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1896년 의병이 봉기할 때 의병을 일으켰다.
►별칭 : 자는 경륙(景六), 호는 백우(白愚) ►성별 : 남 ►시대 : 대한제국 말 ►출생~사망 : 1864~1911 ►출생지 : 삼척 ►본관 : 삼척(三陟) ►주요업적 : 의병장 |
1897년(건양1)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쫓아가 가담을 자원하였다.
김상태는 1864년(고종 원년)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후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하동면은 2019년 10월 20일 명칭이 김삿갓면으로 변경됨] 옥동리로 이주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모집해 영월, 단양, 풍기 등지에서 일본 수비군을 격퇴시켰다. 김상태는 처음에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병 부대와 함께 문경에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1896]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 후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진에 합류하여 싸웠다. 김상태는 호좌의진이 북상한 이후 유인석을 좇아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며, 백두산 주변과 무송·임강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김상태는 귀국하여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이강년과 서로 의지하다가 1905년(광무 9) 정운경(鄭雲慶)[1861~1939]의 봉기에 참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융희 원년) 고종의 퇴위와 그 뒤에 이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한 원주 진위대의 무기를 얻어 사군 지역[제천·청풍·단양·영춘]의 병력을 모아 스스로 이강년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어 다시 의병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문경 갈평을 비롯하여 영월·서벽·풍기·죽령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1907년 백자동 전투에서는 매복 작전을 전개하고 진군해 오던 200명 규모의 일본군을 기습하여 부대장을 포함한 적군 11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와 물자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의병 피해는 전사자 3명이 발생하였다고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에 나온다.
1984년 11월 제천시가 ‘의병묘역성역화계획’에 따라 조성한 고암동 순국선열 묘역에 있다.
지금은 김상태 의병장 추모 제향과 문화제[추진위원장 주인섭]가 김삿갓면 옥동리에 있는 충절사와 김삿갓면 사무소 광장에서 지역 주민, 학생, 군인, 공무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려 김상태 의병장의 살신보국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