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누각이다.
▶문화재유형 : 유형문화재 ▶지정종목 : 보물 ▶지정일 :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37(성내동 8-2) ▶시대 : 고려~조선 |
관동지방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이 있다. 이를 관동팔경이라고 한다.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삼척)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이들이 관동팔경 중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해변에 위치한 고을들은 대관령 밖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데는 모롱이 진 큰 못이 있고, 어떤 데는 기이한 바위가 우뚝 솟고, 또 어떤 데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기도 하다.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해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이 있다. 서쪽으로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푸른 기운이 감돌고 이내 속으로 바위 골짜기가 그윽하고 어둑하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 50리의 여울을 이루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혀 부서진다. 이처럼 색다르고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유람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수(眉) 허목(1595~1682)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1662년에 지은 ‘죽서루기(竹西樓記)’ 내용이다.
죽서루 명칭과 관련된 이야기로 두 가지 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삼척에 황진이 버금가는 기생이 있었는데, 그녀의 정조는 대나무와 같았고 자태는 선녀와 같았기에 죽죽선녀(竹竹仙女)로 불리었다. 선비와 관리들이 죽죽선녀의 유희소로 몰려들었고, 죽죽선녀 유희소 서쪽 오십천 절벽 위에 절묘하게 세워진 누각을 죽서루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함께 누각의 동쪽에 대나무 숲이 있고, 그 대나무 숲 안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죽서루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허목의 죽서루기에는 ‘옛날 누각 아래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루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라고 적고 있다.
죽서루(보물 213호)는 미수 허목이 표현한 것처럼 삼척의 오십천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누각이 관동팔경의 하나로 들어가고 그중에서도 제일로 꼽힌 것은 누각이 웅장하거나 특별히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다. 누각이 위치한 지형의 아름다운 경치 덕분이다. 1921년 이학규가 쓴 중수기에서도 ‘시내 위에 떠 있는 구름과 산봉우리에 걸려 있는 달 사이에 그 수많은 아름다운 경치는 대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누각이 아주 높은 절벽 위에 있어 오십천을 내려다보면 물이 돌아나가면서 소(沼)를 이루는데, 물속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를 난간에 기대어 서서도 헤아릴 수 있으니 매우 아름다운 경치다’라며 멋진 경관을 묘사하고 있다.
죽서루에 오르면 이런 풍광을 대변하는 글귀의 편액(건물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이 있으니 ‘제일계정(第一溪亭)’이다. ‘시냇가에 있는 정자 중 첫째가는 정자’라는 의미다. 1662년 죽서루기를 쓴 미수 허목이 같은 해에 쓴 글씨 편액으로 전한다. 미수 허목 은 ‘미수전(眉篆)’으로 통하는, 독특한 전서체 글씨로 유명하다. 미수는 곳곳에 많은 편 글씨를 남겼는데, 거의 모두가 전서체 글씨다. ‘제일계정’처럼 행초(行草: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글씨) 글씨로 남긴 편액은 이것 말고는 찾기 어렵다. 호쾌하게 쓴 것으로 누구나 좋아할, 시원하고 유려한 글씨다. 68세 때 글씨다.
4장의 판자를 붙이고 테두리를 따로 해 만든 편액으로,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되어 있다.
죽서루에는 이 편액과 함께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이 쓴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현판이 걸려 있다. ‘바다 신선이 노닐던 장소’라는 뜻이다. 누각 처마에는 1710년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죽서루(竹西樓)’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창건자와 창건 연대는 미상이지만 1266년(고려 원종7)에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가 안집사(安集使) 진자후(陳子候)와 같이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겨 둔 것을 보아 1266년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서루 주변에는 고려 시대에 죽장사(竹藏寺), 조선 시대에 진주관(珍珠館)·응벽헌(凝碧軒)·연근당(燕謹堂)·서별당(西別堂) 등 여러 건물을 지어 놓고 선인(先人)들이 그 경관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진주관은 죽서루 북쪽에 있었다. 조선 시대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객사였다. 1908년에 삼척군청으로 이용하다가 1934년에 헐어 없앴다. 응벽헌은 응벽담 위쪽 진주관의 서헌(西軒)이다. 1518년에 부사 남순종(南順宗)이 창건하였지만 1908년에 헐어 없앴다. 서별당은 연근당 아래에 있었다. 1586년에 부사 강세윤(姜世胤)[1521~?]이 창건했다가 없어진 것을 1661년 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다시 지어서 독서당으로 사용했다. 연근당은 죽서루 남쪽에 있다. 1442년(세종 24)에 부사 민소생(閔紹生)이 죽서루의 별관으로 창건하였으며, 대소객(大小客)의 안식처로 사용되었지만, 근년까지 있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죽서루는 경치 좋은 절벽 위에 건축하기 위하여 자연 암반을 기초로 삼았다. 누 하층에는 17개의 기둥이 있다. 그 가운데 9개의 기둥은 자연 암반 위에 세우고 나머지 8개의 기둥은 석초(石礎)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7개의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이 세워진 7간(間)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예부터 시인 묵객이 이곳에 무수히 찾아와 청유(淸遊)하면서 시 한 편 남기지 않은 사람 없을 정도로 죽서루는 시문 많기로 이름이 났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를 필두로 이곡(李穀)[1298~1351]·안축(安軸)[1282~1348]·정추(鄭樞)[1333~1382]·김구용(金九容)[1338~1384]·김극기(金克己) 등과 조선 시대 숙종대왕·정조대왕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하륜(河倫)[1347~1416]·이륙(李陸)[1438~1498]·심언광(沈彦光)[1487~1540]·이이(李珥)[1536~1584]·양사언(楊士彦)[1517~1584]·차운로(車雲輅)[1559~?]·정철(鄭澈)[1536~1593]·허목·신광수(申光洙)[1712~1775] 등 명인대가(名人大家)의 시문이 200여 수 남아 있어 그야말로 죽서루는 시문의 터라 할 수 있다. 특히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 죽서루를 크게 찬양하여 죽서루 광장에는 ‘송강 정철의 가사터’라는 시비가 서 있다.
[지도 등 기타자료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