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1.개요

군청 소재지에서 4km 서쪽에 위치하여 산악이 전 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남설악계곡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양양군 관내 6 개 읍·면 중 유일하게 해안선을 끼고 있지 않은 면으로 , 국립공원 설악산 오색약수는 그 산세의 경치와 함께 전국 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며, 56번 국도변에는 전국제일의 원시림을 자랑하는 미천골자연휴양림과 불바라기약수, 갈천약수 등이 유명하다. 특히 약수는 위장병에 특효가 있어 많은 사람들과 관광객이 4계절 내내 찾는 곳이다.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 4.) / 단위 : 명
2,792
총 인구수
1,438
인구(남)
1,354
인구(여)

4.지명의 유래

  • 서면의 유래 : 군 소재지의 서쪽에 위치한 행정구역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 수상리(水上里) : 일제시대에는 상평리였었는데 행정수복 후에 수상리로 분리된 부락이다. 병자년 대홍수전에 상평국민학교 앞으로 하천물이 흘러 벼랑에 부딪혀 위로 돌아 흘러내려갔다. 현재 서면 소재지로서 강줄기가 변경되어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물웃구미”(수상)라 한다.

  • 상평리(上坪里) : 옛부터 “웃드루”라고 불리우는 평지가 있었는데서 명명되었다.

  • 장승리(長承里) : 얼료골(元龍골) 임천리와 수상리와의 경계에서 상리 뒷산 능선으로해서 오색령으로 가는 큰길이 있는데 진등을 이어 마을이 되었다고 하여 장승리라 명명하였다.

  • 서선리(西仙里) : 고대풍수설에 의하면 계곡이 심오하고 연하(烟霞)가 담청(淡淸)하여 풍(風)이 부도교중선(不倒僑中仙)으로서 서방(西方)에 위치하였다하여 서선리(西仙里)라고 한다. 또한 성황당 고개 밑에 있어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 논화리(論化里) : 노내골(論化里) 옛날 양양관가에 상소차 주민들이 모여서 최종 논의하고 결의하던 곳으로 정하였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 한다. 또한 산과 논이 많다하여 “논옛골” “노내골”이라고도 한다.

  • 오색1리(五色1里) : 본래 명칭은 가라목(加羅木)이 많으므로 가라피리라고 하였으나 행정수복후에 오색1리로 편입되었다. 옛날 주민들은 갈대와 가라목피로서 짚신, 삿갓, 갈자리 등을 만드는 수공업으로 생업을 삼았었다.

  • 오색2리(五色2里) : 오색석사는 계곡의 오색암석에 연유된 명칭이라고도 하나 한편 한나무에 5색꽃이 피었다하여 명명한 지명밑줄 글씨으로 1937년 양양군수로 부임한 전재우 군수는 오색리에서 3색 꽃이 피는 나무를 파서 이식하였으나 꽃이 피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8.15광복 후까지 3색꽃이 피던 고목이 관터 입구 근방 도로변에 있다가 노목으로 썩어 없어졌다. 본래 현 오색2리 지역만을 오색리로 불러오다가 행정수복후 가라피리가 오색1리로 편입되면서 오색1리로 명칭하였다.

  • 범부리(凡阜里) : 하천 언덕에 형성된 부락임을 나타낸 이름이다. 뒤에 언덕이 있고 앞에 큰 내가 흐르므로 범부리라 명명하였다.

  • 북평리(北坪里) : 음지에 있는 마을임을 나타낸 것이며 200여년전에 괴목(槐木)이 많아 괴목정(槐木亭)이라 하였으며 그후에는 태전(態田, 곰밭)이라 하였다가 북평리로 개칭하였다. 속칭 북들, 북드루, 아랫드루라고도 한다.

  • 용천리(龍泉里) : 마을 앞 우물에서 용이 등천하였다는 전설에 의하여 용천(龍泉)이라고 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뒷골 버덩말 웃곰밭을 병합하여 마을앞에 있는 용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 수리(水里) : 양양읍 임천리 앞강을 건너 북평, 용천을 거처 물골따라 돌다리를 네 곳이나 건너서 마을에 간다고 하여 물골마을 또는 속칭 수동이라고도 한다.

