가만히 보니깐 보통 사람은 아니거든. “그 양양사는 임장군이 아니요?” 하니깐, “그러노라” 그러니, 둘이 동행을 해서 얘기를 하면서 한 5리 동안 여기서 얘기하자면 양양읍쯤 동무했겠지. 가만히 임장군이 생각하니 권장군이 같이 오다보면 집엘 당일 와야 되겠는데 못 오겠다 이기여. 그래 강릉서 양양을 들어오는데도 120리 길인데도 100리는 걸어야 된단 말야. 그래서 양양서 양양읍 한 4리 잡더라도 내가 동행을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오늘 저녁에 부득이 집에 애들과 꼭 자야겠다고 하고 왔으니 미안하다. 난 먼저 가겠노라”고 하여 “가라”고 그래 가는 데에는 “내가 부탁을 할 일이 있다” 이기야.
임은 “그게 뭔소리냐” 하니 “우리 집이 강릉 아무데 가다보면 길옆에 있으니 오늘 저녁에 부친 제사라 이기야. 대사라 이기야. 기고가 있으니 애들이 꼭 나 올 땐 바랄 테니 내가 밤길이래도 꼭 집엘 대어가겠다” 하니 그럼 인제 그 권장군이 왜 그건 그렇게 했는고. 저 사람이 나보다 힘이 얼마나 더 있는지 그걸 좀 알라고. 나하고 같이 동행을 못한다니 힘이 나보다 낫겠길래 양양을 간다니 한 10리까진 들켰는데 그 이후론 안 들켰어. 그럼 이제 떨어져서 오는 게 그 권장군이 죽어라 하고 오는데 지금은 밤 하면 12시가 제사 지내러 들어 왔거든.
양양 임장군은 저그매를 새벽녘에 강릉에 와 댔다 이기야. 권장군이 더 뒤 떨어졌어. 아, 오다가 그래서 임장군이 “내가 부친과 같이 동행해서 아무데까지 오다가 내가 좀 바빠서 내가 먼저 왔는데 집에 엊저녁에 저물어도 부친이 댄다고 했으니 꼭 그런줄 알라”고. “아, 그러시냐”고. “아 그러면 쉬고 가셔.” “아냐, 내가 오늘 바빠서 그만 가야돼.” 그러니까 그런 줄 알라고. 그렇게 하구선. 집엘 왔는데 권장군이 가려고 하는데, 아! 12시가 지사(제사) 날에 집에 딱 됐단 말야. 대니 자식들이 잘 수가 있나.
꼭 밤이 저물어도 온다고 했으니 인제 바라고 있지. 아 그래 기침소리가 나니 문을 열고 나가니 “아버님 이제 오시냐?”고 하니 “아, 나 이제 온다.” “야, 낮에 손님 하나 왔다 간거 없냐?” 그것부터 물었어. “아, 예. 양양 있다는 손님이 한 분 왔다.” “어느때냐” 그랬더니 “해질 녘에 여길 왔다.” 그래 양양 임장군인데 내 아무데서 떨어져서 해질녘에 여길 왔다. 그럼 벌써 집엘 갔겠구나. 그럼 나는 낯이 없다. 그 양양 임장군이라고 하는 논에 저 빠지는 이만큼씩 빠지는데 좀 걷고 매장을 할려니깐 오금 밑으로 연어 비늘 같드라고. 장사는 장사지. (강현면 광석리, 1993. 6. 21. / 최춘국, 남. 81)
저 그거 한 사람이 장개를 못 갔대. 장개를 못 가구선 산에 이제 나무를 하러 갔대. 나무를 하러 갔는데, 퇴끼(토끼)가 하나 넘어오더니 퇴끼가. “아, 나 좀 감쳐 달라”고 그러드래. 그래서 가랑잎 속에다가 집어 쳐 넣었대. 아 포수쟁이가 하나 넘어오더니 “여기, 퇴끼 한 마리 가는 거 못 봤냐”고 그러드래. 그래서 “아이 난 못봤다”고 그러구선 간 다음에 그 사람이 없다니깐 갔지. 갔는데 그거 나와 가지고선 날 따라오라고 그러더라나, 날 따라 오라고.
