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왕면

                                                                                                                                                                                                                                                           

1.개요

산, 바다, 호수가 어울려 아름다운 우리 죽왕면은 천년의 신비 해양심층수와, 송지호, 왕곡마을 등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마을이다.
백도해변, 문암해변, 삼포해변, 봉수대해변, 송지호해변, 가진해변 등 해안선에 맞닿아 있어 여름날의 휴양과 짜릿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여름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죽왕 #죽왕면

2.인구

2020년 기준(자료갱신일: 2020.12) / 단위 : 명
3,777총 인구수
1,967인구(남)
1,810인구(여)

4.지명의 유래

  • 오호리 : 속칭 오리진(五里津)이라고도 하며 옛날 마을근처에 송지호(松池湖), 금지호(錦池湖), 번개, 버덩개(野浦), 황포라고 불리던 다섯가지의 개가 있어 오호리(五湖里)라 칭하였다고 한다. '96년 4월 23일 대형산불로 인해 울창한 주변송림이 크게 소실되었다.

  • 향목리 : 지금부터 약700년전인 1285년에 향목리 정씨 선조(정씨가문 6대조)께서 울릉도에서 이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3본의 향나무를 갖고와 처음으로 향나무가 크게 자라자 그때까지 없었던 마을명을 향나무와 연결하여 향목리(香木里)라 칭하였다. 현재는 향나무가 없고 그자리(현재 박화실씨 집뒤)만 남아있다.

  • 가진리 : 어촌마을로 옛부터 다른 어항보다 수산물이 많이 나서 주민생활에 덕이 많이 되었다 하여 약 100여년전부터 속칭 덕포라 불렀으며 후에 작은 나루가 하나 더 생겨나자 가포진(加浦津 더포)이라고 불리웠는데 1914년 리명 개편시 가진리(加津里)로 고쳤다.

  • 공현진리 : 지금부터 약 400년전에 간성 현감 이택당이 선유담에서 작시한 글에“ 공수왕처세방회(公須往處勢方回)“란 글을 인용하여 속칭 공수진이라 하였는데 1970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공수진리의 '공(公)'과 인근부락 장현리의 '현(峴)'을 합하여 공현진리(公峴津里)가 되었다.

  • 오봉리 : 조선시대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으로 불러오다가 한일합 방과 동시에 금성, 왕곡, 적동이 합하여 오봉리(五峰里)로 되었다. 마을의 뒷쪽에는 오음산(五音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의 정상에 올라가면 주위에 있는 장현리(長峴里), 왕곡리(旺谷里), 적동리(笛洞里), 서성리(西城里), 탑동리(塔洞里) 등 6개 마을에서 들려오는 닭소리와 개짖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하여 오음산(五音山)이라 불렀다고 하며 오봉1,2리를 중심으로 5개의 높은 산이 둘러서 있어 오봉리(五峰里)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오음산에 대한 다른 전설로는 옛날 산밑에 선유담이 있었는데 신선이 이 산에 성 오음육율을 즐겼다하여 오음산이라 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삼포리 : 옛적에는 순포리(蓴浦里)라고 하였는데 순포리(荀浦里)라고도 하였으며,지금으로부터 520년전(1415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순포 서북방 300m지점에 3㏊의 넓은 늪(개)이 있었는데 그 주위에 풀이 무성하여 풀이름 '순(荀)'자에 호수'포(浦)'자를 써서 순포라고 불렀다. 현재 그곳은 논으로 변하고 인근 산야 및 집 주위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후에 포월, 황포, 순포 등으로 부락이 분산되어 행정구역 분할시 삼포(三浦)로 개칭 되었다.

  • 인정리 : 처음에는 이 마을을 감인당(甘仁堂)이라 하였고 평촌리(坪村里)라는 부,분적인 명칭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해 감인당(甘仁堂)의 '인(仁)'자와 화정(花亭)의 '정(亭)'자를 따서 인정1리, 2리로 명명하고 지금까지 부르고있다. 마을을 수호해 주는 봉현(鳳峴)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은 부엉이가 3일만 울면 비가 내린다 하여 봉현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산위에 거대한 바위옆(신선바위)을 지날때 이 바위에 올라 시를 읊고 글을 지으며 노닐었다고 한다.

