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황성신문 사장을 역임하며 독립신문, 황성신문, 교육월보 등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썼다.
►별칭 : 치만(致萬), 한서(翰西) ►성별 : 남 ►시대 : 근대 ►출생~사망 : 1863년 ~ 1939년 ►출생지 : 서울특별시 중구 ►본관 : 함열(咸悅: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주요업적 : 양양군수, 황성신문 사장, 독립운동, 민중계몽운동, 무궁화 보급 운동 등 |
조선 한성부(지금은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1887년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관직에 나갔다. 이어 내무부 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기도 하는 등 현재 서울의 도로정비와 도시계획을 주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 양양군수 등을 지냈으며,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과정에서 서재필, 이상재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하였으며,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썼다. 배화학당과 상동청년학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보리울로 낙향하였으며 모곡학교를 세워 애국심을 주제로 한 노래를 지어 보급하기도 하고,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무궁화 심기 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