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김삿갓)

                                                                                                                                                                                                                                                           

1.개요

조선 후기 방랑 시인이다.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별칭 :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
►성별 : 남
►시대 : 조선 후기
►출생~사망 : 1826 ~ 1863년
►출생지 : 양주
►본관 : 안동(安東)
►주요업적 : 조선 후기 시인
 
김삿갓 묘

2.생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金安根)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김익순은 함흥 중군(咸興 中軍:정3품)으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방어사(防禦使)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참고 문헌:안동김씨문헌록)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가문에서 종 노릇을 하던 사람(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4형제를 키워내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 뒤에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랑 도중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3.업적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4.관련 유물 및 유적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5.참고자료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방랑 중이던 29세 때는 가련(嘉蓮)이라는 기녀와 동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에게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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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