  • 구성리 : 속칭 구돈리(九頓里) 혹은 서성리라고도 하는데 서기 1564년경 유산허씨(柳珊虛氏)가 이부락을 재건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서기 1600년경에 봉화정씨(奉化鄭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순흥안씨(順興安氏) 등이 거주하여 포두리(逋頭里)로 마을이름이 통하여 오다가 그후 연대는 알수 없으나 정씨, 김씨, 안씨, 이씨 등이 거주할 당시 포두입을리(逋頭入乙里), 서파리(西派里) 등으로 계속 개칭되어 왔다. 세조때에는 간성군 남죽도면 서성리로 다시 개칭되어 그후 여러 성씨로 약 30호 가량이 거주하였다가 서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간성군 죽도면 구성리로, 그후 1945년에는 양양군 죽왕면 구성리로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야촌리 : 1915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송정(松亭洞), 곡실(谷室), 삼성동(三星洞)등 세부락을 합하여 하토성리(下土城里)라 하다가 후에 다시 야촌리(野村里)라고 불렀다.

  • 송암리 : 옛날에는 오랜된 소나무 1그루가 홀로 서 있다고 하여 독송정(獨松亭)이라고 했다. 1953년에 민통선이 삼포리까지 되자 수천가구가 이마을에 안착하게 되었고 행정구역 분할시 송암리(松岩里)로 되었다.

  • 문암진리 : 만호리, 괘진리(掛津里), 망포리, 망개리 등의 속칭이 있으며 전해오는 속칭명의 유래가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유민들이 들어와 어업과 농업을 겸업으로 하여 살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영토확장으로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땅인 이 마을을 침략하였다. 이때 신라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장군이 이들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으나 갑작스런 침략과 힘의 부족으로 혼자 남게 된 장군은 이곳 해안의 바위 밑에서 장렬하게 전사 했다. 그러나 장군은 마을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 하였던지 장군이 죽은 자리에 난데없이돌로된 미륵동이 생겨났다. 장군이 돌아올날 만을 기다리던 고향의 부인은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왔으나 기다리던 남편은 죽고 미륵동만 남아 있었다. 비통함과 애절함을 참지 못한 부인은 바닷가 미륵동 옆에서 밤낮을 슬피 울며 애통해 하다가 기진맥진하여 죽게 되었다. 죽은 후에도 남편의 혼(魂)인 미륵동을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부인의 혼(魂)은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키게 되었다. 죽을 때 부인은 내가 죽어 뱀이 돼 미륵동을 지킬때 나를 해하지 않고 보살펴 주면 이곳 마을은 신라사람 만호(萬戶)가 거주하여 온 주민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부터 이 마을을 만호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이 소문을 들은 고구려의 박씨란 성을 가진 사람이 부인의 혼(魂)인 뱀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를 본 마을주민들은 멀지 않은 시기에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조선말엽에 와서는 망포리(亡浦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가 그후 언제부터 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부락 앞에 개(浦)가 있고 개울을 바라보는 부락이라 하여 망개라고 불렀다. 그후 1919년에 와서 문암리로, 그리고 1954년에 현재의 문암1리로 분리 되었다.

  • 마좌리(죽왕면 주민 미거주 마을) : 마을 뒤 마산에 위치하여 '마좌리'라 부른다. 이 마을은 1983년 10월 5일 군부대 주둔으로 19가구에 남자 43명, 여자 38명 등 모두 81명이 집단 이주한 부락으로 현재 민간인이 살지 않는 마을이다.