그래서 갔대. 그래 갔더니깐 큰 강물이 있는데, 그 강물에 가서 뭐라고, 뭐이라고 하더니 그 강물이 떡 갈라지더래. 떡 갈라지드만 거기 가서 가거덩. “그 집에 가면 내가 쥐를 한 마리 줄테니까 그걸 가져오라”고 그러드래. 그래서 참 거길 가서 그렇게 하니까. 그 물이 갈라지더니 아무 집으로 들어가라고 그러드래. 그래서 들어갔더니 아 쥐를 한 마리 목을 매서 주는데 집에 갖다 놓고서네, 이제 낭그를 하러 갔더니, 아 밥을 그렇게 지놨드래. 고기반찬에다 그렇게 잘해 놨드라나. 그래서 이제 그걸 가지고서네 밥을 먹고서네 또 낭그를 하러 갔다 오니까, 저녁에 또 그렇게 해 놨드란 말이야. 아 사흘을 그렇게 해 놓드라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뭐이 그렇게 하나 하고선 지키고 본다”고 그래 지키고 보는데, 고방문을 딸깍 열더니 나와서 밥을 하는데 그냥 그 찌적갈이가 있지. 낭그 그런걸 갔다가 고리를 궈놓고 밥을 그렇게 해 놓고는 고방으로 또 쑥들어 갈라는걸 내려와서 욱했더니, “아이 내가 며칠만 있으면 내가 나올텐데 왜 그거 벌써 이렇게 날 못가게 하느냐”고 그러드래.. “아이 살아야 한다고 같이 살아야 한다”고. 그래 그러는데 일을 하러 못 가고 밭에 가서 일도 못하고 그 여자가 하도 보고 수워서(싶어서) 못하고서, 밭에도 못 나가고 끄잉끄잉 그렇게 앓더라니까, 그 여자가 그러드래. “당신은 왜 그렇게 앓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하도 보고 수워서 일을 하러 난 못간다”고. 그러니깐 “아 사진을 하나 떨꺽 찍어준단 말이야.” 밭에 인제 여기서 나갈 적엔 저 짝에 나갔다가, 나가보면 보이잖아. 그래 사진하나 찍어주는 걸 가지고 가서 그걸 보고서 일을 하다가 아, 이 바람이 휙 불더니만 훌렁 날아가거든. 그 사진이. 집에 와서 떨꺽 또 앉는다. 일을 하러 갈라니 여자가 보고 싶으니 앓으니까 “여자가 당신은 왜 그렇게 앓습니까?” 이러드래. 그러니까 “저 그거 그 사진이 그렇게 날아가서 당신이 보고 수워서 그렇게 앓는다고”. “아!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그 가서 그 집에 가거덩 패랜(마른) 말이 하나 있을테니 가서 아주 살찐 말도 가져오지 말고, 패랜 말을 가져오라” 하드래.
