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읍

                                                                                                                                                                                                                                                           

1.개요

간성읍은 동부 동안형 기후로 산간 고랭지와 해안 평야지 기후가 공존하는 지역으로서 흘리 “피망”, 해상리 “블루베리”, 어천리 “라벤더 축제”가 유명하며, 동호리 해안주변으로 자전거 도로와 해맞이 소공원이 위치하고 있어 주민과 관광객을 위한 평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기에 언제나 다시찾고 싶은 힐링마을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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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구

2022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08) / 단위 : 명
7,076총 인구수
3,737인구(남)
3,339인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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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지명의 유래

  • 하리 : 현 우체국 주위에 못이 있다고 하여 속칭 연당(蓮塘)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옛날에는 현재의 읍사무소 자리에 현청(縣廳)이 있었는데, 그것이 조선시대에는 간성군청이었다. 그후 읍사무소 소재 마을로 하리라 부르다 1973년 하1,2리로 분할 됐다.
  • 하 1 리 : 옛날엔 성안 마을엔 삼정(三井), 사지(四池), 오목(五木)이 있었는데, 하1리에 그중 2정, 3지가 있었다고 한다. 1994년도에 군청앞 우물 1개소를 정비했다.
  • 하 2 리 : 원래 간성읍 시내는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행정수복과 함께군청 소재지가 되었다가 인구증가와 구역확장으로 인해 중리(中里)를 하1,2로 구분하게 됐다. 군청소재지인 수구마을로써 '삼정(三井) 사지 오목(五木)'의 하나인 은행나무 한 그루(수령 약700년)와 우물 2개소가 남아 있다.
  • 신안리 : 통일신라이후 강성현이라는 골이 생긴 후 새골짜기라는 골짜기와 안심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는데 조선 중엽, 즉 300년전에 마을명을 정할 때 성내의 안심리(安心里)와 성외의 신성리(新城里)의 머릿자를 따서 신안리(新安里)로 부르게 됐고,그후 인구가 점점 늘어 1955년경부터 행정구역을 신안1,2,3,4리로 구분 하였다가, 1994년 아파트 신축을 계기로 신안5,6리로 추가 분할 됐다. 신안리에는 속칭 시장마을(신안1리), 시장 변두리(신안2리), 정거장 거리(신안3리), 남천세거리(신안4리)등이 있다.
  • 동호리 : 옛날부터 전해내려 오는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300년전 당시 선조들이 마을을 개척할 때 갈대가 너무나 무성히 자라 있는 갈대밭이었기에 갈벌이라 칭하였다가 1880년대에는 신선이 놀다가는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왕곡면(선유리 仙遊里)로 개칭했으며 1940년대 이후로 동쪽에 호수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호리(東湖里)로 다시 개칭하여 전해내려 온 것이 오늘에 이른다. 마을은 구석말과 넘어말로 구분하는데 구석말은 3반의 산밑 구석에 위치하여 있다 해서 그렇게 불리워졌고, 넘어말은 마을회관 앞 마을안길을 중심으로 길건너에 있는 마을을 넘어말이라 칭했다. 또한 농경지는 수삼넘어 앞 무논, 아래들, 새내들, 벌미동산, 염전밭 등으로 구분되어 불리우는데, 그 명칭마다 각각 유래와 이유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수삼넘어는 본마을에서 봉호쪽으로 가는 논골을 칭하며 이조 중엽 북천강이 수구너머로 흘러 내려 물이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였다해서 그렇게 불리워졌다.또한 도로에서 마을 안쪽을 마을 앞에 있는 무논이라 하여 앞 무논, 동호2리쪽으로 내려오는 들아래 남천강과 금속천이 남천으로 흐르지 않고 마을 쪽으로 흘러 농경지 양천천 사이에 있었다 하여 새내들이라 각각 칭했고, 넓은 들 사이에 1㎢정도의 임야가 우뚝 솟아 있는 부근을 벌미동산이라 불렀으며 마을 하구안에 들어있는 들이라 하여 아랫들이라 칭했다고 한다. 한편 염전밭이란 이름은 왜정때 백사장에다 1자 정도의 진흙을 깔고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다 하여 바닷가 주변을 염전밭이라 불리워오고 있다.
  • 봉호리 : 마을의 고을명칭은 골말, 버덩말, 벤밭골, 방죽골, 수재밭골, 안장골, 돌고지, 아랫들, 개까, 굴구머매 등의 여러가지 속칭으로 불리워 왔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옛적에는 왕곡면에 속하였던 때도 있었다. 봉호리(蓬湖里)로 “호(湖)“자를 마을 이름에 썼으나 지형적으로 봉호리동 앞에 산이 가로막혀 중간의 길이 동리 앞을 졸라매게 되어 마치 병마개를 졸라맨듯한 형국이 되어 봉호리(蓬壺里 : “호(壺)“자는 병마개 '호'자임)리명이 고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상리 : 오랜 옛날부터 소농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골짜기라 하여 속칭 소농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쇠동골이라고 부르는데 1973년 행정구역 분할로 현재의 상1리 2반이 됐다. 또 간성 시가지 주변에 있던 읍성의 서쪽문이 현재 고성중·고교로 가는 국도상에 있었다고 하여 그 서쪽문 일대를 서문턱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그 일원이 상1리 4반이 됐다.
