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북면

                                                                                                                                                                                                                                                           

1.개요

천혜의 아름다운 쪽빛 바다와 유규한 문화유산, 순박한 인심이 살아있는 현북면은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간직한 고장이다. 총면적은 164.04 ㎢에 15개 행정리로 서쪽으로는 강원도에서 물이 제일 맑다는 법수치리 계곡이 있고 동으로는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루러진 하조대를 접하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명주사 동종 (강원유형문화재 64) 과 부도군 (강원문화재자료 116호),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만년을 보내며 청유하던 하조대와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38선 경계가 있으며, 어성전 2리의 농촌테마마을인 탁장사마을과 매년 1월 1일 하조대와 기사문항에서 해맞이 축제를 개최하고, 가을이면 송이향에 취하는 고장이다.

2.인구

2022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 4.) / 단위 : 명
2,609
총 인구수
1,348
인구(남)
1,261
인구(여)

4.지명의 유래

  • 현북면의 유래 : 본래 동산현의 지역인데 조선시대 때 동산현의 북쪽이라하여 현북면이 되어 도동(陶洞), 末谷, 어성전, 광정, 明珠등의 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현재와 같이 14개리를 관할하였다.

  • 하광정리(下光丁里) : 예전에는 광정리(廣丁里)였는데 그후에 광정리(光丁里)로 하였고 上中下의 中에서 아래에 있음으로 下光丁里라고 한다. 현북면의 소재지로서 면단위 각급기관 단체가 있다.

  • 중광정리(中光丁里) : 예전에는 광정리(廣丁里)라 하였으나 그후 마상초에 광정리(光丁里)라 기록되어 그대로 개명하여 오다가 인구증가로 인하여 상,중,하로 분할하였으며, 그 중 가운데에 있으므로 中光丁里라 부르게 되었다.

  • 상광정리(上光丁里) : 상광정리는 현북면 중심지며 면사무소와 보통학교가 이곳에 설치되었으며 최초에는 광정진(廣丁鎭) 이였던 것이 인구의 증가로 상,중,하로 분할하여 그 중 위쪽에 위치하므로 상광정리라 불렀다. 광정진(廣丁鎭)의 유래는 지금의 중광정리와 본동 경계지인 잣골뒷산 능선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광정진을 설치하였으므로 광정진이라 불렀다. 지금도 진의 성지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

  • 기사문리(基士門里) : 기사문리는 내외부락(內外部落)으로 구분하여 옛날에는 내칭은 초진(草津)이고 외칭은 기사진(奇沙津)으로 칭하였다. 해변백사장을 걸어가면 발자국 소리가 이상하게 나기에 오사(嗚沙)라고 했다. 근래에 와서 기사진(奇沙津)을 기사문리(基士門里)로 개칭되었다.

  • 잔교리(棧橋里) : 마을중간으로 하천이 형성된 관계로 하천을 건너기 위한 잔교(棧橋)가 많았다하여 잔교리라 한다. 일명 잔다릿골이라고도 한다.

  • 말곡리(末谷里) : 옛날에는 하곡리(荷谷里)라고도 하고 미곡리(未谷里)라고 하였는데 未字와 末字가 비슷하므로 未字가 末字로 와전된 것이다. 일명 “머일”이라고도 한다.

  • 대치리(大峙里) : 대치리를 한재라고 부른다. 대치리의 大 字는 (클 한)字이고 峙 字는 (재)字로 한재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동으로 임재, 서에는 희묵재, 남으로 직시재, 북으로는 귀골재로서 한재씩 넘나드는 관계로 큰 고개 한재라고도 한다.

  • 명지리(明池里) : 옛날 마을 한가운데 적은 못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은데도 물이 맑아 노는 고기를 헤아릴수 있으리 만큼 수명(水明)하였으므로 명지리(明池里)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곤죽골 소맷골 옹기점을 병합하여 명지리라 하였다.

