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면

                                                                                                                                                                                                                                                           

1.개요

동면 또는 남면으로 칭하여 오다가 1911년 2개면이 합하여 손양면이 되었다.
38도선 이북에 위치하고 동쪽은 동해, 남쪽은 현북면, 서쪽은 설악산 일대인 서면과 접해 있으며 남대천 하류인 양양읍과 접해 있다.
예로부터 상양, 하양, 밀양 등 아늑하고 따뜻함을 표시하는 마을명이 전해져 쾌적한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설악산 줄기, 동해바다와 청정 하천인 남대천과 어우러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건강장수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산수가 맑아 휴양지로서의 자원과 연어를 체험ㆍ 연구하는 내수면생명자원센터 및 대명쏠비치, 골든비치 골프장, 강원외국어교육원, 오산선사유적박물관 등 아늑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고 인심이 따뜻한 지역으로 앞으로 급속한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2.인구

2022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 4.) / 단위 : 명
2,2282
총 인구수
1,151
인구(남)
1,132
인구(여)

4.지명의 유래

  • 손양면의 유래 : 손양면은 군소재지로부터 남방 4㎞지점에 위치하고 1914년에 동남양면을 합하여 손양면이라 명칭하였다.

  • 하왕도리(下旺道里) : 고려시대 때 판교리(板橋里)의 부속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 세조대왕이 월정사로부터 낙산사에 수행 중 이곳에 있는 청풍정(淸風亭)에 소요(逍遙)하셨으며 왕도리(王道里)라 하였다가 그후 다시 1개리명에 王字를 붙임은 왕께 불손하다는 고을 원의 뜻을 따라 旺字로 개칭하였다.

  • 간리(間里) : 약 200여년전부터 동쪽에 송현리 남쪽에 왕도리 북쪽에 월리가 있는데 그 사이에 형성된 부락이므로 간리(間里)라하고, 속칭 “새잇골”이라고도 한다.

  • 송현리(松峴里) : 옛날에 큰 소나무들이 뒷고개에 울창하였기에 松峴里라고 칭하였다. 본래 양양군 南面 지역으로서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이말(間村)정자동조구터를 병합하여 송현리라하여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수여리(水餘里) : 양양남대천의 물구비가 휘어 닿는곳이며 물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물이 모자라는 때가 없다 하여 수여리라 명명하였는데 속칭 “물넘이” 또는 “무내미”라고도 한다. 본래 동면인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당뒷말, 동구안, 바구매, 버덩말, 솔말, 흥덕말을 병합하여 수여리라하여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금강리(金崗里) : 고려 초에 선인이 지중지석(地中之石)이 여금견지고(如金見之故)로 금강리(金崗里)라 칭하였다.

  • 가평리(柯坪里) : 약200여년전까지 마을주위에 갈풀이 많이 자생하므로 가평리(柯坪里)라 칭하였는데 속칭 “갈벌”이라고도 한다. 본래 양양군 동면의 지역인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송전리(松田里) : 동쪽은 동해에 연접하고 동서북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여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마을로 주위에는 크고 작은 개와 웅덩이가 많아 옛 이름은 송호리(松湖里)로 칭하다가 그후 송전리(松田里)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속칭 「솔밭」이라고도 한다.

  • 오산리(鰲山里) : 마을 앞 해변에 오봉(鰲峯)이 있어 오산리라고 한다. 일명 오무(鰲舞)라고 하는데 파도가 치는날 멀리서 바라보면 오봉(鰲峯)이 춤추는 듯 한다하여 이름하였다. 또한 오산봉의 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명명하였다고도 하는데 본래 동면지역이 였으나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수산리(水山里) : 앞에는 동해바다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있으므로 수산리라 칭하며, 일명 수무라고도하는데 본래 양양군 동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학포리(鶴浦里) : 약500여년전에 적성동(赤城洞)이라고 칭하였는데 백학이 자주 모여있으므로 학포리라 칭하였다.

  • 도화리(桃花里) : 옛날에는 복숭아 나무(桃木)이 많이 있어 그 풍경이 좋아 그 이름을 도화리라고 한다.

  • 동호리(銅湖里) : 동쪽에 호수가 있었는데 그 호수의 빛이 동색같았으므로 동호리(구리개, 굴개)라고 칭한다.