  • 간촌리 : 지금부터 약 600년전 마을 원님의 부친이 명하기를 용암이라 하였다하여 그후 속칭 구암동(龜岩洞)이라 불리워지다가 약 300년전부터 물흐르는 방향이 간방으로 흘렀다하여 간촌이라 칭하여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여기서 간방이라 함은 간촌에서 흐르는 물이 북천(교동리 앞)위로 흘렀던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 교동리 : 옛날(구한말) 趙씨 가문이 마을을 창설하였다 하여 조동이라 칭하여 오다가 거진읍 대대리에서 향교를 이전 설립하면서 유교를 가르치는 마을이라 하여 교동(校洞)이라 칭하여 전해 내려온다. 마을 행정구역상 3반부터5반까지를 웃말(개보살)이라 하고 중간위치인 1반에서 2반까지를 중간말(참보살), 그리고 나머지 1반을 아랫말이라 부른다.
  • 해상리 : 간성읍 마을 각리 끝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속칭 위촌마을이라 불렀다. 해상1리 서쪽으로 8㎞지점에 구절폭포가 있어서 이 폭포에서 흐르는 물을 우수라 하였으며 그 상류지역을 우천 이라 했는데 우천의 우향으로 샘이 솟아 임천리(林泉里)라 불리워진 것이 지금의 해상1리가 됐다. 또 그 우수의 하류에 있는 마을을 번개(磻溪)라 부르는데 그것이 지금의 해상2리가 되었다. 구절폭포 밑에는 육송정(六松亭)이라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한 뿌리에서 6개의 나무가 뻗어나와 그렇게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2개의 나무만이 현존하고 있다.
  • 광산리 : 구전에 의하면 원래 간성 북천강 상류에 있는 부락으로 강의 북쪽마을을 만산(晩山)이라 하였고 강의 남쪽을 광평(廣坪)이라 하였는데 일제때인 1915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평”에서 '광(廣)'자와 “만산”에서 '산(山)'자를 따서 광산리(廣山里)라 칭하고 1, 2, 3, 4리로 분할, 명명하게 됐다. 광산1리는 행정상 3반으로 나뉘어졌는데 1반을 안말, 2반을 앞말, 3반을 새마을이라 칭하고 마을 앞뜰을 정자평이라고 부른다.
  • 어천리 : 고기에 의하면 당초에는 내어탄리(內於呑里)라고 하였다가 마을의 남쪽으로 200m 지점에 박씨 소유의 산이 있었는데 그 생긴 모양이 魚斗처럼 생겼다하여 그 뜻을 따서 어룡리(魚龍里)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후 언제부터 인지 어천리(魚川里)로 불리워지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1,2리로 나누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어변형용, 즉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었다'는데서 본따 어룡리(魚龍里)라 불렀다고도 한다.
  • 장신리 : 장신1리는 속칭 장밭이(長田)라고도 부르는데 그 유래는 정확치 않으나 지금부터 약450년전(조선 중종에서 인정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는 마을앞이 모두 밭이었고 그 밭의 규모가 장신2리까지 길게 분포되어 장전(長田)이라 부르고 부락이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 191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신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1,2리만이 있으며 1,2반을 아랫말, 3, 4반을 웃말이라고도 부르며, 장신2리는 새마을이라 부른다.
  • 탑동리 : 탑동리로 불리우기 전에는 마을앞 농경지에 수렁이 많다하여 속칭 고래술이라 불리우다가 마을에 문씨가 입주한 후, 서북쪽 50m 위치한 곳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탑을 발견하였다 하여 탑동이라 칭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 금수리 : 금장동(金藏洞)이라 불러오다 군내면 당시 금장동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아랫골을 물이 흐른다고 물골, 수동으로 부르다가 두 이름의 머리자를 따서 1914년 3월 1일부터 금수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 1929년 4월에는 당시 일본인 조일(朝日)이 금수리 산129번지에 금이 저장 된 줄 알고 2년간 금광을 찾다 금을 못찾고 재산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속명은 김장골이다.
  • 진부리 : 진부리의 특산물은 재래봉(석청)꿀이 유명하여 당귀등 약초가 많이 생산 된다. 최근 곰취의 하우스 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매년 3월 3일에 삼월 삼신제와 산신제를 지내고 8월 14일에 두 번째 산신제로 풍년을 빈다.
  • 흘 리 : 산림이 울창하고 산이 높다하여 흘리(屹里)라 불렀고 속칭 밖(外)흘리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마을의 면적이 광활하여 지역별로 구분할때 칭하던 이름으로 현재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출처: 고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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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지역의 옛이야기