<출처: 고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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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지역의 옛이야기

5.1.효자 함희석

5.2.송지호 정부자 이야기

 송지호는 고려 말까지 비옥한 땅이었다. 조선 초기, 이 땅에서 곡식을 많이 거둬들이던 부자가 살았는데, 그 부자의 이름은 정거재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와 어린 딸이 정부잣집 문을 두드렸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거지이오니 한 푼 도와주십시오“라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대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연거푸 도움을 청하자 조용하던 정 부잣집 대문이 열리더니 종이 나와 ”여기가 뉘집인 줄 알고 동냥 구할 생각을 하시오? 어서 돌아가시오“라고 나무랐다. 부녀가 머뭇거리자 재차 호통을 치면서 ”가라면 빨리 가시오. 주인마님이 아시면 매가 춤을 추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부녀와 종들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웬 놈이냐? 단잠을 깨우는 놈이, 그놈을 당장 끌어들여라.“라는 정부자의 호령이 떨어졌다. 대청마루에 앉은 정 부자에게 부녀는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한참 부녀를 노려보던 정부자는 ”저놈은 내 재산에 달걀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을 방해한 놈이다. 닭이 막 알을 낳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인데 그 꿈을 꾸게 하다니 아이고, 원통해라. 저놈을 마구치고 오줌이나 잔뜩 먹여 보내라.“라고 소리쳤다. 결국 부녀는 동냥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종들에게 모진 매를 맞고 집 밖으로 쫓겨났다. 정 부잣집에서 쫓겨난 부녀가 길가에서 서럽게 울고 있자, 그곳을 지나던 노스님이 발길을 멈추고 부녀에게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부녀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노스님은 부녀에게 몇 푼의 엽전을 들려주고 정 부자의 집을 찾아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시주를 요청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대문 안에서 정 부자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렸다. ”씨끄럽구나, 저 중놈에게 쇠똥이나 한짐 지워 보내라.“라는 정부자의 호령이 떨어졌다. 종들은 스님의 시주 걸망에 소똥을 잔뜩 담은 후 스님을 내쫓았다. 노스님은 정 부잣집을 나서는 순간 문간 옆에 놓여있던 쇠 절구를 정부자의 금방아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쇠 절구가 떨어진 곳에서 물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노스님은 왼쪽 두루마기의 고름을 뜯어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걸고 주문을 외워 홀연히 사라졌다. 노스님이 사라지자 물기둥은 일곱 줄로 늘어나 정부자의 집과 금방아, 그리고 논과 밭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놀란 종들은 노스님이 소나무에 걸어놓은 두루마기 고름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부자는 그대로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5.3.빈대와 적곡사지(笛谷寺址)

 고성군 죽왕면 오봉 2리에서 서북쪽으로 3km쯤 오르면 흩어진 기와조각만이 나뒹구는 적곡사의 절터가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적곡사는 고려초 한 고승이 이곳을 지나다 온천을 발견하여 절을 세웠다 한다. 이곳에 절을 세우자 인근 부락인 탑동(塔洞), 화정(花亭), 평촌(坪材), 적동(笛洞) 등에서 신도들이 찾아와 절이 점점 번창해 갈수록 절에서 승려들은 게을러지고 수도에 힘쓰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탁발승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탁발승에게 보여준 이절 승려들의 행실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나태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승복은 빨지를 않아 때와 이가 득실거렸고 절 주위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사람이 살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였다. 또한 승려들이 곳곳을 다니며 못된 짓을 하여 신도 및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탁발승은 생각 끝에 이들에게 훈계로는 문란해진 생활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앞으로 3년 동안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부처님의 노여움을 크게 사리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탁발승이 떠난 뒤부터 이 절에는 전에 없던 빈대가 득실 거리기 시작하여 승려들을 괴롭혀 앉아있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승려들은 잠자리를 마당이나 숲속으로 옮겼으나 빈대는 여전히 괴롭혔다. 참다못한 승려들은 마침내 회의를 열었다.”이러한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3년 동안 떠나 생활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빈대들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될 것이니 그때 다시 모입시다."하고 한 노승이 제의했다. 그러자 다른 승려들고 모두 찬성하여 3년후 추석날, 다시 모이기로 한후 제각기 흩어졌다.  절을 띠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승려들의 생활이란 편할 리가 없었다. 살을 에는듯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이집 저집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찬 이슬을 맞으며 숲속에서 자기도 하며 떠돌 다녔다. 그런데 중들은 속죄는커녕 자기들이 왜 고생을 하는지 반성하지도 않고 빈대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들의 떠돌이 생활은 계속되었고 밥만 먹으면 아무 데서나 뒹굴며 3년의 세월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떠돌이 3년이 지나자 중들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기다리던 중들이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걸식 생활을 면하게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들은 마당에 모여 그동안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빈대가 없어진 절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 기뻐하였다. 중들이 법당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처님 앞에 난데없이 금기둥이 서 있었다. 중들은 자기들의 3년 동안 고생을 불쌍히 여겨 부처님이 하사하신 금기둥이라 믿고 기쁜 마음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천둥과 함께 금기둥은 무너지고 기둥에 매달렸던 중들은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 기둥은 금기둥이 아니고 빈대들이 3년 동안 부처님 앞에 응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기둥을 이룬 빈대 기둥이었던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이 절을 찾아왔던 탁발승을 게으르고 타락한 중들을 구제하러 왔던 부처님의 현신(現身)이라 말하고 있다. 그 후 적곡사(笛谷寺)는 폐허가 됐고 따뜻한 물이 솟아오르던 온천도 서서히 찬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산나물을 캐러 왔던 아낙네들이 타는 목을 이 샘터에서 축이며 쉬어갈 뿐 천년의 세월 속에 수풀만이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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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역의 명소

