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진읍

                                                                                                                                                                                                                                                           

1.개요

거진읍은 동해안 최북단 최대 항구인 거진항이 위치하고 있는 통일의 꿈을 갈망하고 있는 고장이다.
전국 최대 명태 생산지였던 거진항은 농수산물 가공 처리시설을 주축으로 명태 웰빙타운 조성, 거진항 이용고도화사업 등 수산기능과 관광·상업 기능을 겸비한 복합어항으로 개발, 지역경제의 중심기능을 수행하는 동해북구 어업전진기지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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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6,251총 인구수
3,110인구(남)
3,141인구(여)

4.지명의 유래

 

  • 거진리 : 약 500년전에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중 이곳에 들렀다가 산세를 훑어보니 클 '거(巨)'자와 같은 형국이며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불어날 것이라고 하였기에 거진리(巨津里)라 부르게 되었다.

  • 자산리 : 이 마을 뒤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은 옛적에 자산(慈山)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자산리(慈山里)라 명명하고 마을앞 하천도 古記에는 거탄천(巨呑川)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자산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5년부터 1922년까지는 오대면 소재지였으며, 일제시대 때에는 봉평리 2구(區)라고 불렀다. 속칭명은 자솔리이다.

  • 봉평리 : 옛날 이마을에는 쑥이 많았으며 서방의 딴봉 밑에 연못이 있다하여 봉호리(蓬湖里)라 불렀는데, 이는 마을 앞 논과 공동묘지 앞 논밭에 농사를 짓기 위해 겨울이면 천수(天水)를 많이 가구어 놓아 이것이 봄철까지 만수(滿水)가 되어 마치 호수를 이루었으므로 용수구미(龍沼峴)로 구전되어 오다 봉호(蓬湖)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대에 오현면(梧峴面)이었을때 산세를 좌우한 봉평리와 화포리를 합쳐서 오현리(梧峴里)라 불러 오다 그후 지형상 연유로 두 마을의 앞과 뒤의 고개(峴)를 사이에 두고 각각 분리 했으며, 1915년 서편에 있는 밧두루마을(外坪里)과 합해서 봉평리(蓬坪里)라 명명 했다.

  • 화포리 : 아득한 옛날 화포리는 예국의 땅으로서 그시대 당시 화포리 동쪽의 높은 산이 마치 매가 앉아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응봉이라 하였다고 하며 응봉앞에 있는 현 화포리 마을의 도국형상이 작은 새가 응봉을 향해 날으는 형상과 같아 화포리의 옛이름을 응추촌(鷹雛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 원당리 : 마을의 속칭명은 월안리(月安里)라 하는데 이는 뒷산이 반달형이라 하여 부르던 동반월동(東半月洞)과 서반월동(西半月洞)을 합쳐서 월안리라 하였다고 하며 후에 원래 서북간에 연못이 있다하여 부르던 원당리(源塘里)에 편입 됐다.

  • 용하리 : 마을 뒤에 용의 형상을 닮은 암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늪(湖)이 있었으므로 옛적부터 용호촌(龍湖村)이라 불러왔는데 1915년 행정구역 방향으로 하산북리(下山北里)와 합하여 용하리(龍下里)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시대 말에는 이곳에 토기를 만드는 토기점(土器店)이 1973년까지 있었다.

  • 산북리 : 병인양요 후에 노인산 밑에서 토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오던 마을인 토기점 마을과 거진면에서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부르던 상산북리란 마을이 흩어져 살다가 후에 두마을을 합쳐서 산북리라 불렀다. 속칭 산두라 부르다가 후에 산북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

  • 송강리 : 학봉산하에 있는 대대골(大谷村)과 고대에 동구(東口)섬이라 부르던 몽강촌(夢江村)을 합하여 상걸리(上巨呑里)라 불러오다 후에 송강리(松江里)라 부르고있다. 수복당시 이 부락이 뒤늦게 입주가 허용되어 옛송강초등학교는 송정리로 옮겨졌다. 마을 남쪽에 해당하는 산에는 송림이 우거져 있었으나 1986년에 대형산불로 인해 많은 수목이 소실되어 현재는 잡목이 우거져 있다.

  • 석문리 : 서북간의 문안골(門內谷) 어구에 있는 계류(溪流)의 양쪽산 옆에 절벽을 이루는 암석이 있는데, 그 모양이 돌기둥(石柱門)을 세운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석문리(石門里)라 불렀다. 문안골에는 옛 절터가 있다.