  • 상운리(祥雲里) : 마을의 지형이 주마형국(走馬形局)이고 여운포리 岩(국암, 누룩바위)을 향하였으며 일출시에는 상운이 길게 뜬다고 하였으므로 상운리라 하였다. 또 옛날 상운리 어디엔가에 상운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상운리라고 칭하였다고도 한다. 본래 양양군 남면지역으로 조선조때 상운역이 있어 역말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터, 정잣말을 병합하여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여운포리(如雲浦里) : 본래는 연포였었는데 발음의 착오로 지금은 여운포리라고 부른다. 본래 양양군 남면 지역으로서 연개가 있으므로 연개 또는 여운포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 하양혈리(下陽穴里) : 지형이 멀고 깊어(迂澳)하여 양기를 빨아들이므로 양혈(陽穴)이라고 칭하였다. 1920년도에 상하 2개리로 분리하여 하양혈리가 되었다.

  • 상양혈리(上陽穴里) : 1920년 각리 행정구역 개편시 하양혈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이름하였다.

  • 밀양리(密陽里) : 약 400년전부터 파평윤씨가 거주한 곳인데 남향으로 겨울이 늦게 들고 봄이 일찍 와서 기후가 밀온하므로 밀양리라고 함. 본래 양양군 남면의 지역으로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으며 예전에 행남학교 (杏南學校)가 있었으며 행남(杏南)이라고도 칭하였다.

  • 상왕도리(上旺道里) : 조선시대 때 세조대왕이 지나간 마을이라 하여 “왕도리”라 하였는데, 1913년 동남양면을 병합하여 손양면으로 개명하고 각리 행정구역 개편시 왕도리를 上下로 구분할 때 약 130년전 해운선생이 서당을 창설하여 “서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上字를 붙여 이름하였다.

  • 와리(瓦里) : 약 200여년전에 손씨가 거주할 때 토와공장을 설치하였다하여 와리라 칭한다.

  • 우암리(牛岩里) : 마을에 소와 흡사한 암석이 있으므로 우암리라고 한다.

  • 주리(舟里) : 약500년전 마을 형태가 배형국과 같다하여 주리(舟里)라고 칭하였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항구처럼 생겼기 때문에 마을 아래에 내려가 살면 死하고 중턱에 올라와 살면 生한다하여 대부분의 주택이 마을 산쪽에 많이 치우쳐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을아래 주민은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 남양리(南陽里) : 고려시대에는 판교리(板橋里)라 하였으며 이후에는 삽존리(揷存里)로 개칭하였는데 서기 1955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석계리, 부소치리를 병합하여 남양리라 하였다. 본래 양양군 남면의 지역으로 주위 산림에 섶이 무성하여 섶좋은리라 하던 이름이 변음되어 삽존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양면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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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양군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쿵쿵산 유래

쿵쿵산은 송정리 마을의 아주 유명한 산이래요. 이 산에 오르면 누구나 다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 있는데, 발을 구르면 땅속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요. 마치 땅속이 텅 비어 있는 듯해요. 이 마을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한 남자가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가 웅덩이에 빠졌는데 그 속에 묻혀서 갇혀 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산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그 안에서 살려 달라고 퉁퉁 소리를 낸다고 해요. 이 산에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다녀갔지만 그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지요. 또한 군인들은 북에서 땅굴을 만들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사했지만 그것 역시 아니래요. (손양면 송전리, 1999. 6. 8. / 김옥성, 여)

 

5.2.정철과 청평사 부처

객사죠. 우리 여기 인제 도청 소재지. 그전엔 원주가 도청소재진데,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춘천 가면 시방 저게 지금 춘천댐을 막아 물이 차 있대요. 그래서 질이, 통로는 없어지고 산 옆으로 재고 댕기더구만 거기 청평사라는 절이 있어요. 거기 가 가주구, 청평사에 가 가지고 청평사를 혈도 지르고 아매 이랬던 기래요. 그리고 거다가… 그걸 좀 얘기 해야 되겠네. 청평사 가서, 인제 가보니까, 절을 참 치장을 잘 하고 있으니께만은 그 정철감사 말씀이 “느 부처가 밥 먹느냐?” 그래, 그 동자아가 하나 있다가 “예, 부처가 밥먹습니다.” 이랬거던? “그래 너 밥 지어 드려라.” 정철 감사가 그래. 아, 감사 그랬는데 어떡할래요. 이를테면 죽었지 사나요. 밥을 안먹으면 그래 중이, 신도가 몇이나 되니, 신도가 모두 듣는다면 모두 서러우니께 눈물을 흘리며 이제 이러니께만은 노장 스님이 하나 있다가, “야, 우리가 죽더래도 할 건 해야 되잖느냐?” “해라. 밥 지어라.” 그래. 밥을 지어설라무네 불경에다 떠다 놓으니께만, 절에 가면 오방나한(오백나한)이라는 이것 만큼 쌓아 쭉 앉았잖아요? 아, 오방나한 맨 끝에 수자가 손을 걷고 대들더니만 밥을 일일이 조금씩 떠설라무네 그 부처님한테 먼저 놓고는 자기들이 일일이 쭉 돌아 앉아선 노놔 먹는다 이거야. 그 밥이 하나도 다 없어지더라 이거야. 그래 정철감사가 거기서 아, 부처가 도술이더라 이거야. 그래 정철감사가 거기서 아, 부처가 도술이 있구나. 겁이나설라무네 점심 참도 안먹고 말타고 춘천 그거 기네기 배리라고 있어요. 인제 시방 호수 막는 걸 잊어 버렸구만. 그 배리 나오다가 말이 꺽척 뛰며, 놀라서 꺽적 뛰는 바람에 배리에 내리굴러서 오사했다는 전언도 있고 이러는데, 그거 우린 보지 못한 일이고. 그 정철감사가 그렇게 심술이 많더래요. (손양면 상운리, 1996. 6. 7. / 김규옥, 남. 88)

