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면

                                                                                                                                                                                                                                                           

1.개요

양양군의 38도선 이남에 위치하여 해안과 가까우며, 논 면적이 밭보다 약간 넓다.
양돈, 소 사육이 활발하고 수산물 어획량도 많다. 어업의 중심지는 동산리, 인구리, 남애리이다.
인구리와 남애리에는 죽도와 남애해수욕장이 개발되어 있다. 주민들이 거리 관계로 주문진과 강릉을 생활권으로 한다.
문화재로는 포매리의 백로 및 왜가리번식지(천연기념물 229), 김택준가옥(강원유형문화재 90), 김성래가옥(강원문화재자료 79), 조규승가옥(강원문화재자료 80), 후포매리 신라고분군 등이 있다.

2.인구

2022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 4.) / 단위 : 명
2,953
총 인구수
1,526
인구(남)
1,427
인구(여)

4.지명의 유래

  • 현남면의 유래 : 현남면은 동산현의 옛 땅이니 동산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현남이라 불린다.

  • 인구리(仁邱里) : 인구리는 해송정(海松亭)으로 인구역(仁邱驛)이 설치된 후 인구(仁邱)라 칭하였으며 그후 민가의 증가로 말미암아 1리, 2리로 분리하였다.

  • 죽정자리(竹亭子里) : 고려말기에 향교 소재지로서 뒤산에 죽림이 울창하여 추절(秋節)에 사람이 대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감을 따먹을 정도로 대나무가 굵었다고 하며 그후 죽리(竹里)라고 부른다고 한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리(일명 댓골)와 정자리(정자골)를 병합하여 이름지었다.

  • 광진리(廣津里) : 과거 큰 바다라고 불러왔는데 그 후 광진리(廣津里)라고 부르고 속칭 “광나루”라고도 칭한다.

  • 포매리(浦梅里) : 망월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세가 매화가지모양으로 형성되어 개매(開梅)라 하다가 그 후 지금과 같이 개(浦)가 이루어졌으므로 포(浦)字를 따서 포매(浦梅)라고 부른다고 한다.

  • 견불리(見佛里) : 현재 거주하는 조씨선조 모인의 대과급제 당시 부처님이 현몽되어 등과하였다는 전설로 견불리라 칭한다. 지형이 “노승예불”의 형국이라하여 견불이 변하여 존불이라하며 또는 개매위쪽이 되므로 웃개매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견불리라 하였다.

  • 남애리(南涯里) : 포매(浦梅)의 매화가 결실하여 남애지역으로 향하여 떨어지는 모양이기 때문에 낙매(落梅)라고 불러오다가 그 후에 남쪽바다라는 뜻으로 남애(南涯)라고 개칭하였고 자연인구증가로 1,2,3,4리로 분할하였다.

  • 원포리(遠浦里) : 과거 임호정리에 속하여 있었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므로 머지개라 하였고 최초에는 인구곡(麟邱谷) 인구역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 지경리(地境里) : 과거에는 임호정리에 속하였고 그 당시 주위가 방축이었고 강릉과 양양의 군계(郡界)였기에 지경리라고 한다.

  • 임호정리(臨湖亭里) : 임호평야가 과거에는 호수로서 이름이 임호(臨湖)라고 하며 당시 부근에 정자가 있었기에 임호정(臨湖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입암리(笠岩里) : 마을 남쪽산에 암석이 있는데 그 암석의 모양이 갓과 같다하여 관암(冠岩)이라 하였고 맞은편 산밑에 족두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두가지 이름을 합하여 갓바위라하여 입암리(笠岩里)라고 칭한다.

  • 상월천리(上月川里) : 망월산 주능(走龍)이 월천(月川)에 머물러 반달형을 이루고 花洞(꽃골) 寺洞(절골) 於穴洞(느르리골)의 세골형세가 내천자를 이루었으므로 일명 “달내”라고 하고 한자로 월천(月川)이라고 쓰며 上月川, 下月川으로 구분한다. 일명 웃 달내라고도 한다.

  • 하월천리(下月川里) : 본래 월천리(속칭-달래)였으나 마을이 산골짝을 따라 길게 형성되고 인구 증가로 서쪽지역은 上月川 동남쪽 지역은 下月川으로 구분하였다.