5.1.아기장수와 천하정과 천혜장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강릉 함씨 장손이 사는 큰 참나무 집 앞에 큰 우물과 발방앗간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집에 늠름한 한 아이가 태어나 가족들이 무척 좋아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집 안방에 아이를 눕혀놓고 방앗간에 갔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와 평소 담배를 올려놓았던 선반에 손을 뻗쳐 더듬다가 물컹하는 물체가 잡혀 놀라 살펴보니 안방에 눕혀 놓았던 이 아이가 선반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분명 안방에 누운 채 잠재워 놓고 방아를 찧으러 갔는데 이 아이가 선반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집안에서는 이일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문중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이 아이가 분명 장수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나라에서 장수가 태어나면 그 집안의 삼대를 멸종시킨다는 속설에 미리 겁을 먹고 이 아이를 돌을 달아 우물에 집어넣기로 했다. 그래서 돌을 그 아이에게 달아 우물 속에 넣고 그 우물을 메우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자정 무렵 마을 뒷산 넘어 방추골이라는 연못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나서 이튿날 아침에 동네 어른들이 나가 살펴보니 장수를 태울 용마[1]가 죽어 있었다. 용마를 묻어주고 그 안장을 집안에서 보관했었으나 6.25동란 때 소실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우물은 옛날 이곳 땅속에서 용마가 솟아 나와 하늘로 오르면서 생긴 것이라 한다. 이 용마는 금수리 큰 참나무 집에서 날개 달린 장사가 태어났는데 이 장사를 등에 업고 가기 위해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이 얼마나 깊었는지 온 동네 명주실을 끌어다 넣어도 끝이 없었다고 전한다. 천혜장은 이 장사가 용마를 타고 군사훈련을 하던 곳으로 현재는 고성군 공설운동장이 되었다.

5.2. 삼정(三井)․사지(四池)․오목(五木)의 유래

고려 때 어느 원님이 어느 날 관직에 오래 있으려면 3곳에 우물을 파고 4곳에 연못을 만들고 5가지의 나무를 심으면 관직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간성 골 3곳의 우물과 4곳의 연못을 파고 은행나무 등 5가지의 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 후 이 우물과 연못, 나무 등을 가리켜 삼정(三井) 사지(四沈) 오목(五木)이라고 불러왔는데 지금 삼정과 사지는 사람들에 의해 매몰되고 집들을 지어서 모두 없어졌으나 오목 중의 하나가 지금의 현재 군청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고목이 된 이 은행나무도 지난 1964년 가을 썩은 곳에서  불이나 연 3일 동안 타다 남아 지금은 봄이 돼도 잎이 절반밖에 피지 않고 있다. 오목(五木)중 은행나무 2그루는 1950년 6.35동란 전까지 남아있었으나 암은행나무는 6,25때 폭격으로 없어지고 현재는 군청 입구의 은행나무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 삼정(三井)은 현재 2개소 보존되고 있다. 군청 앞과 천주교 입구 중방여관 앞 현존하며 1개소는 현 산림조합과 하리 사무소 부근에 있었으나 매몰되었다. 사지(四池)는 현재 전부 매몰되어 없으나 그 위치는 상리 460번지 함희조(咸熙祥)씨 대지 부근, (구)경찰서 앞 길 건너편, 간성 우체국 대지, 하2리 사무소 부근이다.