  • 초계리 : 높은 산(高峴山) 아래인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여섯 모퉁이(동안터, 장밭골(長位田洞), 윗마을(上村), 새잇마을, 아랫마을, 을용동)로 나뉘어져 살며 마을길이가 1.5㎞나 되는 부락으로서 마을 앞에 길게 흐르는 소하천은 옛부터 장마때마다 범람하여 매년 농지가 사토(沙土)로 매몰 되어서 매우 모래(沙)가 많고 또는 외나무 다리가 많기로 유명하며 항시 다리놓기에 도끼(斤)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오정리 : 태고때부터 마을 옆에 있는 바위 틈에서 옥수(玉水)가 잘 솟아 나오므로 옥길동(玉吉洞)이라 불렀다. 그후 조선 중엽에 와서 마을의 샘물을 주(周)나라의 유명한 칠수(漆水)에 비유하여 칠동(漆洞)이라고 고쳐 불렀다가 오동(梧桐)나무가 번성하여 자연적으로 정자(亭子)를 이루었다 하여 오정리(梧亭里)라 고쳐 부르게 됐다. 1915년부터 1945년까지는 초계리(草溪里) 2구(區)라고 불렀다. 오정리 태고때부터 마을 옆에 있는 바위 틈에서 옥수(玉水)가 잘 솟아 나오므로 옥길동(玉吉洞)이라 불렀다. 그후 조선 중엽에 와서 마을의 샘물을 주(周)나라의 유명한 칠수(漆水)에 비유하여 칠동(漆洞)이라고 고쳐 불렀다가 오동(梧桐)나무가 번성하여 자연적으로 정자(亭子)를 이루었다 하여 오정리(梧亭里)라 고쳐 부르게 됐다. 1915년부터 1945년까지는 초계리(草溪里) 2구(區)라고 불렀다.

  • 대대리 : 마을의 뒷산인 노구산(老구山)이 마치 세마리의 큰 학(鶴)이 사이좋게 날개를 펴고 앉은 것과 같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터(垈)라고 하여 '학터' 또는 학대리(鶴垈里)로 옛날부터 불리웠다. 그후 어음(語音)이 자주 변하여서 현재는 '한터' 또는 대대리(大垈里)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전하여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마을 뒷쪽에 있는 노구산의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거북이가 사자 4마리를 등에 업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사자 4마리는 동서남북을 향하여 본마을을 사수하는 형이라 했다.

  • 송죽리 : 옛날에 송학동(松鶴洞)과 죽포리(竹泡里)라고 불리우는 두 마을이 있었다. 송학동(松鶴洞)은 송림이 무성하고 앞뜰에 학(鶴)이 찾아온다고 하여 칭하였고 또 한곳은 북천하구에 자리잡은 곳으로 앞산인 마산(馬山) 기슭에 호수와 대나무가 있어서 죽포동(竹泡洞)이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죽포동이 옛적에 수해로 인하여 가옥이 유실된 후 1915년에 두마을을 합하여 송죽리(松竹里)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에 있는 마산은 옛날에 용마가 났으나 용마(龍馬)를 탈 장사가 마을에 태어나지 않아 용마가 의리상 그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마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반암리 : 이 마을은 해안이 돌아가는 모퉁이에 위치하였기에 옛적에는 돌구미 또는 회진리(回津里)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마을 지하에 암반이 있다 하여 반바우라고도 불러오다 그후 마을 주변에 암석과 해중(海中)의 평평한 반석이 널려있기에 반암리(盤岩里)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서쪽에는 임진왜란 등 또는 국난이 있을때 마다 신호의 역할을 하였던 높은 봉수봉(옛 正陽山)이 있다.

  • 송포리 : 송포는 두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아랫마을은 뒷산이 말이 누운 것 같은 형국을 하고 있으며 소나무가 잘 자란다고 하여 송마직리(松馬直里)라고 불리우다 후에 송림앞에 늪이 있다하여 송호리(松湖里)로 개칭했다. 윗마을은 북방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의 윗쪽으로 1㎞ 상거한 자산천 옆에 2,000평의 큰 늪 (浦)이 영조 22년(1789)까지 있었다고 하여 포남리(浦南里)라고 불리웠으며, 1915년 송호리와 포남리를 합해 송포리(松浦里)라 부르고 있다. 송호리는 송포2리로, 포남리는 송포1리로 각각 행정구역을 분리하였다.

  • 냉천리(거진읍 주민 미거주 마을) : 약동쪽에는 석문리, 남쪽에는 간성읍 탑현리, 서쪽에 수동면 고진동계곡, 북쪽에 송강리와 용하리가 있다.대사찰인 건봉사가 있는 부락으로 관모봉(冠帽峰)과 건봉령(乾鳳嶺)에서 신비로이 흐르는 맑고 찬 샘물이 사찰과 마을 중심을 흐르므로 냉천리(冷川里)라 불렀다. 1989년도 민통선이 북상함에 따라 건봉사에 승려들의 거주가 시작됐고, 현재는 활발한 건봉사 복원사업으로 점차 옛날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냉천골은 송강리저 수지 축조로 인해 지금은 많은 부분이 물속에 잠겼다.