  • 두창시변리(斗昌市邊里) : 두리(斗里)는 북분리에 속해 있었고 그 지형이 말(斗)처럼 되었다고 하여 두리라 칭한다함. 창리(昌里)는(과거는 倉里라고도 함) 죽리(竹里)에 속하였다가 창찰사(倉察使)의 답주지(畓住地)라 하여 창리(昌里)라고 한다. 시리(市里)는 창리 부근에 시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시변리라 불렀다고 하며 주민의 인구수가 적어 3개리를 합하여 두창시변리라고 부른다.

  • 동산리(銅山里) : 본래 고구려때 혈산현(穴山縣)의 소재지인데 신라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동산리(洞山里)가 되어 양양군 현남면에 편입되었다.

  • 북분리(北盆里) : 옛 예맥 당시 북방변경(北方邊境)이라 하였다가 그 후 지형이 분지 모양으로 형성되었다하여 북분리(北盆里)라 칭하였다. 또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거릿말, 골말, 구렁말 성촌(城村) 영남동 용숫골 현촌(峴村)을 병합하여 북분리라 하였다.


<출처: 양양군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신선바위와 탯돗

신선이 놀았다고 해서 신선바위라고 하지요. 신선바위는 신선이 지나갔다는 여러 가지 동물들의 발자국이 남아있고, 신선이 갈았었다는 밭고랑이 있어. 신선이 오줌을 눈 자리가 있어. 죽도라는 산에 신선들이 놀던 신선바위가 있는데 그 신선이 놀던 곳에 나쁜 짓을 해서 하늘에서 하느님이 그것을 보면 나쁜 짓을 씻기 위해 비를 내려줬지. 그래서 개를 한 마리 잡아 상에 피를 흘리게 하여 그 개를 바다에 잡아넣으면 하느님이 보기에 신선들이 노는 장소에 불결한 짓을 한다하여 그걸 씻기 위해 하늘에서 비를 내려 준다고 하지.
옛날에 가뭄이 심하면 탯돌을 현남면민이 굴려 가지고 물에 갖다 넣었다가 다시 꺼내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에 어떤 왕비가 동해안 바다가로 가는 도중에 애기를 낳게 되었는데 탯줄을 독에 넣고 뚜껑을 넣었지. 태를 담았던 독은 발견했지만 뚜껑은 바다 멀리에 있다고 전해지고. (현남면 두창시변리, 1999. 6. 13. / 김규승, 남)

 

