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에 태어난 조화벽은 3.1운동을 기점으로 개성만세운동, 양양만세운동 등에 참여하는 등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압장선 여인으로, 특히 개성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죽가방에 숨겨 양양으로 돌아와 양양만세운동의 시작을 도았으며, 훗날 정명학원을 설립해 애국인재를 양성하였다.
►별칭 : ►성별 : 여 ►시대 : 일제 강점기 ►출생~사망 : 1895년 10월 17일 ~ 1975년 9월 3일 ►출생지 : 양양 ►본관 : ►주요업적 : 개성 3·1만세운동과 양양 만세운동 참여, 정명학원 설립하여 애국인재 양성 |
조화벽은 양양감리교회 전도사였던 부친 조영순과 모친 전미흠 사이에서 태어났다. 개화사상에 일찍 깨어 있었던 조화벽은 가족의 지지를 받으며 개성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개성 3·1만세운동과 양양 만세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의 거친 탄압이 있었던 만세운동에는 여성들도 함께 참여하였는데, 조화벽이 재학중이었던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1919년 2월 28일 개성 지역에 독립선언서 200여장이 전달되면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한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저지하였는데, 조화벽은 고향인 양양 지역에도 독립운동과 관련한 소식을 알리고자 고향으로 향했다.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조화벽은 가죽 가방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양양 대포항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조화벽이 목숨을 걸고 숨겨운 독립선언서는 양양감리교회의 청년 지도자인 김필선과 김주호 등에게 전달되며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만세운동 이후 조화벽은 양구로 피신해 신분을 숨기고 살다 호수돈여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공주 영명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한다. 이 때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혼인을 한 후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전파했으며, 급여의 일부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1932년에 정명학원을 설립하여 애국 인재 양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