  • 내현리(內峴里) : 동리 중간에 산이 있어서 내현(內峴)이라하여 속칭 “안고개”라고도 칭하고 있으며 마을 중간에 밥상과 같은 암석이 있어 소반암동이라는 소동(小洞)이 있다.
  • 송어리(松魚里) : 마을 앞 계천에 송어, 연어, 자라가 많았으므로 명칭하였다. 옛날에는 마을이 많이 컸었지만 점차 줄어서 행정구역 개편시 1954년 송천리에 편입되었다. 일명 “송어골”이라고도 한다.

  • 송어리(松魚里) : 마을 앞 계천에 송어, 연어, 자라가 많았으므로 명칭하였다. 옛날에는 마을이 많이 컸었지만 점차 줄어서 행정구역 개편시 1954년 송천리에 편입되었다. 일명 “송어골”이라고도 한다.

  • 북암리(北庵里) : 황이리(黃耳里) 선림원에서 북방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하여 북암리라고 하는데 속칭 “북애미”라고도 하며 1960년대까지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몇 집만 살고 있다.

  • 용소리(龍沼里) : 윗 용소골 하천에 큰 소가 있는데 이 소에서 용이 등천하였다하여 용소리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독립마을로 있었던 것이 점차로 줄면서 공수전리로 편입되었다. 속칭 “용수골”이라고 부른다.

  • 영덕리(盈德里) : 옛날부터 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우형국(牛形局)이라하여 윤산의 덕이 충만하리라는 연유에서 리명을 붙인 것이다.

  • 송천리(松川里) : 하천 가운데 송림(松林)이 울창하여 강물이 양쪽으로 흘러내려갔다하여 송천(松川)이라 하였다. 또한 뒷내의 지류인 속내가 있으므로 속내라 칭하다가 변하여 송애, 소래 또는 송천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천리라 하였으며 1954년 송어리(松魚里)를 병합하였다.

  • 공수전리(公須田里) : 마을의 명칭은 조선시대 때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관가에서 정해놓고 경작하던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연유로 유래되었다. 또한 200여년 전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마을의 형국이 귀인공자처럼 생겼다하여 마을명칭이 꼭 알맞다고 전하고 있다.

  • 서림리(西林里) : 서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림이 울창하여 서림리(西林里)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림사(西林寺)가 있었던 연유로 서림골 또는 서림이라 하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림리라 하였다고 한다.

  • 황이리(黃耳里) : 토질이 척박하여 흉년이 들면 곡식이 황이 들어 누런 귀처럼 오그라져 흉년이 자주 든다고 하여 황이리라 명칭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 갈천리(葛川里) : 농촌경제가 향상되지 못하였을 때 화전민의 생활이란 극히 궁한면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춘궁기에는 갈근(葛根)으로 근근이 연명하여 오는 실정에서 앞에 있는 하천이 갈분일색(葛粉一色)이었다고 하는데서 갈천 또는 속칭 “치래”라고도 한다.


<출처: 양양군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시아버지와 맹인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그때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시어른께서 돌아가셔서, 장사를 치르기 위해 체일을 쳐놓고 장사를 지내는데, 매미가 여름에 철이 되서 매미가 오는 게 당연하지만 초겨울이었어. 장삿날에 매미가 체일에 수백 마리가 새까맣게 붙어 있는 거야, 신기한 일 아니야? 매미가 있을 철이 아닌데 왜 매미가 많이 모였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장사가 끝나자 마자 매미가 온대 간대 없이 싹 없어진거야.
그 후에는 매미를 전혀 볼 수 없었어 그런데, 이듬해 첫 제사 때 초겨울에 매미가 또 나타난 거야, 매미가 오면은 평상시에 시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안방에 쏜살 같이 들어와, 추워서 문을 닫아 놓으면 매미가 문을 열어 달라고 창문에 붙어서 막 긁어대었대. 그래서 문을 열어주면 시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안방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안방, 부엌 다 다니다가 제사 끝나면 싹 사라진다.
얼마나 신기해 그렇게 17년 동안 계속되어 오다가 큰집이 재판소송 때문에 뿔뿔이 흩어진 이후부터 매미가 나타나지 않는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매미가 시어른 이셨던 것 같아! 시어른께선 죽기 전부터 이 다음에 죽으면 매미가 된다고 말하셨거든. (서면 수상리, 2001. 6. 14. / 선종심, 여. 57)

 