그러니 저 인제 그게 어딜 날아갔나 하믄 임금님 변소 앞에 가서 문 앞에 거 가서 날아가서 떨썩 붙었으니, 임금님이 아 부하를 불러 가지고 이거를 “찾아오라”네, 그러니 어떻해. 그래가지구는 거기 가서 그 임금이 그랬지. 나 내기를 안준다 니 여자를 주겠나 보구 수어서, 그렇게 하는데 그러믄 우리가 내기를 하자 그러니까, 임금님은 어디 메 가서 내기를 하자, 하니 이건 말이 있나 뭐 있나 아무것도 없지. 그래서 끄잉끄잉 들어앉아서 또 와서 앓는다. 여자가 “당신 왜 그렇게 앓습니까?” “나는 임금님이 그렇게 내기를 하자 하니 내기를 해서 내가 꼼짝없이 난 지겠으니까 당신을 뺏길테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기 가서 말이 살찐 말도 있고 많을테니까 아주 제일 패랜 말을 가서 가져오라 그러드래. 나쁜 걸 가져오라 그러드래. 그래 가서 참 패랜말을 가서 가져왔대. 와 가지구 내기를 하자. 임금님 말은 살이 쪄서 그러는데 이건 패래서 쑥덕쑥덕 하드래. “저깐 말이 강을 건너가겠느냐” 이거여. 큰 강을 건너가는데 저기 뭐이 이기겠냐고 그래. 임금님을 먼저 타구서네 건너 가다가 반 복판에 가다가 뚝 떨어지니 그 사람과 말과 아울러 물루서네. 그리구는 이 임금님이 이 여자를 뺏지 못해서 “또 한 가지를 하자” 하니 “우리가 집짓기 내기를 하자.” 집짓기 내기를 하니, 아 집을 여간 또 잘 짓겠나. 집을 잘 짓게 인제 크게 잘 짓게 내기를 하자 그러드래. 임금이 그 여자를 뺏고 수어서 그래. 그렇게 하니까 남자가 또 와서 끄잉끄잉 또 앓는다. 또 내기를 하자 하니 또 참 못하겠거덩 그러니 이 여자가 또 물었단 말이야. “당신 왜 그렇게 앓습니까? 처갓집에를 가믄 뱅(병)을 하얀뱅, 빨간 뱅 하나, 파란 뱅 하나 줄테니까 고거를 열어보지 말고 오너라” 그러드래. 그런 걸 남자가 거 가서 달라하니 세 개를 주는데 오다가서네 파란 뱅을 하나 열어봤단 말이야. 열어보니깐 이 사람을 쥑일라고 하필이면 어서는 솔개미가 하나오더니 떨꺽 닫아주거든 그러니까 그만 흔적 없이. 그래 집을 갔대. 그래 집에로 오니까 그 여자가 한단 말이 “당신 왜 내가 그거를 열지 말라고 핸 그거를 왜 열어 봤냐” 그러더래. 그래 “그런 게 아니라 하도 희안해서 열어봤다”고.
“그래 임금님이 벌써 하마 터 다 닦아놓고. 아주 참 기둥을 세울라고 할테니까 당신 가서 새파란 뱅을 제일 먼저 열어 보고, 고 다음에는 새빨간 뱅을 열고 그렇게 하라”고 하드래. 그래 가지구서네 하얀 뱅을 여니 임금님은 터를 다 닦았는데, 이거는 그거 하날 갖다 여니 사람들이 배짜리고 파란병을 고 다음에 여니 쟁기야 뭐야 다들구 하마 번쩍하더니 그렇게 하구 마저 빨간병을 여니 하마 집이 다 되가지고서네 또 임금님한테 또 이겼네. 그러니 할 수 없이 참, 그 여자 데리고 살라는 팔자래서 그래 잘 살다 죽었대. 그래서 그기 끝이야. (강현면 광석리, 1993. 6. 21. / 최호월, 여. 89)
옛날 얘기는 뭐 다 잊어버리고. 옛날 얘기를 내가 해주는데. 옛날에 인제 앉아서 삼을 삼더라니까. 젊은 게 나이 육십 나보다 나이 젊은 사람이 삼을 앉아 삼더라니까네 그 남자가 인제 자거든 남자가 이렇게 틈 자는데 죄고만, 요만한 뱀이 실날 끝 같은 게 코에서 소로록 나오더래. 나오더니 그 문틈으로 이렇게 나가더라네.