 

5.3.첫날밤에 애기 난 각시

장가를 가 가지고 예전엔 부잣집들, 귀가집들은 당일로 시집에 귀가를 안하고 친정집에서 결국은 첫날밤을 잤어. 첫날밤을 자는데 아, 이 새 아가씨가 임신을 해. 애기를 낳아. 그래 그 신랑자가 졸장부고 우리처럼 소인이면 그까짓 거 버리고 가면 이 사람은 아주 버리는 사람이다. 그래 이젠, 그땐 종을 부릴 땝니다. 불러 일어나라 하니까 종이 문 밖에 와 “왜 이러십니까?” 하니까. 내가 이제 밤에 집에, 집에서 버릇이 돼 있어. 집에서 잘 적에 미역국 한 그릇에 흰 밥 한 그릇씩 꼭 먹고 자기 때문에 그거 해오너라. 그래 이제 “해 왔습니다.”, “거다 놓고 가거라.” 그래 거다 놓고 가니께 당신이 이제 갖다 들여다가 참 그, 새악시, 생산한 아가씨에게 먹으라고 하니 참, 체면에 먹을 수도 없고 안먹을 수도 없고 하니까. “안먹으면 내가 죽이던지 버려, 먹어야 한다.” 그러니께 할 수 없이 먹었어. 밤에 일찌감치 새벽에 이제 시집으로 가잖아. 그래니 나쁜 빨래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건 말이 없고. 그래 새 옷을 딱 해 입고 치장을 해가. 그런데 밤에 이 양반이 애기를 껴안아다가 솜에다 싸서 다리 밑에다, 그 당신 가는 다리 밑에다가 넣어 놨어. 그래 놓구선 아침 일찍 날 새기 전에 치행을 하니 치행을 갔지. 가다가 다리밑에서 공연히 설라무네 여기서 어디 애기우는 소리가 나니 찾아보란다. 하인들더러. 그래 애기 우는 소리가 안나는데도 자꾸 찾아 보마. 당신이 두고 오셨으니께. 그래 다리 밑에 가보니께 그래 여기 뭐 있잖느냐? 그게 뭐 솜 뭉텡인데 솜 뭉텡이를 헤쳐봐. 그래 헤쳐 보니까. 아, 옥동자가 하나 있어. 그래 여깄는데 너희끼리…
그래, 양반은 다르구나. 그래서 애들은 가마에다 넣고 가지가다가 그걸 키울 생각을 해 보니, 자기 부인이 젖은 있어서 나겠지만 그걸 그 빨릴 수도 없고, 당신 고모가 하나 가는 길 옆에 있는데 참 자식이 없는 양반이여 그래, “거길 가자. 들려가자. 여기 고모댁이 있으니.” 그래 고모 보고, “고모, 내가 장개 갔다 오다 고모댁을 지나갈 수 없어 들렀습니다.” “아, 그게 무슨 말이여. 제일 길한 일이 오늘은데 그 뭣 하러 들렀냐?” “이유가 있죠. 내가 오다가 애길 하나 주었는데 애길 키울 수가 없소. 고모가 애기가 없으니 이걸 좀 잘 키우슈.” 그래 새 서방이 그러니 안 키운다고 할 수도 없고 당신이 아들도 없고 하니께 “그래라.” 그리고 받아 키웠어.
