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절사

                                                                                                                                                                                                                                                           

1.개요

단종(재위 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재위 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육신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와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문화재유형 : 유형문화재
►지정종목 : 유형문화재 제27호
►지정일 : 1971년 12월 16일
►소재지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시대 : 조선
 

2.세부설명

창절사는 장릉경내에 건립하였던 육신사(六臣祠)에서 비롯되었다. 1685년(숙종 11)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이 3칸의 사우를 세웠는데, 1698년 노산군에 대한 복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부터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당을 둘 수 있느냐가 논란이 되면서 1705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 후 1709년영월 유생의 소청으로 ‘육신사(六臣祠)’를 ‘창절사(彰節祠)’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렸다. 당초에는 사육신만이 배향되었으나 창절사로 사액되면서 이후로 김시습과 남효온·박심문·엄흥도가 추가로 배향되었으며,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되었다.

 

4.참고자료

현재 서원에는 2층 누문(樓門)인 배견루(拜鵑樓)가 정문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彰節書院”이라 현액(懸額)된 강당이 있으며, 그 뒷쪽으로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창절사와 동·서무(東·西廡)가 있다.
내삼문에는 예전의 ‘六臣祠’ 현판이 걸려 있고, ‘창절사’ 현판은 1709년 윤사국(尹師國)이 쓴 것이다. 이곳의 건물은 1788년(정조 12)의 대대적인 보수를 비롯하여 그뒤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다. 매년 봄·가을에 제향을 올린다.

5.기타

창절사는 후학을 양성하는 서원으로 세워지기는 했지만 사실상 사육신을 포함한 10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의 서원이다. 출입문으로 대견루라는 문루가 있으며, 강당과 동.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이 앞쪽에, 사당과 동.서무로 구성된 제향공간이 뒷편에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많은 위패를 모시고 있어서 그런지 앞면 5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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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