5.2.신립장군 이야기

옛날에 신립장군이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산을 넘는데 80리 넘는데 날이 저물었어. 오더니 “무인지경이 자고 가자”고 하니까 처녀가 하나가 나와서 “보아하니 나라에서 국록을 하는 양반인데 못 자고 갑니다” 그래니. “왜그러느냐?” “여 산적 놈들이 있어 가지고 우리 소설(식구)이 전부 여덟인 것 다잡아 갔다”이기여 “잡아가는 원인은 나를 데리고 살라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싹 잡아가고 오늘 저녁 내가 죽을 참이요. 우리 부모들 다 죽었는데 내가 산적놈한테 살겠오. 그래 나는 오늘 저녁 내 이렇소” “그래도 좀 자고 가자” “그래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니 신립장군이 무기도 있고 옛날에 칼도 있고 있는데 한밤중 되니까 왔더라. 산적이 한 서 너 명이 왔어. 왔는데 전투가 일어 난거야. 산적 3명을 신립장군이 잡았어. 잡고 와서 아침을 먹고 나니 그 색시가 한다는 말이 “이제 떠나갈라고 그래니까 날 데려가 달라”고 그러드래. “내가, 왜 여서 어떻게 살라고 그러느냐” 이거야. 안 데려 갈려하니 “나를 데리고 가서 당신이 대인께서 나를 갖다가 첩으로 삼으려면 삼고, 종으로 할려면 하고 종노릇을 어떻게 해도 할테니까” 하는데 신립장군이 그 말을 안 듣고 왔어.
그래니 그 여자가 “뒤도 보지 말고 가라”고 그러더래. 가니까 지붕께 불살이 올라와 타죽었다 이거야. 그러니 그 신립장군이 못할 짓을 했어. 그 데리고와야 될게 아니야. 데리고 와서 어디 시집을 주던지 뭘했음 괜찮을낀데. 그래니까 거서 죽었다 이 말이여. 그런 얘기가 있어.
그게 뭐냐면 남한테 원한을 사지 말라고 그 후에 또 신립장군이 가더라니 굴 기와집이 있단 말이여 그 집에서 또 “하룻밤 자고 가자” 하니깐 한 40대된 여자가 나와서 “자고 가라” 그러드래. “자고 가라” 그래서 또 저녁을 먹고 있으니까 여자들이 음식을 차려왔어. 한 할머니는 80세 된 할머니고 한 여자는 60세 된 여자고 하나는 이제 40세 된 그 여자고, 그 여자가 20살 먹은 여자하고 둘이 나왔단 말이여. 그래서 “잡수라” 이러드래. 그런데 자기 옆에다가 20세 된 여자를 앉히고 “잡수라” 그러드래. 그래 또 먹고 나니까 40세 된 여자가 “이건 우리 시할머니고 60세 된 여자는 우리 시어머니고, 이건 우리 메누리다” 이거야. “우린 신씨다” 이거야. “우리 지금 몇대 독자가 계속 죽었는데 어떻게 됐든간에 대인께서 우리 며느리와 수침해서 자손이 생기게 해달라” 이러드래. 그런데 이 양반이 말을 안들었어. 말을 안 들어주니 이 여자들이 “아이고 아이고”하고 울거든.
그래 아침을 먹고 갈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뒤돌아 보지말고 가라” 그러드래. 그래서 나가서 가고 있는데 뒤로 보니까, 사다리를 놓고 80세 된 할머니 60세 된 어머니, 40세 된 여자, 20세 된 여자가 다 목을 매달아가지고 죽더래. 그런데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돌아보니까 그 억울하게 죽었다 이 말이여. 그래서 그 양반이 어떻게 됐느냐? 그러다 처갓집에 오니 권익장군이 있어. 그 장인이여. 그래가 인사를 하니까 “살인을 했다” 이거여. 그래가 “난 살인한 적이 없다”고 하니까 이 장인이 이 “쫄장부 놈이다” 이거여. “니가 거기서 죽음에 달한 여자를 구해 좋으면 죽지 않는다” 이거여. “니가 그걸 도움을 안해 주니까 그 여자들이 다 죽었다” 이거여.
그래서 “니가 졸장부라” 그러드래. 그래서 임진왜란에 난리가 나서 탄금대에서 갔는데 여자들 다섯이 그 신립장군을 밀어서 떨어지게 해 죽이더래. 그래 보니 그 여자들이 하나는 불에 타죽은 여자, 또 다른 여자들은 80세, 60세, 40세, 20세 먹은 여자들 다섯이더래. 신립장군이 거기서 전사했다는 말이 있어. 그게 남한테 척을 짓지말란 말이여. 그 처녀들을 데리고 와서 시집을 주던지 첩을 하던지 종으로 삼던지 데리고 살았으면 될텐데. (현남면 죽정자리, 1999. 11. 26. / 정병하, 남)

 