  • 어성전1리(漁城田一里) : 마을 주위는 산성을 이루고 마을은 익지형(益地形)으로 기름진 전답이 수십만평이 있고 오대산, 응복산(鷹伏山)으로부터 발원하여 흘러오면서 여러 곳의 대소계곡의 물이 합수하여 평탄한 하상이 넓게 펼쳐지면서 물고기가 많이 서식함으로써 장작불을 때고 이밥먹고 고기잡아 배불리 먹으니 살기 좋은 이상향을 이룬 곳이라하여 어성전(漁城田)이라 하였다.

  • 어성전2리(漁城田二里) : 어성전리로 되어있는 것을 6.25전쟁 후 어성전리를 분할하여 1,2구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은 어성전 2리라고 한다.

  • 원일전리(元日田里) :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남대천으로 흐르는 하천이 평탄한 이 마을 중심부에 이르러 비로소 노기를 푸는 듯 소리 없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다하여 와천동(臥川洞)이라고 하였다가 그 후 원일(元日)이라는 화전민이 전토를 개척하여 점차 입주를 하게 되었으므로 원일전리라고 전하여 온다.

  • 장리(獐里) : 옛날에는 노루가 많이 서식하였다하여 장리(獐里)라고 칭하였는데 속칭 “노루골”이라고도 한다. 또한 옛날 뱃터말 근방에 겨울에 눈이 내려도 항상 눈이 녹아 없어지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곳에 노루가 자주 머물다가는 길지로 장흥사(獐興寺)라는 절을 지었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도리(陶里) : 마을에 점토가 많이 있어 토기를 생산하던 곳이라 하여 도리라고 하는데 속칭 “질골”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부터 고려 초엽까지 현읍(縣邑)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 면옥치리(綿玉峙里) : 옛 이름은 면록치리(眠鹿峙里)였는데 그 후 오응길(吳應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모가 옥같이 담백하였으므로 이런 世人物이 선선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개칭하여온 것이다.

  • 법수치리(法水峙里) : 남대천 남쪽 상류 일부가 여기서부터 발원되므로 마치 불가의 법수를 삭출(索出)한 것과 같다는 전설에 의한 이름이다. 또한 대승의 편(便)이 고기로 화(化)한 전설을 가진 법수(法水)가 흐르는데서 법수치리라고 한다.


<출처: 양양군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샘젯산 유래

앞에 있는 산이 800 고진데 샘젯산인데, 왜 샘젯산이라 부르냐면 전에 꼭대기에 샘이 나서 그러는데 지도엔 천치산이라고 나와 있어. 그 산엔 전설이 있는데 샘젯산에서 약 4km 꺾어진 곳에 가면 여운포가 있는데 거기서 3km 정도에 용네미란 곳이 있는데 전에 큰 연못이 있었다는데 그 연못에서 용마가 나와서 그곳을 넘어 다녔다고 해서 용네미라고 하는거야. 왜 넘어다녔냐면 옛날에 장사가 있으면 반드시 용마가 따른다고 했는데 장사가 나와도 용마는 나오지 않았지.
용마를 기다리다가 목이 타 물을 마시면서 왼팔을 돌에 놓고 무릎을 끓고 앉았는데 그 자리에 그 자국이 남았다고 해. 바위가 있었는데 전엔 그 바위를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산에서 굴려서 지금은 그 바위를 찾을 수 없어. 그래도 용마가 나오지 않아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하고 그 장수를 기다리면서 연못을 넘어 다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해. 그 용마가 용네미를 넘어 다니다가 장수가 없으니까 도망쳤고. 용네미에서 한 1km 정도 가면 용골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 마을 사람들이 용마를 잡기 위해 고리를 만들어 거기다 놓았다고 해서 용고리(용골)이라 하는거구. 그 후 용도 행방불명됐어. 연못에도 누룩바위란 곳에 그곳에서 장수와 용마가 만나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는 전설이야. (현북면 말곡리, 1999. 6. 15. / 김흥기, 남. 77)

 