  • 장항리(거진읍 주민 미거주 마을) : 1950년 6.25를 전후하여 자연적으로 민가가 유리(流離)하여 지금은 부락이 없어졌다.
<출처: 고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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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지역의 옛이야기

5.1.화진포 전설 - 화진포와 고총서낭


지금 호수가 된 화진포에는 이화진이라는 시아버지와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화진이라는 영감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서 성질이 고약하고 구두쇠로 소문나 있었다. 어느 날 인근에 있는 건봉사 스님이 와서 "시주 좀 하십시오" 하니 이화진 영감은 하인을 시켜 처음에는 좁쌀 한 홉 정도를 주었다. 스님은 "고맙습니다" 하면서 염불을 하고 돌아갔다. 그 후 3년이 지나 스님이 또 "시주 좀 하십시오'하니 좁쌀 한 숟가락을 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고맙습니다" 하면서 염불을 외며 가세의 번창을 기원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스님이 또 "시주 좀 하십시오" 하고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니 자꾸 찾아오는 스님이 밉기도 하고 주는 곡식을 아깝게 여기던 이화진 영감은 외양간으로 가서 소똥을 한 삽 퍼내 "에라, 우린 시주할 것이 없으니 이거나 가져가라" 하고 쏟아부으니 스님은 "감사합니다" 하고 장삼자락을 벌려 받았다. 스님은 소똥이 담긴 장삼자락을 싸 쥐고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돌아갔다. 부엌에서 일하면서 이 광경을 지켜본 이화진의 착한 며느리는 스님에게 동냥을 대신해 소똥을 퍼주는 시아버지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얼른 광에 들어가서 쌀을 몇 되박을 행주치마에 싸서 스님을 쫓아갔다. 스님은 잰 걸음으로 저만치 가고 있는데 며느리가 "대사님! 대사님!" 하고 불러도 뒤도 돌아 보지 않은 채 그냥 가는 것이었다. "우리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하시고 대신 이 시주를 받아 가세요."해도 스님은 아무 소리 없이 산록으로 올라갔다. 화진포의 높은 산록 고총서낭이라는 곳에서 스님은 멈춰 서서 며느리를 돌아보며 "왜 나를 자꾸 쫓아오느냐?"라고 말했다. 며느리는 "우리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제가 주는 이 시주를 받아 가세요'하고 쌀을 내주니 그걸 받지 않고 "고개를 돌려 살던 집을 보라.'라고 스님이 얘기했다. 며느리가 집을 돌아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살던 집과 텃밭은 오간데 없고 호수가 되고 만 것이다. 다시 스님을 돌아보니 스님 역시 종적을 감춘 뒤였다. 며느리는 갑자기 오갈 데가 없어진 것과 순간에 일어난 일이 너무 허망하고 애통하여 허리띠를 풀어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후 어찌 된 일인지 온 나라와 이 지방에 큰 홍수가 나고 농사가 안돼 흉년이 들고 전염병까지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등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화진의 논과 집이 물바다가 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나더니 결국 이 동네 나무꾼이 나무하러 갔다가 이화진의 며느리가 목매달아 죽은 시신을 발견해 알아보니 착한 며느리가 애통한 심경으로 자살한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곳에 이름 없는 묘를 만들고 서낭을 지어 일 년에 한 번씩 서낭굿을 해준 다음부터는 농사도 잘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결국 화진포는 이화진의 논인데 그렇게 못되게 굴어서 벌을 받고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5.2.벼락바위 이야기