5.2.부처 바위와 호랑 바위 유래

산에 가면 부처바위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 절이 하나 있었어요. 그 절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절에 손님이 오면 밥을 씻던 물이 수리를 거쳐서 남대천까지 흘러들었다는 전설이 있어요. 그 절이 잘되니까 도둑을 맞은 후에는 그 절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곳에는 절터와 기와장이 있어요. 호랑바위라고 불리는 곳은 방화선을 만들어 놓았던 곳입니다. 호랑바위는 그 곳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낳아서 갔다고 해서 호랑바위라고 불립니다. 죽사고개라는 곳은 중이 죽으면 그 곳에서 중을 화장을 했던 곳입니다. 수리에서 올라가면 정족산이 있습니다. 정족산의 정자는 솥정자 쓰는데 솥을 보면 발이 3개 있는데 솥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지. (서면 수리, 1999. 10. 17. / 김종만, 남. 88)

 

5.3.도적사 유래

신라시대에 도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굉장히 부자라서 쌀 씻은 물이 뿌옇게 용천리 개울까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도적이 들어와 불을 지르고 큰 바윗돌 밑에 불상을 감추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후에 일본사람들이 와서 그 사실을 알고 훔치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벼락이 치는 바람에 실패했다네요. 드디어는 일본사람들에 의해 불상을 빼앗기고 그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가서 소원을 빌었답니다. 지금도 불에 탄 기왓장이 남아있고 땅속에서 잿더미가 발견되기도 해요. (서면 수리, 2001. 6. 22. / 김종임, 남. 80)

 

5.4.아기장수와 용마

과거에 명인이 나면 국가에 사신이 들어온다고 해서, 역적이 난다고 해서 삼대를 멸족시켰지요. 집안에 명인이 나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여 즉시 쥐도 새도 모르게 집안에서 없애버리는 처참한 무엇이 있었는데요 중고에서는 명인이 난다는데 없으이(없으니) 희얀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서면 초등학교 앞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도로 옆에 우뚝하게 솟은 바위가 있는데 그전엔 냇물이 있어서 돌바위 밑으로 개울이 났을 당시에 그 학교 웃머리엔 집이 있었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어린애가 하나 태어났었는데 산모가 밖에 나갔다 들어와 보니 아이가 없었지요. 이제 무슨 조화인가 해서 사방을 둘러보니 글쎄 낭그로(나무로) 만든 선반 위에 있었지요. 난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이게 역적이란 말이야. 나라가 알면 삼대를 멸한다는 무엇이 있기에 저녁에 온 집안이 모여 아이를 붙잡아 몰래 죽였어. 죽이고 난 이튿날 아침에 그 앞소에서 용마가 초등학교에서부터 상평리까지 올라 뛰고 내린 뛰면서 소리를 지르더니 그 용마가 사그러져 없어졌는데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해요. (서면 논화리, 1993. 6. 10. / 황영석, 남. 60)

 

5.5.탁장군 바위 전설

여기 송천에 가면 탁서방네들이 많이 사는데, 탁씨네들 시조가 오색으로 올라가는 줄기에 있지요. 저기 오색 가는 밑에 관터라고 있는데 지금은 백암이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 집에 명이 들어 조상산을 한 번 벗겨봐야겠다고 하여 지관을 데리고 와서 선산을 뵈키니, “명인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해요. “어떻게 하면 명인이 안나겠느냐”고 물으니, 산에서 떠억 앉아서 보니 돌이 하나 있는데 장군바우라 그러지. 지금도 그 바우가 있어. 그 바우가 사람처럼 그 형태가 똑같이 생겼는데 “이 바위만 없으면 명이 안난다” 하니 석수쟁이 몇 십 명을 데려와서는 정으로 쪼아서 없애자 했지. 그래서 첫 번에 귀를 쪼아서 떼내기로 했는데, 몇 번 쪼아서 떼내니 돌바위 귀에서 피가 났어. 그때 이 집안에 명인이 있었던 모양이야. 암만 역적이 난다고 하드래도 그냥 놔 두어야지. 만일 이 돌을 영원히 없앤다고 하면 탁씨 집안의 존재가 없어질 것이라 하여 그만 두었지. 그래서 지금 그 탁장군 바위에 가보면 귀 한쪽이 떨어졌다고 해요. (서면 논화리, 1993. 6. 10. / 황영석, 남. 60)

 