5.3.관대바위 이야기

고성군 간성읍 탑동리 선유령 가는 길목에 옛날 산을 타고 다니는 관대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어느 날 관대라는 사람이 그 산 주변에 바위 버섯이 많이 난다고 하여 그것을 따기위해 산을 타고 다니다 그곳에 가니 큰 짐승이 앉아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관대라는 사람이 그 앞에서 길을 비켜달라고 빌었으나 그 짐승이 꼼짝도 하지 않아 침을 탁 뱉어 그 침이 그 짐승 앞에 떨어지는 순간 그 짐승이 바위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관대바위라고 불렸다. 어느날 관대란 사람이 그 바위를 주욱 타고 오는데 산봉우리에서 물이 나오길래 물을 먹으려고 그곳에 엎드리니 물속에 말이 보여 신기하게 여겼다. 다시 고쳐 앉아 무릎을 탁 치니 그곳에서 백마가 울음소리를 내며 뛰어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고 한다.

5.4.향로봉사 삼부처

옛날 간성에 어떤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렵게 자식을 하나 두었다. 하루는 어떤 괴나리봇짐을 한 사람이 오더니 " 이 녀석 나긴 잘 났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고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괴나리봇짐을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그 사람은 "왜 가는 사람 붙잡고 그러냐?"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끌어들여 술상을 차려 놓고 "그래도 내가 여기서 밥술을 먹는데 그냥 가실 수 있느냐?" 하면서 술을 권하고는 "아까 우리 아이가 저기에서 놀았는데 걔보고 뭐 한 얘기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그네는 "저놈이 나긴 잘 났는데 단명한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다급한 마음에 "단명하면 저걸 어떻게 하냐? 어떻게 푸는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나그네가 답하길 "이 아이를 십 년 동안 어디 한데 나가 고생시키라."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어린아이를 객지에 보내 십 년을 혼자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딴 방법이 없소?"라고 물었더니 나그네는 "향로봉사를 찾아가든가"라고 했다. 옛날 진부령 가는 길에 향로봉사라는 절이 있었다. 여덟 살이 된 아이는 향로봉사를 찾아 나서게 됐다. 일찍이 어른들로부터 얘기 들은 바 있는 향로봉사를 찾아 골짜기를 들어가 보니 스님은 기거하지 않았고 벽에 큰 부처가 있고 양쪽에 작은 부처 둘이 있었다. 마당에는 나무를 해 땐 재를 담아 둔 잿독이 3개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잿독을 파서 불씨를 찾아 그것으로 절에서 시주해 왔던 것으로 보이는 쌀로 밥을 해 부처에게 공양하고, 인근에서 풀을 뜯어 나물죽을 조금씩 끓여 먹게 되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아이가 열일곱 살이 되는 날 하루는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벽에 있던 큰 부처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밥 먹고 내 뒤에 와 앉아라." 그래서 이 아이는 큰 부처가 시킨 대로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부처 뒤에 앉았는데 바깥에서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호랑이가 문을 벌떡 열고 들어와 "그 아이를 내놔라'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는 "일 년만 더 연기를 해 다오. 우리가 수백 년을 굶어왔는데 애로 인해 배를 채우고 지금까지 살았다. 우리 삼 형제가 부탁하니 일 년만 연기해 다오."라며 큰 호랑이에게 사정했다.  "그래, 좋다. 일 년만 연기를 해 주마." 하고 호랑이가 돌아갔다. 아이는 일 년을 더 살 수 있었다. 일 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둘째 부처가 아이에게 "야 내 뒤에 앉아라" 했다. 이번에도 호랑이 나타나 "약속대로 아이를 내놔라" 했다. 그러자 둘째 부처가 "우린 다 똑같은데 형님은 연기해 주고 왜 나는 연기를 안 해 주느냐?"라고 사정해 또 일 년을 살수 있었다. 그다음 해에 다시 찾아온 호랑이에게 셋째 부처가 "형님 둘은 양보해 주고 너 말이야. 아무리 산중 호랑이라고 해도 그런 인정도 없냔 말이야. 인정을 베풀어야지."했다, 그렇게 일 년을 더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20세가 된 어느 날 큰 부처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는 여기서 자고 새벽에 떠나라. 저 아래 우물이 있다. 우물곁에 집이 하나 있는데 그 뒤에 큰 버드나무가 하나 있다. 버드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한 여자가 나와서 물을 물동이에 퍼서 담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여자 뒤에 가서 허리를 꽉 껴안아라.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날 살려 주시오' 하고 애걸하는데 여자가 놓으라고 해도 절대 놓지 말아라.“ 이튿날 새벽 그 아이는 부처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직 인사를 하고 절을 나와 부처가 얘기한 우물 옆 버드나무 뒤에 가만히 숨어 있었다. 날이 샐 무렵 처막에서 뻐금이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물동이를 들고 나와 사방을 휘둘러 본 다음 이상하게 하늘을 쳐다보더니 정신없이 대여섯 바가지 물을 퍼냈다. 그때 아이가 얼른 뛰어나가 여자의 허릴 꽉 끌어안았다. 여자는 "아이 왜 이래요. 웬 사람이 와서 끌어안고 이러냐?"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날 살려 주시오"라고 하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때 벼락같이 큰 호랑이가 나타나 문 앞에 서더니 "난 그 아이를 잡아먹고 호랑이 가죽을 훌떡 벗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라고 했다. 사실 그들은 옥황상제의 아들과 딸이었는데 아들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에 내려오는데 혼자 보내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 누이와 함께 보낸 것이다. 그 누이가 말했다. "이 사람과 똑같이 한날한시에 난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이 아니냐.” 여인 덕에 목숨을 건진 아이는 여인과 인연을 맺고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찾아가 잘 살았다고 한다. 그 아이가 호상에 갈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운명을 새롭게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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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역의 명소