5.3.죽도의 절구바위

현남면 인구리 바로 앞에 죽도라고 부르는 산봉이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지. 이산을 죽도라고 부르는 것은 산 도처에 키가 작은 대나무가 우거져있는 탓으로 죽도라고 하기는 하나 지금은 섬이 아니고 봉의 서쪽 맥은 해변의 백사장과 이어져 있어서야.
이 죽도 동쪽 해안은 큰 바위로만 되어 있고, 이 바위 중에 가운데가 파여 절구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지. 옛날에 마고 할미가 상제를 섬기고 있을 때, 상제가 마음먹은 일이면 무엇이든지 이룩되는 상제의 권능이 부러워 불가능이 없는 상제의 권능이 어디에서 생기는 가를 조사하기 시작했지.
그러던 어느 날 상제가 큰 일을 계획해 놓고는 밀실에 들어가 큰공 만 한 둥근 돌로 열심히 바위를 갈아 끝내는 그 바위에 구멍을 내놓고는 그 다음날 계획했던 일을 착수하여 무서운 권능로 그 일을 달상하는 것을 알고는 “상제의 불가사의한 기능이 어디에서 생기나 했더니 바로 저 둥근 돌에서 생기는구나. 내가 저 돌을 훔쳐 가지고 인간 세상에 내려가면 모든 세상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며칠 뒤 상제가 없는 틈을 타서 그 돌을 훔쳐 가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어.
막상 오기는 했으나 아무데서나 갈다가 혹 사람의 눈에 띄기로다 한다면 상제에게 다시 잡혀가 벌을 받을 것이니 돌을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사람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밑돌도 마땅치 않은 데다가 가는 소리가 커서 사람들에게 들리기가 쉬웠으므로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밑돌을 구하여 갈기로 하고 해안선을 따라 장소를 물색하다가 이곳 죽도에 와 보니 섬이어서 거의 인적이 없는 데다 대숲이 우거져있어 사람에게 발견될 염려가 적고 이곳은 사장이 아니어서 항상 파도가 바윗돌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가 나므로 돌 가는 소리가 파도 소리 때문에 멀리 가지도 않거니와 소리가 난다해도 동네 사람들은 파도 소리거니 생각할 것이니 돌 가는 소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좋은데다가 밑돌 할만한 돌이 얼마든지 있어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지.
야심에 찬 마고할미는 그 바위 중에서 가장 알맞은 것을 골라 갈기 시작했어 며칠이 걸려 바위 하나를 구유처럼 갈아 이제 겨우 끝이 나게 되었을 때 갑자기 바다가 거칠어지며 파도가 거세게 일어 물결이 마고할미가 일하고 있는 작업장까지 쳐들어와 작업을 할 수 없거니와 갈아놓은 밑돌 구멍에 물이 가득 차 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단 말이야. 며칠을 기다려 보아도 물결은 자지 아니하고 상제가 잡으러 올 것 같은 조바심이 나기에 거의 끝을 보게된 돌을 버리기는 아까우나 그렇다하여 무작정 파도가 잘 때를 기다릴 수 없어 파도가 미치지 아니하는 위쪽에 있는 돌을 다시 갈기 시작했지.
그런데 이 돌도 거의 다 갈아 끝을 보게 될 무렵 다시 파도가 일어 이 돌 있는데 까지 물결이 쳐 왔으므로 또 작업을 중단 아니 할수 없게 되었지. 작업을 중단한 채 물결 잘 때를 기다렸으나 전혀 잔잔해질 기색이 없어서 다시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다른 돌을 골라 갈기 시작했어. 그러나 이 곳에서도 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 다시 자리를 옮기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지.
이렇게 여러번 옮기다 보니 돌 하나도 끝을 맺지 못한 채 상제에게서 훔쳐온 둥근 돌이 다 닳아 쓸 수 없게 되어 마고할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어. 지금 죽도 동쪽 바닷가에는 구유나 절구처럼 구멍이 파여 있는 돌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데 이 돌들은 다 이때에 마고할미가 갈다가 파도 때문에 끝을 보지 못하고 중단하여 버려놓은 돌들이라고 해. 오랫동안 물결이 거세게 쳐서 갈다 던져둔 이 돌들이 물결의 힘으로 마멸이 되어 구멍이 나면 반드시 사회에 큰 변고가 생긴다고 하여 옛날에는 이곳 돌에 구멍이 났으면 피난짐을 싸서 산중으로 피난을 가고 외병이 쳐들어 온다는 풍문이 돌고 이곳 돌에 구멍이 나지 아니하면 재앙이 이곳가지 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평상시와 같이 생활했다고 해. 마고할미의 야심이 서린 장난이 끝내는 이곳 사람들에게 재앙을 점치게 하여 옛날에는 이곳 서낭당 제때면 곁들여 마고할미제까지 지냈어. (현남면 인구리, 1999. 12. 4. / 김옥자, 여. 79)
 