5.6.탁장사 전설

옛날에 이래 댕기다보니까 기운이 세서 많이 지구 가니, 많이 바꿔오구 그렇게 살았는데, 그기 연곡인가. 거기에 권장군이 있었는데, 그기 경계에 지경이라는 곳, 강릉하구 양양 중간에 소나무가 적송이 큰 게 있었어요. 그기 황장목이라고, 나랏님 관을 해보내는 겁니다.
그기 지방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에 좋은 게 있으면, 국가에다 상납하는 게 있잖습니까? 관을 만드는 것을 서로 해서 올려 보낼라구 그래 지경에 섰으니까 강릉은 강릉대로, “우리가 가지고 가겠다” 하고, 양양은 양양골에서 “우리가 가져가겠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갖고 가느냐?” “그럼 이걸 베어 넴기자. 그래 넴겨 가주구 똑같이 비(베)는데 쓰러지는 쪽에서 갖고 가자” 이랬단 말이예요.
이게 어떻게 쓰러지는 게 강릉 쪽으로 약간 넘어 갔더란 얘기예요. “넘어왔으니 우리가 가져간다” 강릉서 이러구 나오니까. 그래 이짝에서 가만 보니까, 힘센 장군이 하나 있으니까, 이 양반이 떡 있다가 “그거 지구 가는 사람이 가져가기로 하자” 이제 이렇게 되었단 얘기예요.
“그럼 그러자” 강릉서두 권장군이라고 하나 있으니까. 결국 이렇게 된 거예요. “기운이 얼마나 센지 지구가는 사람이 짱궈(잘라)가지구 가자. 그거 혼자서 지구가기는 사실 힘든 거니까. 통나무니까. 짱궈가지 가자”
그럼 이제 알치만 치구 그냥 그저 뭉텅뭉텅 짱궈가지구는, 그래 이 양반이 얘기가 옛날에 와야가 있습니까? 로프줄이 있습니까? 산에 가서 거저 다래 칡줄 이거를 빙빙꽈서 실타래처럼 꽈가지구는 그거를 질빵을 걸어 놓구는, 강릉쪽에 먼저 넘어갔으니 “강릉쪽에서 먼저 지구 가거라” 이렇게 됐단 얘기예요.
그래 이 양반을 보니 키는 적더래요. 탁장군은 키는 크구 웅장하구, 강릉의 권장군은 아주 초립댕이처럼 키는 작달막하구. 근데 이 양반이 지구 일어나기는 일어나더래요. 일어나서 몇 발자국을 가더니 지경을 남기구는 “아 이제 더 못가겠다” 하니 “우리가 지구 간다” 그래 이짝에서는 탁장군이 짊어지구는 그냥 막바루 양양 쪽으로 지경을 넘겨가지구 양양 땅에다 놨다는 거래요. 그래니 “도저히 인제는 못 가져간다”구 강릉에서 그러니, 양양에서는 나라 진상을 탁장군 때문에 황장목을 나라 진상을 했다. 인제 그런 유래예요. (양양군 서면 송천리, 1995.12.10 / 탁봉원, 남. 66)

 

5.7.주전골 호랑이

옛날에 오색 주전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해요.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으며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때문에 많이 어려워했는데, 어느 날, 스님이 마을 근처를 지나가다 절을 세웠는데 그때 당시 규모가 컸으며 절 앞에 돌을 쌓아 기도를 드리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랑이 때문에 힘들어 하던 오색 주민들은 그 곳에서 돌을 쌓으며 기도를 드렸는데 후에 호랑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 때문에 절은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하네요. (서면 오색리, 2001. 6. 8. / 양병수, 남. 79)

 

5.8.권금성 유래

설악산 밑에 있는 복골(양양군 강현면이었다고 함)에는 그 곳에 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가로왕족 (김해 김씨)의 후손인 김장사가 살고 있었데요. 김장사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큰아들은 혼인을 하여 며느리만을 남겨두고 후손 없이 죽었데요. 둘째 아들은 청춘에 죽었고, 셋째 아들은 서른이 넘어 결혼하여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아기가 태어나고 세 살이 채 못되어 셋째 며느리도 죽었다네요.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혈육인 손자를 김장사는 애지중지 생각하나 큰며느리의 손자에 대한 구박이 심했다네요. 이 소문은 외할아버지 권장사 (강릉권씨)의 귀에도 들어갔지요. 권장사는 외손자를 뺏어 키우려고 찾아왔는데, 김장사는 뺏기지 않으려고 손자를 데리고 학수암으로 도망쳐 암자에서 공부를 시켜려 했다네요.
권장사가 또 쫓아오자 권장사는 밑에서 내려오라고 돌을 던지고 김장사는 위세어 그 돌을 받아 성을 쌓았구요. 이 성(城)이 두 사람의 성(姓)을 따서 권금성(權金城)이 되었다고 하네요. (서면 서림리, 1993. 6. 14. / 김동명, 남. 77)