그래 그 다리가 뭐냐하면 광천교거든. 광천교. ‘너를 광(廣)자. 샘 천(泉)자’ 광천교여. 그래 광천교라 하는데, 과(過) 광천교 하다가, 광천교를 지내, 득(得) 득소아하야. 조그만 아이를 얻어, 득 소아하야, 현 상고모택이라. 고모댁에 드렸다. 그런 얘기도 있는데 그래서 그 신랑자가 어느 양반보다 박현군자다 이거여. 그래 지금 나 같으면 에이 이까짓 너같은 넌 안데리고 산다. 그래 아가씨를 위해서 마누라를 폭로하면 후세에 이를테면 숭도 되고 하니께이 이거 안되겠다. 그래서 이랬는데. 그게 왜 발설이 잤느냐.
그래 이 양반들이 지금처럼 학생들처럼 대학교 다녀살라무네 출세할라고 공부를 해. 그래 밤낮으로 하지. 하는데… 불을 켜놓고 이렇게 인제 우리처럼 오두막사에서 두 사춘끼리 공부를 한다. 자꾸. 그래 다 배워가지고 지금 뭐? 공부하는걸 뭐라고 그래? 응, 재수를 해. 하는데 재수를 밤새도록 하다가 힘들고 하니까 쉬어서 할라고 쉰다. 그러니께 이제 두 사춘끼리 우리처럼 얘기를 하려고 그랬던 이, 참, 당신 장개 가설라무네 부인, 부인을 버리지 못해서 핸, 지가 얘기 솜씨가 없어. 사춘은 얘길 잘 하는데.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얘기할께. 사춘한테, 그래하니 아, 뭐 얘깃거리가 있나, 자꾸 하라고 권하거든. 내 사실 내가 한 일을 어, 그래 한 일도 얘기허구 그랬더니 그런 얘기를 했거든. “내가 사실은 자네 형수가 사실 이렇게 된 걸 애 버리면 안되겠으니 내가 갔다가 우리 고모댁에 갖다 드렸는데, 우리 고모가 키우는 애가 그런 애다.” 그랬더니만, “아이 참, 형님같은 사춘 형님같은게 없다”고 이러면서 절을 하거던. 하니께이 “아, 내가 사춘한테 공절을 받아 되겠니” 하고 이제 그 형님이 일어나, 일어나 다시 절해. 자꾸 절을 해. 둘이서. 하내(하나) 앉으면 하내 일어서서 절하고 그래. 그래 우리나라 현군이 누구시냐. 숙종대왕이 현군이시거든요. 숙종대왕이 인제 구할려구 밤에 야행을 이렇게 하는데, 아 열두시가 됐는데 불이 환한데 보니께. 그때는 유리창도 아니고, 거기 환해서 뭐이나 하고 침으로 이렇게 구멍을 뚫고 보니께. 아 웬 사람, 선비들이 자꾸 절을 해. 갑자기 에헴하고 설라무네 “내 불이 환해서 하룻밤 좀 잠만 자고 갈라고 들어왔다”고 그래. 그러면서 그러니께 “아, 그럼 여기서 쉬시며 가셔.” 그래 잔다고 그래설라무네 물었거던. “당신들이 왜 자꾸 둘이 절을 하냐” 그러니까 “아, 그건, 그때는 뭐 어르신네라고 그러니, 아, 어르신네가 알게 아녀.” 자꾸 그러니께 노인이 그러니께. 자꾸 물으니께 헐 수 없이 얘길 했어. 그래서 그 얘기가 민간에 전파됐다는 거여. 그래서 그 양반이 대번 이조판서 했다는거 아녀. (손양면 상운리, 1996. 6. 7. / 김규옥, 남. 88)

 