5.4.하늘에서 내려온 신부

일곱째가 아주 인물이 천하일색인데 그 사람이 나는 언제든지 장가를 가도 나와 같이 인물이 똑같은 사람과 장가를 들려고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규수가 참 잘되어 있다고 그래. 그 규수는 하늘에서 무슨 죄를 짓고서 이 시골에 있다가 참 인물이 천하일색이여.
그런데 이 여자 아주 잘 났는데 탈을 썼어. 그래 아주 좋은 여자가 있어서 인제 장가를 차려 가지고 말을 타고 갔는데 초례상에 떡 서서보니 신부가 아주 못생기고 입술이 너무 미워. 눈을 다시 내려 떠보니 그 방에 갈려고 하니 가게 되나! 방안에 떡 들어갔는데 “난 간다”고 일어서니 “밤에 자고서 날이나 새야가지 어딜 가냐”하고 어깨를 확 잡아당기니 도포가 쭉 타져서 끊어지더래. “옷이나 꿰매 입구 가요” 붙잡아 앉혔다. 이제 이 여자가 반짇고리를 꺼내 놓더니 큰 돗바늘로 도포를 척척척 꿰매더래. “아휴 저렇게 꿰매어 어떻게 입나!” 꿰매서 “당신 입으라”고 주는데 입고보니 꿰맨 자국도 없고 꿰맨 자국이 없더래.
그래 이제 입고, 미워서 여자가 구석에 도포자락을 꿰매고 놓았다가 말타고 갈려고 하니 “아침이나 먹고 가라”고 그래서 아침을 한 술 떠먹고 뒤에서 그 여자가 뒤로해서 준비 다해났지 뭐. 자기 타고 가는 가마하고 남자는 타고 온 말이 있으니 말 타고 가는데 저 하인들이 이 가마에 태워서 남자 집으로 보냈어. 그래서 이제 남자 집에 갔다놓고, 이 남자가 저기 안 들어가. 신부집에 미워서 눈뜨고 보지도 않다. 그래 제갈령이 돈이 많은데, 신부집에 갔다가 한번에 떡 갔다 놓고는 안들여다 보고 그 도깨비 이 여자가 보니깐에 이 손님이 하나 와서 두 친구가 장기를 두는데 그게 아주 도깨비래. 큰 집이 제갈령이 보기에는 아주 큰 기와집인데 이 제갈령 부인이 보기에는 아주 큰 느티나무가 있는 구멍에 도깨비가 드나들어. 이 남자는 그걸 몰라. 제갈령은 큰 기와집같은 곳에서 손님이 자꾸 오는데 친구가 그걸해서 내기를 해서 제갈령이 돈 한 뭉텅이를 맨날 잃어버려.
그래 이 도깨비는 갔다가 집에 두고 또 와서 그 이튿날 또 하고하고 가만히 이 여자가 생각해보니 잘못하면 자기를 “내가 돈이 다 떨어지면 우리부인 데리고 와라” 이러더래. 그래 도깨비한테 데리고 갈까봐 이 부인이 하루는 몸종더러 “저 제갈령 들어오라”고 하더래 그래 “사모님이 들어오랍니다.” 하니 “뭐하러 들어오라”니 보기도 싫어서 자꾸만 그래. 인제 문을 삐끗 열고 “뭐하러 들어오라 하냐” 이래 보니까네 그 여자가 탈을 벗었어.
벗어놓으니 인물이 천하일색이래 이렇게 보니 깜짝 놀래. 아주 발도 못 들여놓고 “우짼일이야” “서방님, 어여 들어오시게 하오” 그래 앉으라고 앉으니 이 여자가 인제 그 장기를 이렇게 띠고 이렇게 뜨면은 그 도깨비가 맨날 지는데 장기를 가져오라고 해 가지고는 다 시켜줬어. 그래 “우잰(어쩐)일이냐?” 하니 “하늘의 사람인데 무슨 죄로 이렇게 시골에 내려왔는데” 그래 언제 그 날 저녁부터는 이 제갈령이 여자 방에 들어와. “당장 나가라”고 “당신은 나를 삼 년을 그렇게 해서 3년을 별거를 했는데” 하고 그를 내쫓았어. 아주 무섭지. 그래가지고 또 쫒겨 나가는데 이튿날 또 들어와, 아주 들어오니 이 여자가 또 못 들어오게 했어. 사흘째 되어 가지구 들어오니 그만 또 내 쫓았어. 그 사람은 3년을 별거했는데 이 여자는 하두 그 남자가 얘기를 해서 3년을 이 사람은 나흘 저녁을 못 들어 내쫓았어. 그 여자가 이내 가르쳐 주었어. 이렇게 이렇게 하면은 저게 그 도깨비가 돈 다가져 온다”고 그래. “매일매일 한 거 다찾아 올테니 나중엔 돈이 없다”고 도깨비가 찾아 올테니 부적을 한 장 썼어. “이걸 가주고 가!” 다가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거든 그 문에다 탁 붙여라 다시 도깨비가 못 나온다 했어.
그래 인제 쫓아가 붙이고 보니 큰 아름드리 느티나무더래. 그 기와집으로 여지껏 본게. 그 부적을 붙이고 보니 잘 사는데 맨날 제갈령은 친구들이 초대해서 가서 얻어먹기만 했지. 자기가 뭘 하나 맥인 게 없거든. 그 여자가 그래 “저 당신은 맨날 가서 신세만 졌지. 아무나 초대해라. 어여 아무소리말고 내가 하는 대로 해라” 손님을 오라고 해놓거든. 이 여자가 기술이 참 백 가지를 가지고 말을 열필 만들어서 그 나라 임금님 환갑잔치를 차려놨는데 그리로 가서 그 말이 가서 다 싣고 왔어. 아주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아무개는 “제갈령은 웬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냐?”고 “어여 실컷 자시라”고 그래가 주고 인제 그 손님을 잘 먹였지, 아들을 3형제 낳고 아들들이 아주 공부도 잘하고 이러는데 잘 살다가 하루는 그 인제 들이 차려놓고 잔치를 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고 아들 딸 모여 앉고 앉았는데 여자하고 남자하고 하늘로 착 올라가더래. (현남면 지경리, 1999. 12. 10. / 이성녀, 여. 67)