7.지역의 명소

7.1.오색약수


계곡 옆 널따란 암반 위 세 개의 붉은 구멍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움푹 패인 주먹만 한 구멍에서 물이 퐁퐁 샘솟고 있다. 세상에 다시없을 약수라고 알려져 궁금한 그 맛은 인상이 찌푸려졌다 웃음이 나오는 맛. 이 독특한 맛이 바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설악의 오색약수이다.
자연이 만든 냉장고처럼 시원한 물이 솟는 약수는 예부터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빈혈 등에 효력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덕분에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오색약수를 찾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529호. 양양 서쪽 20㎞, 오색령 동남쪽 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7.2.범부고인돌


1973년 양양군 서면 범부리에서 주민들에 의해 발견돼 ‘범부리 고인돌’로 불린다. 범부리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무덤형태로 20m 간격을 두고 2기가 나란히 발견되었다. 남쪽에 위치한 1호는 탁자식의 변형으로 보이며 무덤방이라 불리는 내부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2호는 덮개돌이 둘로 갈라져 있고, 무덤방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2기 모두 크기와 형태는 비슷하다. 범부리 고인돌 근처 남대천 계곡 앞 오토캠핑장이 위치해 있다.

<출처: 양양관광>





 

7.3.한계령


오색령은 예로부터 양양(영동)에서 인제(영서)로 소금, 생필품 등을 운송하던 높이 1,004m의 고갯길이었다. 오색이란 이름은 마을에 다섯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생겨났다고 알려져 있다. 1981년 12월에 한계령 도로 확장 포장공사로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한계령 도로가 개통되었다. 한계령은 하늘벽, 옥녀탕, 장수대, 오색온천 등 설악의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며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까지 오르는 최단 코스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남설악 점봉산으로 갈 수 있는 등산로도 이곳에서 시작된다.

<출처: 양양관광>





 

7.4.오색주전골


설악산국립공원 내 오색약수터에서 3km 지점에 이르면 용소폭포, 12폭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 이곳에서 12폭포까지가 주전골로 불린다. 용소폭포 입구에 있는 시루떡바위가 엽전을 쌓아 놓은 모양을 닮아 주전골이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 이곳에서 승려를 가장한 도둑들이 위조엽전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남설악 가운데 가장 수려한 계곡과 고운 단풍으로 유명하며 고래바위, 상투바위, 여심바위, 부부바위, 오색석사, 선녀탕 등 기암괴석과 폭포가 이어져 등산로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출처: 양양관광>






 

7.5.오색리 삼층석탑


오색리 약수터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1km쯤 거리에 있는 절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은 옛 성국사지로 추정되는데 명확하지 않다.
대지에서는 법당 자리를 추측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증거와 석탑의 잔재들이 발견 되었고, 그중 완전히 무너져 있는 것을 1971년 복원해 다시 세운 것이 오색리 삼층석탑이다. 석탑의 각 전각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불탑으로 보인다.

<출처: 양양관광>





 

7.6.송천떡마을


양양군 서면에 위치한 송천떡마을은 마을에서 직접 농사지은 쌀과 직접 내린 꿀, 설악에서 흐른 송천계곡의 맑은 물로 떡을 만드는 곳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전통방식을 고수하여 떡메를 치고 있으며 사전 예약을 통해 관광객들에게 떡 만들기 체험도 제공한다.

<출처: 양양관광>





 

7.7.만경대


원시적인 비경을 간직한 남설악 '만경대'는 가을 단풍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남설악 탐방로 구간이 운영되고 있는데, 이 길은 오색약수터에서 출발해 단풍이 아름다운 주전골을 지나 용소폭포와 만경대로 이어지는 5.2㎞ 코스로 구성돼 있다.

남설악 오색지구 만경대 둘레길은 자연적으로 개설된 탐방로 였으나 1970년 국립공원 지정을 앞두고 폐쇄됐다가 47년만인 2016년 10월 임시 개방됐다.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한남초등학교, 상평초등학교, 상평초등학교 공수전분교, 오색분교, 현서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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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