나가는 걸 뒤를 쫓아서 이렇게 가니까 요런 도랑이 있었던 모양이라. 뭐 요 도랑에서 건네 갈려고 요령냥 하는데 물이 있으니께 건네가지 못하거든. 그전에 이런 치수를 달라면 자가 있어요. 자 거예 치수를 다섯 치를 놓거든. 거 자를 가져가서 요렇게 대준께 절로 가더래. 그래 고걸 인제 따라갔대. 따라가니까는 어디 밭, 밭머리로 가더라네. 그 뱀이,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그래서 그 뱀이 돌돌돌 돌더래. 그러니까 그래서 그 여자가 표를 동그랗게 해놓고 왔대. 인제 거기가 가지고, 그 다음에 가 가지고 뱀을 또 데리고 왔지. 그러니까 남자 코로 쑥 들어가더래. 들어가는데 남자가 자구 일어나서 아 그러더래 “아, 나 꿈을 꾸었는데 참 이상한 꿈을 꿨다.” 그러더래. “그래 뭔 꿈을 꾸었냐” 그러니까 “이 뱀이 그렇게 코에서, 당신 코에서 실날 끝 같은 게 나오더니 그 아무데 아무데 밭으로 가더라” 뭐 그런 얘기를 했대. “그래 가보자” 그러더래. 그래 거기가서 요렇게 그어 논 걸 파내보니까네 금이 한 득 있더래. 그래 금을 파와 가지고 와 가지고 아주 그렇게 못 살던 게 잘 살았대. 그 집이 그런 얘기 옛날 얘기 옛날에 하더구만. 어른들 말이 옛날 얘기요. 이젠 다 잊어 버렸어. (강현면 답리, 1993. 6. 17. / 최성녀, 여. 74)
고려시대 때에 조신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내용을 살펴보면 스님이 한 여인을 만나 같이 살게 되었는데 형편이 어려워 헤어지려고 어느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곳에서 자식 둘이 뱀에게 물려죽는 내용이랍니다. 꿈의 내용이 이상하여 그 곳을 파 보았더니 미륵이 두 개가 나왔데요. 그 후로 그 장소를 미륵불이라 부르고 그 골짜기를 미륵불골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강현면 주청리, 2000. 6. 30. / 유근호, 남. 62)
옛날에 의상대사가 의상대를 지었어. 그런데 의상대 아래에 홍련암이 있잖아. 홍련암 근처에 그전에 꽃이 피었대. 빨간 꽃이 많이 피었으니까 홍련암이지. 홍련암 밑에는 열두 가락 달린 큰 문어가 살고 있대요. 내가 처녀시절의 애긴데. 해녀 두 자매가 여기에 왔었거든. 여기에 와서 고기를 잡으려고 홍련암 아래 물 속으로 들어갔지. 두 자매가 같이 물질을 하러 들어갔는데 얼마 후 한 여자는 나왔는데 다른 여자는 안 나왔어. 아무리 기다려도 그 여자가 안 나오니까 먼저 나왔던 여자가 다시 물 속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문어가 그 여자를 타고 앉았더래. 사람이 들어가면 잡아먹는 문어였대요. 수십 년 만에 한 사람씩 잡아먹고 홍련암을 지켜주는 문어였대요. (강현면 전진리, 1995. 1. 14. / 김정자, 여. 56)
보타전은 그 터가 대 명당자리인데 옛날에 이런 전설이 있어. 저 설악산 설악동에 신효거사라는 분이 살았거든. 그 양반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사냥을 하여 봉양을 하였대. 그러다가 어느 날 홀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원래 고기를 좋아하시니까 항상 날짐승을 잡아다가 어머니를 봉양해 드렸거든.
