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인산(因山)[1]에 직접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와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한 양양 유림의 대표 인물로 독립운동과 항일 애국함양에 힘썼다.
►별칭 : 자 사일(士一) 호 설초(雪樵) ►성별 : 남 ►시대 : 조선 후기 ►출생~사망 : 1859년 ~ 1932년 ►출생지 : 양양군 임천리 ►본관 : 함평 ►주요업적 :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 전개함. |
1545년 양양 부사를 지낸 이춘령의 10대 손이며, 1808년에 양양부사로 부임한 이광식의 후손으로 1859년 양양면 임천리에서 출생한다. 1884년 초시에 합격하여 1899년에는 대한제국 중추원의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한일병합 통치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3년에 도천면 중도문리(현재 속초시)에 쌍천서숙을 설립하고 후진 양성과 항일 애국정신 함양에 노력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경성의 고종 인산에 참례 후 경성의 만세 운동을 보게되었고, 독립선언서를 3월 말 몰래 숨겨 고향으로 돌아와 4월 4일 양양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4월 3일 임천리에서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던 중 일부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