7.1.송지호

송지호자연호수와 죽도가 어우러져 경관이 수려한 고성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송지호는 둘레가 약 6km(20만평), 수심이 5m에 달하며 짠물이 섞여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다. 물빛이 청명하고 수심이 일정해 도미와 전어 등 바닷고기와 잉어, 숭어 같은 민물고기가 함께 살고 있어 겨울 철새가 머물다 가는 철새도래지이다. 송지호 옆 송지호관망타워에서 청둥오리 기러기 떼와 천연기념물인 고니를 관찰할 수도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동해대로 6021




 

7.2.고성왕곡마을

왕곡마을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 오봉리라 불린다는 작은 마을의 옛 이름이 왕곡마을이다. 왕곡마을은 전통건조물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어 가옥의 개보수가 불가하여 전통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마을이다. 왕곡마을 가옥들의 굴뚝 위에는 항아리가 얹어져 있다. 이는 마을에 우물이 없는데 마을의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하며,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지금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길 36-13




 

 7.3.해양심층수 연구센터

한국해양연구원 후보지 8개소 중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 송지호 일대 국책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개발하고 있다.










 

7.4.어명기 고택

undefined어명기 전통가옥은 1500년대에 처음 지었으나 1750년에 불타 없어졌고, 3년 뒤에 다시 지어졌다고 하니 약 240년 된 옛집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31호로 지정돼 있다. 강원도 일대의 상류 주택은 주로 강릉 지방에 많은데, 대개 홑집 구조에 ㅁ자형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명기 전통가옥은 상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겹집 구조를 갖추고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 1리





 

7.5.고성문암선사유적

undefined죽왕면 문암1리에 있는 고성 문암리 유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알려진 양양 오산리 유적(B.C.6000~3000)과 연대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암리 유적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농사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밭이 확인되어 중요성을 가진다. 이 밭은 동아시아의 농경 유적 중 최초의 것으로 평가받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다. 문암리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덧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등 전기 신석기 시대의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1번지 외





 

7.6.공현진 해변

국도7호선 상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깨끗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조용한 해변으로 가족단위 피서객이 즐겨찾는 곳이다. 1989년 7월 개장되어 매년 해변과 백사장이 사계절 개방되며, 주변에 공현진항과 방파제가 있어 싱싱한 활어회와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2리




 

7.7.백도 해변

백도해변백도해변은 수심이 낮고 국도변에 접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해수욕장 서편에는 송림이 우거져 가족단위의 해수욕장으로 매년 해수욕장과 백사장이 사계절 운영된다. 해변 개장 기간 중 오토캠핑장을 운영하여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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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죽왕초등학교, 공현진초등학교, 오호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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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