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 배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 중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함.
►별칭 : 자 중미(端甫), 호 연암(燕巖) ►성별 : 남 ►시대 : 조선 후기 ►출생~사망 : 1737년 ~ 1805년 ►출생지 : 한양 ►본관 : 반남(潘南) ►주요업적 :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집필, 행정가 |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1752년 16세 때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맹자>와 <사기(史記)>를 배웠다. 22세 때 부터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실학을 공부하던 이들과 교우하여 영향을 받았으며, 30세 때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교우하여 서양의 신학문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777년(정조 1)에는 벽파(僻派)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낀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연암은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얻은 것이다. 그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ㆍ요하(遼河)ㆍ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생기있는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와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고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배청론이 주류였기 때문에 그의 책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그의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있는 문체, 참신한 의견 등으로 인해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제릉령(齊陵令),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지어 바쳤다.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지원은 당시 홍대용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北學派)의 중심에 있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롭고 재치있는 문체로 당시의 사회상을 포착,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썼다. 그는 문체반정 때 정조에게 문체를 타락시켰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