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절사는 장릉경내에 건립하였던 육신사(六臣祠)에서 비롯되었다. 1685년(숙종 11)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이 3칸의 사우를 세웠는데, 1698년 노산군에 대한 복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부터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당을 둘 수 있느냐가 논란이 되면서 1705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 후 1709년영월 유생의 소청으로 ‘육신사(六臣祠)’를 ‘창절사(彰節祠)’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렸다. 당초에는 사육신만이 배향되었으나 창절사로 사액되면서 이후로 김시습과 남효온·박심문·엄흥도가 추가로 배향되었으며,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되었다.
창절사는 후학을 양성하는 서원으로 세워지기는 했지만 사실상 사육신을 포함한 10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 중심의 서원이다. 출입문으로 대견루라는 문루가 있으며, 강당과 동.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이 앞쪽에, 사당과 동.서무로 구성된 제향공간이 뒷편에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많은 위패를 모시고 있어서 그런지 앞면 5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