7.1.마산봉 

마산봉은 백두대간 준령[2] 위 진부령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봉우리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절경과 함께 겨울철 설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위용과 위엄을 함께 느끼게 한다. 마산봉은 봄철 등산코스로도 이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마산봉을 정점으로 서쪽방향을 수개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을 중심으로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금강산 1만 2천봉의 남한 제2봉이 바로 마산봉이다. 고성군내 백두대간 길이는 23.4km로 미시령-신선봉-마산봉-진부령-향로봉으로 이어진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7.2.육송정 홍교

undefined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보물 제1337호이다. 이 다리는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 지점에 있다. 육송정 홍교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성 건봉사 능파교(보물 1336)와 함께 조선시대인 1745년(영조 21)의 대홍수로 붕괴되었는데 1704(숙종30)∼1707년에 축조된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에 따르면 육송정 홍교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능파교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소재지: 강원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 1041번지



 

7.3.합축교

undefined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상리~ 거진읍 대대리에 걸쳐있는 교량이다. 국가문화재 제143호이다. 길이 214m, 폭 6m, 높이 5m인 교량으로 6.25전쟁을 전후로 남과 북이 합작하여 건설했다. 교각 총 17개 중 남쪽의 9개 교각인 북한이, 북쪽의 8개 교각은 국군공병대대가 완공하여 개통시켰다. 남과 북이 건설한 시기는 다르나 남북한이 만든 다리로 남북화해시대의 상징적인 구조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남북한 건설공법의 차이도 살펴 볼 수 있는 점에서 의미있는 다리이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상리, 거진읍 대대리


 

7.4.간성향교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이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4호이다. 1420년에 현유[3]의 위패를 봉안, 배향[4]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7.5.진부령 미술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편안하게 미술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작품 "소" 등으로 민족의 강인한 정신을 담은 국민 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 이중섭의 전시실이 운영되고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진부령로 663




 

7.6.라벤더 체험마을

강원도 고성군 어천리에 있는 라벤더 체험마을이다. 매년 6월~7월 초순 라벤더가 개화하면 라벤더를 주제로 축제를 연다.
라벤더 수확, 비누 만들기 등 라벤더와 관련한 다양한 체험학습을 즐길 수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꽃대마을길 175




 

7.7.장신리 소똥령 마을

장신리 소똥령마을소똥령은 옛날 국도1번지로 한양가던 길이었다. 선비가 괴나리 봇짐을 메고 과거 보러 가던 길이기도 하고 소를 비단과 물물교환하기 위하여 령을 넘다가 산적을 만나기도 했던 고개이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지나다녀서 산 생김새가 소똥모양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과 고개 정상에 주막이 있었는데 원통장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주막 앞에다 똥을 많이 누어 소똥령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유원지와 다양한 체험활동을 운영중이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장신2리 소똥령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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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간성초등학교, 광산초등학교, 광산(흘리)초등학교
중학교 : 고성중학교
고등학교 : 고성고등학교

9.기타

Footnotes

  1. ^ 썩 잘 달리는 ‘훌륭한 말’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2. ^ 높고 험한 고개
  3. ^ 현학과 유학을 말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학설, 유학은 공자와 맹자의 학설을 뜻한다.
  4. ^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 따위에 모시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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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