어느 날 이 양반이 사냥꾼과 함께 보타전 그 자리로 사냥을 하러 나갔어. 이 때 학 다섯 마리가 날아와 근처 나무 위에 앉더래요. 이 사람은 활 솜씨가 백발백중이었는데 그 날은 활시위를 당겼으나 이상하게도 학이 맞지 앉더래. 몇 번이나 활을 쏘았지만 번번이 화살이 학의 옆으로 빗겨 날으면서 깃털 몇 개만 떨어지더래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도 이상해서 그 깃털을 들고 사람의 얼굴을 보니까 자기가 데리고 온 사냥꾼들이 사람이 아닌 산돼지, 꿩, 노루로 보이거든.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차하고 깨달았지. 내가 살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런 조화가 나왔구나 생각하고 그 깃털을 잘 간직하여 설악동 저기 집에 잘 모셔 두었대요. 그 후로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을 했어. 그런데 어머니가 원체 고기를 좋아하셨기에 고기를 드리고 싶은데 구할 수가 있어야지. 사냥질을 못하니 고기를 구할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자기의 허벅다리를 베어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대.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사람은 거기서 계속 거사를 했더래.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나 지나자 그 사람은 자기가 깃털을 주웠던 보타전으로 찾아 왔어. 오니까 동자승 다섯 분이 나타나더래. 동자스님들이 그를 보자
“어느 어느 때 주운 그 깃털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고 묻기에 이 양반이 무릎을 척 꿇고 그 스님에게 절을 올리며 깃털을 드린 거야. 그러자 그 동자승은 “우리들은 원래 낙산사가 있는 오봉산의 다섯 신이다.” 봉오리가 다섯 개인 오봉산의 다섯 신이라는 거야. 원래 이 절에는 벽화가 있었는데 그 벽화가 요만큼씩 떨어져 나갔어. 그 스님들이 신통력을 부려서 벽화의 일부를 떼어내 깃털을 만든 거라. 스님들이 또 말하기를
“한 1600년이 지나면 앞으로 여기가 관음성지 즉 관세음보살의 본관이 될 것이다. 너한테만 알려주니까 절대로 소문을 내지 말아라.”고 당부하였대. 여기가 대 명당이라는 스님의 말을 듣자 그 사람은 거기서 수도를 했다는거야. 그 스님의 말대로 과연 관음성지가 된 거라. 관세음보살님 본관이 되었지.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 1995. 6. 16. / 스님, 남. 50)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관음보살의 진신이 근처 해변의 굴속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의상대사는 굴에 들어가 예불을 하였다. 그러던 중 관음보살이 나타나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세울 위치를 알려주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칭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 과정을 거쳤으며, 현재 보물 제1723호 공중사리탑과 보물 제1362호 건칠관음보살좌상, 보물 제499호 칠층석탑을 비롯하여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 등 가치가 뛰어난 성보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통한 사전 신청 시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다.
<출처: 양양관광>
낙산사 의상대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소개한 관동팔경의 하나로 동해안 일출이 유명한 장소이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남해 보리암, 서해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이자 관음도량이다. 낙산사 아래쪽 해안가에는 의상대사가 참선했던 장소에 세운 작은 정자인 의상대와 해안 절벽에 세워진 작은 암자인 홍련암이 있다. 의상대사가 참선했던 장소에 1925년에 세운 작은 육모정자인 의상대는 낙산사 일월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고 넓고 푸른 동해바다의 기운을 받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의상대사가 이 곳에서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의상대는 해안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앞에는 관음송이란 오래된 노송이 있고 뒷쪽으로는 언덕위에 세워진 관음보살상이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양양관광>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강원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초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들로 보아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신묘는 바다의 신(용왕신)에게 국토수호,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초기에 국가제사로 제정되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이후 순종 2년 일제에 의해 건물이 철폐되었다가 1993년 양양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재에도 과거의 뜻을 기려 매년 해수욕장 개장식과 함께 ‘양양 동해신묘 여름해변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양양군 진전사지에 남아있는 불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6년 국보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정확한 연도는 기록된 것이 없으나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불교를 전한 도의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탑의 높이는 약 5m이며 탑의 각 층에는 우주, 탱주, 천인좌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석탑은 뛰어난 균형미를 갖추고 있고 하층기단에서부터 차례로 새겨진 비천상, 팔부신중, 사방불 조각이 눈에 띄는데 이는 화려했던 진전사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양양관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이두형가옥은 지어진지 약2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강원도의 전형적인 민가, 온돌 중심의 겹집이며 여기에 마루를 더했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웠으며 서까래는 홑처마 위 3량 구조로 지어졌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겹도리 팔작지붕이다. 남쪽 앞마당에 길하다는 대추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설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경주이씨 종가의 후손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설악산국립공원의 일부로, 눈부신 설경을 보고 싶다면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6월~7월에는 진달래, 철쭉, 벚꽃을 비롯한 다양한 야생화를 만날 수 있으며 정상까지 오색 방면, 백담사 방면, 설악동 방면, 한계령 방면의 코스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최단거리는 오색~설악폭포~대청봉정상 코스로 5.3km(약 4시간)가 소요된다. 양양 시내에서 오색까지 시내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초등학교 : 강현초등학교, 회룡초등학교
중학교 : 강현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