거진읍 송포리와 반암리 사이에 일명 돌고개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 옛날 집채만 한 큰 바위가 세 개가 있었다. 그 바위 곁으로 나있는 길을 옛날에는 구작로라 했는데 그길로 사람들이 다녔다. 제일 큰 바위는 집 한두 배쯤 되고 그 밑에 밭 가는 쟁기 보습처럼 생긴 바위와 널찍한 바위 등 세 개가 있었다. 6.25동란 때 대부분 훼손되었고, 길을 넓힐 때 바위 귀퉁이가 깨져 바위 일부가 남아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지금으로부터 한 백여 년 전에 그곳에는 집이 몇 채 있었는데 어느 집에 어머니와 아들 단둘이 살고 있는 초가집이 있었다. 아들은 여기서 한 20리쯤 떨어진 간성의 장터에서 삼베옷과 무명옷 등 옷감 장사를 했는데 하루는 장사를 다 끝내고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작스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려고 먹구름이 일면서 소낙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를 맞은 아들은 집이 가까워 뛰어갈 수는 있었지만 등에 걸머진 옷감 때문에 우선 그 삐죽이 앞으로 삐져나온 세 개의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찌 된 영문인지 집에 있던 어머니가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데 횃불을 들고 자기 집 처마 밑을 돌아가며 불을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처마에다 불을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아들은 그만 바위 밑에서 후다닥 뛰어나와 집으로 달렸다. 그 순간 아들이 비를 피했던 바위 위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바위가 무너졌다. 놀란 아들이 집에 달려가 불을 끄고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다.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아들에게 말했다. 그날 집에 동냥을 얻으러 온 노승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 보리쌀 반되밖에 줄 수 없었다. 보리쌀을 받은 노승이 고맙다며 돌아서서 말했다. "당신네 아들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소. 그러니 소나기가 내리게 되면 집에 불을 놓으시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로에다 불씨를 묻어 놓았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처마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아들이 바위에서 후다닥 뛰어나오는 바람에 아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나기가 막 퍼부으니 처마만 타고 불이 저절로 꺼져 집도 무사했다. 그때부터 돌고개 바위에 벼락이 쳤다고 해서 벼락바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5.3.물속의 명당자리

옛날 거진읍 화포리에 아버지와 아들 두 형제가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 두 아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날 산에다 묻지 말아라. 이 고개를 넘어가면 조그만 소[1]가 하나 있는데 그 물은 밤 12시만 되면 갑자기 바짝 마를 것이다. 물이 마르고 그 안에 계단이 보일 테니까 계단을 따라 내려가라. 그 계단 맨 아래에 이만한 돌 독이 하나 있을 테니 그 돌 뚜껑을 달랑 열고 그 안에 날 집어넣어 뚜껑을 꽉 닫고 빨리 바깥으로 나오거라. 만약 늦게 올라오면 물이 차서 죽게 되니 그 점을 명심해라." 하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런데 맏아들이 아무리 아버지 유언이라 해도 어떻게 아버지를 물속에 눕히냐며 풍수 잘하는 사람을 극진히 모셔다가 좋은 산소 자리를 잡으려고 이산 저 산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이때 동생이 형에게 "아. 형님 아버님 원하신 대로 해드립시다."라고 제안을 했더니 형은 '아무리 아버님의 유언이지만 물속에 모실 수 없다."라고 말하며, "묘를 잘 써야 우리가 복을 받는다."라고 동생의 제안을 거절했다. 며칠간 이렇게 찾아다니다 손님을 치르고 또 산소를 찾아다니느라고 피곤해서 밤에 깜박 잠이 든 사이 동생이 몰래 들어와서 죽은 아버지가 들어 있는 널을 지게에 젊어지고 고개 너머 소가 있는 데로 갔는데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밤 12시가 되니 물이 바짝 마르는 것이었다. 물이 없어지자 계단이 나오기에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커다란 돌 항아리가 있었다. 그래서 동생은 돌 뚜껑을 열고 아버지를 그곳에 모신 뒤 얼른 뚜껑을 덮고 뛰어올라와서 뒤를 돌아보니까 어느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은 "이제 아버님을 소에 모셨으니 집에는 못 들어 간다."라고 생각하고 산으로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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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역의 명소

7.1.건봉사

건봉사건봉사는 고성8경 중 하나로 전국 4대사찰 중 한 곳이다.
신라 법흥왕(서기520년)때 지어진 오랜 사찰이다. 건봉사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와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 (보물 제1336호), 그 양쪽에 바라밀[2] 문양의 돌기둥, 불이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이 옛 건봉사터(강원도 기념물 제51호)에 천년이 넘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7.2. 화진포

화진포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주변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주변에 유명한 별장들이 많았던 곳으로 지금도 이승만대통령 화진포 기념관과 별장, 이기붕별장, 김일성 별장이 역사 안보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화진포는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붙여진 이름으로 동해안 최대의 자연호수이다. 1970년대부터 겨울 철새이면서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청둥오리 등 철새가 많이 날아와 호수일대에 장관을 이루고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길 280



 

7.3.화진포 생태 박물관

화진포 생태박물관은 층별 3개 전시관에서 화진포호수와 관련한 생태계를 관찰, 학습할 수 있다. 기증받은 수십•수백 종의 박제와 골격, 화석류와 영상, 실물모형등을 통해 화진포호의 생성과정, 동식물 생태계 등을 관찰 수 있으며 신재생에너지와 지구환경 관련 영상도 관람할 수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길 278




 

7.4.김일성 별장

김일성별장외국인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이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김일성이 별장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길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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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거진초등학교, 거성초등학교
중학교 : 거진중학교
고등학교 : 거진정보공업고등학교

9.기타

Footnotes

  1. ^ 연못
  2. ^ 불교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 수행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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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