5.2.어성사와 어성전

이 동네 서당을 모시는데 시방은 그 절을 짓고 가서 살았단 말이야. 그래서 그 주지스님이 절 이름을 지야 되겠는데. 뭘 어떡해 짓느냐. 여 고기가 많거든. 어성전에. 내천에 고기가 잡종 고기가. 민물고기가 많으니. 고기 어 자가 아니고 고기잡을 어 자를 넣어서 서두를 놓고, 삼 수변에 고기 어(漁)자야. 고기 잡을 어라구. 그 고기 잡아 먹어두 좋다. 여기가 살만한 곳이다. 여기 고기잡을 어 자를 넣구. 도적 때문에 성을 쌓기 때문에 잿 성(城)자를 넣어. 그래가지구 어성사 절 사(寺)자 넣어 가지구, 어성사라구 명칭을 걸구. 중이 살았거든. 그 후에 이제 민가가 들어 오구 여기에 강씨, 함씨, 이씨가 그 전에두 이제 많이 왔다갔는데. 그 뭐야 자손이 없이 흘러가구. 여기 시방 현재 토백이로써 강씨, 함씨, 이씨 그 세 개의 씨족들이 제일 먼저 왔다는 곳이 여기야.
그래 그 민간인들이 들어와 사니. 뭐 여기 어디서 사는지 그 위치를 모를꺼 아니야. 저 하촌에 들어가니깐 “당신들 어서 왔소?” 하니깐 어성사란 절이 있었으니깐 그걸 따가지구 절 사 자를 빼구 밭 전자를 넣거든. “어성밭에 삽니다!” 그런데 그 후에 지금까지 내려오다 1922년 6월 달에 이제 “대하개토”를 했거든. 일본 사람들이 지도를 내구 개인 토박이를 했단 말이야. 그때 이제 각 부락에 댕기면서 그 지역에 와서 그 주민들한테 물었단 말야. “여기 무슨 곳이냐?” 그 “어성밭”이다. 그 이제 일본말은 다 동양삼국은 다 한문으로 쓰니까 같단 말이야. 뜻이. 그래 밭 전자니까 밭이라구 인정해 가지구. 어성전. 그래 마을 리자 넣어 가지구. 그래 여가 어성전리야. 그래서 여길 첨에 진게 절이 어성사라는데 있었다는거는 거지.
그 절은 다 이조때 없어지구 갔지만은 그래서 그 터의 명칭이 지금까지 불려 내려져오는 ‘어성밭’ ‘어성전’이 됐다구. 지금도 한 80인 이상 먹은 저 하촌에 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80이 뭐야. 한 90정도 먹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성전이라구 안 그러구 “어성밭에서 왔소” 이런다구. 내가 저 현북 단위 조합장을 79년도에 하는데. 저 하리. 장조리 이런데. 노인들한테 인사차 가니까. “조합장이 어서 왔소?” 그래서 “어성전서 왔습니다” 하니깐 “아이구 어성밭에서 왔구만” 아직까지 그런 전설 많이 있어요. (현북면 어성전리, 2001. 6. 21. / 김흥기, 남. 77)

 

5.3.대승폭포 유래

대승폭포 유래가 그 옛날 노인네들이 개울에 나아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도승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고기를 먹어봐라”시켰단 말이야. 도승이 안 먹겠다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은 “왜 고기를 먹으라고 그러는데 안 먹고 그러느냐” 그래서 도승이 할 수 없이 그 고기를 먹고는 폭포 위로 올라가서 궁댕이를 까고 대변을 봤단 말이야. 그 대변이 고기가 되어서 살아 나왔다고 하지. 예전에는 거대한 폭포였으나 공사로 길을 내면서 도로가 많이 높아져 폭포가 작아 졌어. (현북면 법수치리, 2001. 6. 29. / 김용한, 남. 70)

 