7.지역의 명소

7.1.죽도정

양양군 현남면에 위치한 죽도는 완벽하게 독립된 섬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육지와 접하고 있다. 사계절 송죽이 울창하여 ‘죽도’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이 섬의 장죽은 유독 강인해 조선시대 조정에 진상될 정도였다고 한다. 정상의 죽도정 정자는 1965년 현남면 내 부호들이 행정 지원을 받아 건립한 것으로 팔각집우 전면 3칸, 측면2칸으로 이뤄져있다. 짙은 송죽향을 느낄 수 있는 산책로와 둘레길이 유명하며 죽도정 정상에서 양양의 청정 바다를 전망할 수 있다.

<출처: 양양관광>





 

7.2.남애항


남애 2리에 자리한 양양군 1종 어항으로 양양에서 가장 큰 항구이다. 예부터 가자미, 양미리, 광어 등 다양한 어종이 풍족하게 잡히며, 전복, 미역, 가리비 등 항구 인근 해역에서도 여러 가지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다. 강원도 3대 미항으로 꼽히는 만큼 항구 주변 바위섬들과 등대, 해수욕장, 방파제 등 빼어난 경치로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으며, 남애항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주민들이 운영하는 낚시배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출처: 양양관광>





 

7.3.김성래 가옥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9호 고택으로 약 15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김해김씨 17대 손이 거주하며 고택을 관리하고 있고, 현소유자의 14대 조부가 건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월에 비해 기둥이나 지붕 등이 깨끗해 보이는데, 이는 후손들이 꾸준히 보수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출처: 양양관광>






 

7.4.김택준 가옥


조선 후기에 지어진 주택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가옥은 ‘ㅓ’형태의 안채와 ‘ㅣ’형태의 사랑채로 이뤄졌으며 안방과 상방 전면에 환기구 시설도 갖추고 있다. 앞면 마당은 두 개의 출입구가 있고, 사랑채 건물은 남자들이, 안채 쪽은 여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리적 위치와 뒤편 야산과 어우러진 조화가 돋보이는 가옥으로 현재는 경주 김씨 11대손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 양양관광>





 

7.5.포매리 백로와 왜가리 서식지


1970년 천연기념물 제229호로 지정된 현남면 포매리 백로, 왜가리 번식지는 동해안 최대 번식지로 그 면적이 약 26만 7,892㎡이다. 이곳에는 수령이 100년 이상인 소나무들을 비롯하여 잣나무, 밤나무, 참나무 등이 멋스럽게 자라고 있으며, 한 나무에 4~5쌍의 왜가리, 백로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도래 시기는 2월 말에서 3월 초순경이며 4월 중순에 산란, 5월 부화, 10월~11월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필리핀 쪽으로 이동한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사진촬영 시에는 둥지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야하며, 큰 소음을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출처: 양양관광>





 

7.6.조규승 가옥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된 가옥으로 정확한 건축연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소유자 조규승 氏의 10대조가 300년 전쯤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로 구분되어 있으며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사랑채를 먼저 지은 후 안채를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가운데 방 3칸을 배치하고 앞면에 툇마루가 있는 형태이며, 툇마루 양옆으로는 부엌과 창고가 위치하고 있다. ㅁ자 형태의 가옥이기 때문에 폐쇄된 안마당을 가지고 있고, 곳간채는 60년 전에 보수한 것이다.

<출처: 양양관광>





 

7.7.매호


양양군 현남면에 있는 유역면적 9.6㎢, 너비 약 600m의 자연 석호로 천연기념물인 백로와 왜가리가 서식하는 곳이다.
국도 건설과 농경지 확충, 토사유입 등으로 훼손되어 가던 매호는 2015년부터 생태복원사업이 진행되어 수질정화와 생태가 많이 복원되었으며, 2020년 12월 생태학습장 조성이 진행 중이다.


양양 매호 생태학습장 이달 중 조성완료(2020.12.02)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인구초등학교, 남애초등학교, 인구(임호)초등학교
중학교 : 현남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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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