5.4.누룩바위 전설

임진인지 뭔지 난 그것두 몰러. 덮어놓구 의병난리라 그래. 그 일본놈이 여기와서 그 무신기라 그러드라. 그때 왜 논개 기생이, 왜 그 사람을 죽였잖아. 왜 논개 기생 그럴직에 그때여 그땔 것 같애 내맘에. 내 똑덱인 몰라두. 저 상완동네 이 아랫동네 거그 와서 주둔해가주 있을직에 말을 갔다 저 말뚝백이라는 데가 있어. 말 갔다 세워 나서 말뚝배기라 그랬어. 거기다 말을 잔뜩 세워 놨는데 “말죽을 끓여 내오너라” 영을 내우니까내 말짱 논동에다 끓여 내왔더래 놋동에다. “이느무 집, 이느무 동네가 무신 은기루 이렇게 잘 사나” 하구서내 자윌 들어다보고, 저 말하자면 뭐라 그나 나 무식해서 말두 못하겠네. 마음엔 그득해두 말할 줄을 몰라 내가. 나가서 이렇게 사방을 돌아다보니, 저 건너 연포로 가는데 누룩바위가 있어. 누룩바우 그기 이짝으로 똥을 눠줘서 그렇게 술두 흔하구 잘산다구 그러드라구. 그래가주 그 누룩바우를 그 군대들을 가주와 다 허물었어.
다 허물어 가주구 뚝뚝 땅에 떨어져서 군데지구 자빠지구 이래 지금두그래 그 고냥있어. 지끔두. 또 요렇게, 요렇게 쌓아논 것두 있구. 옛날에 누룩은 이루구 빤뜻빤뜻하게 요렇게 네모잽이루 누룩을 접었거든? 근데 그 형국으로 그 누룩바위가 있어. 술 해먹는, 술 해먹는 누룩. 밀가리 뭉쳐서 띄워 가지구 쌀을 쪄가지구 거기다 버물쳐서 단지에다 넣구 푹 덮어 놓으면 괴지. 괴. 긴데, 그기 인제 반작반짝하게 인제 돌이 저기 상운 버덩 핵교집이 이렇게 디다보는데 가면 저 연포라구 있잖어? 그 산에 그런 바우가 있다구. 그걸 다 허물어 놨어. 그리구서 내 인제 물을 또 질어다 먹은 무쇠두멍(가마, 큰 솥) 무쇠두멍 이 옹구루 된 맨드는 두멍을 안하구 뭐 다 그럴까마는 몇 집이 그럴 기 있었어.
무쇠루 맨드는 두멍을 물 두멍을 했어. 또 그건 내가, 내가 알어 내가 직접 알어. 그이 그전에 소사숙이네가 그 두멍이 있대. 천둥하리, 무쇠두멍 그리구 놋동, 놋동, 그 놋동에다 백판 말죽을 쑤어가지구 나가겠나. 그니까 그렇게 했지. (손양면 상운리, 1993. 6. 5. / 박연행, 여. 81)

 

5.5.정철과 놋대야

정철 송강 선생께서 관찰사로 와 계실 때 이 마을을 지나다가 잠깐 쉬어 가시는데 마을 사람들이 말먹이로 놋대야에 말죽을 쑤어 주는 것을 보고 “이 마을은 어찌 이렇게 잘 사느냐”고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못과 큰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저것 때문에 잘사는구나 하여 그 돌을 뭉게고 못을 메웠다고 합니다. 근데 그 이후로는 마을이 줄고 풍족하지 못하였다고 하더군요. (손양면 상운리, 1999. 6. 8. / 함병길, 남. 80)

7.지역의 명소

7.1.오산리 선사유적 박물관


1977년 쌍호를 매몰하고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석기, 토기가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여러 차례 조사 결과 총 6개의 자연층위가 나타났으며, 이 중 하나의 층에서만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민무늬토기, 덧띠토기, 뾰족바닥형 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주로 발견되었으며, 한국 최초 강자갈을 타원형으로 쌓아 만든 야외 돌구이 돌무지 시설도 발견되었다. 유적지 바로 옆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관람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다.

<출처: 양양관광>





 

7.2.양양국제공항


과거 속초공항과 강릉공항의 대체를 위해 2002년 4월에 개항한 공항으로 영동권의 중심 거점공항이자 강원도 관광의 항공관문으로서 연간 317만명을 처리할 수 있다. 항공사 플라이강원의 거점 공항이며, 김포, 제주, 부산, 광주, 대구를 잇는 국내선과 중국, 타이완 등을 잇는 국제선이 있다.





 

7.3.양양사이클경기장

2012년 건립된 것으로 매년 ‘양양 전국 사이클 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평소에는 이용 시간을 정해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지하1층, 지상3층, 관람석 1,350석 규모이다. 경기장 내에는 사이클경기장과 축구가 가능한 인조잔디 운동장, 400m 8레인의 육상트랙이 갖춰져 있으며 사전에 사용허가 신청 시 경기장 대여가 가능하다.

<출처: 양양관광>





 

7.4.수산항 요트마리나

40척 규모의 플로팅형 계류시설을 갖춘 수산항의 요트마리나는 서울-양양 고속도로 개통으로 교통망이 한결 편해져 더욱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다. 현재는 강원도 요트협회에서 위탁 운영 중에 있으며 해양경찰청장배 요트대회, 양양군 요트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 개최로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대형 주차장과 샤워실, 화장실, 휴게실, 교육장, 테라스 등 각종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손양초등학교, 송포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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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