5.4.길 밝혀준 원일전리 호랑이

마을 사람들은 밤중에 횃불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물려간 사람을 찾아 헤맸지. 한참을 찾아 다녔는데 호랑이에게 물려갔던 사람은 머리가 가지런히 빗겨진 채 놓여 있었다고 하더군. 호환을 당하는 집안은 따로 있었다고 해. 옛날에는 이 마을에 도깨비불도 있었다고 하구. 밤만 되면 산 위 아래로 주룩주룩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했다고 하는군. 그리고 그 도깨비불에 홀려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지구. 이 마을은 태백산맥의 동쪽인 만큼 눈이나 비가 많이 와. 그 때문에 생긴 전설인지 모르지만 겨울에 온 마을과 산을 하얗게 덮은 눈이 사람도 집도 많지 않은 이 마을 사람들에겐 아름답기보단 적막하고 공포스러웠을 것이야. 눈길에 홀려 눈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생긴다는 전설은 그런 이유에서 생긴 것 같구 말이야.
한 여인이 양아치 고개에 살고 있었어. 어느 날 그 여인의 아기가 병이나 의원에게 데리고 갔어. 아기의 병은 혀 밑에 혀가 나는 병이었는데 그 당시의 치료법대로 은을 이용해 그 곳을 지졌어. 그래서 큰 의원이 있는 양양 번화가로 가려고 밤중에 급한 발길을 산길로 돌렸다.
온 산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갑자기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호랑이가 나타났어. 여인은 깜짝 놀랐으나 자신을 헤치지 않고 밤길을 밝히며 인도하는 호랑이가 든든해졌어. 한참을 가고 있는데 멀리 위쪽에서 말꾼이 말을 끌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어. 여자 혼자의 몸인지라 그 여인은 옆으로 몸을 숨겨 말꾼을 피했지. 그러는 사이에 호랑이가 사라져버렸어. 다시 캄캄해진 산길을 두려움에 떨며 가니 잠시 후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호랑이를 만났데, 그 호랑이는 그녀가 양양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를 안전하게 인도해 준거지. (현북면 원일전리, 2001. 6. 9. / 남궁금옥, 여. 47)

7.지역의 명소

7.1.하조대

해변에 기암적별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꼭대기 노송이 자리하고 있다. 양양 최고의 경승지로 꼽히는 곳으로 1955년 건립된 작은 정자(하조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풍경이 일품이다. 하조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휴양한 조선의 개국 공신, 하륜과 조준의 앞 글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2009년 명승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하조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 고운 모래를 자랑하는 하조대 해수욕장이 위치해 있다.

<출처: 양양관광>





 

7.2. 기사문항

어촌체험, 낚싯배 체험, 방파제 낚시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 관광·체험형 항구이다. 특히 기사문항의 방파제 낚시는 풍부한 어량으로 다양한 어종을 낚을 수 있어 낚시꾼들에게 포인트 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항구의 기사문마을에는 옛 장터 풍경, 3·1만세운동 모습 등 문화적,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이 그려진 ‘추억의 벽화골목’이 조성되어 있으며, 3분 거리의 기사문해수욕장은 서핑과 해수욕을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7.3. 명주사 동종

고려시대인 1009년 창건된 양양 명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종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이다. 1704년(숙종 30)에 제작된 조선 후기의 범종으로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된다. 높이 약 83cm의 종에는 합장천부보살상과 쌍룡, 범자문, 보살, 기하학적인 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다.

<출처: 양양관광>





 

7.4.명주사 부도군

명주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총12기의 부도로, 승려들의 유골이나 사리 등이 보관되어 있는 무덤을 뜻한다. 12기의 부도군은 원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모아 보존하고 있다. 12기의 부도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7기는 원당형, 5기는 석종형에 속한다. 현재 4기의 비석과 함께 명주사 부도군 밭에 남아있다.

<출처: 양양관광>





 

7.5. 3·1운동 만세고개

현북면 기사문리 관고개였으나 만세운동 이후 만세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양양에서 일어난 양양 기미 독립만세운동은 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으로 애국지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3·1운동 유적비를 설치하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현북초등학교, 광정초등학교, 현성초등학교
중학교 : 현북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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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