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미로면 동안호 816 두타산에 있는 고려 시대의 뛰어난 문인이자 정치가인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집을 짓고 살던 터이다.
▶문화재유형 : 유형문화재 ▶지정종목 : 사적 ▶지정일 : ▶소재지 : 미로면 동안로 816 ▶시대 : 고려 |
동안거사 이승휴는 삼척지역에서 머무르는 동안 현재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 지락당, 보광정, 표음정을 지어 동해 삼화사에서 약 1000상자의 불경을 빌려 읽으며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고, 이후 1294년(충렬왕 20) 되던 해에 홀연히 용안당 간판을 간장사(看藏寺)[현재 천은사]로 개칭하고 승려가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이 곳에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곳이 현재까지 천은사로 내려져 오고 있다.
이승휴는 고려 충렬왕 때 고쳐야 할 폐단 10개 조를 올려 파직된 후 삼척에 내려와 두타산 자락인 구동, 즉 현재의 삼척 천은사 경내에 용안당을 비롯한 몇 가지 시설을 조성하여 10여 년 동안 머물렀다. 그가 남긴 유적은 2000년 9월 16일 사적 제421호인 ‘삼척두타산이승휴유허(三陟頭陀山李承休遺墟)’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삼척두타산이승휴유적(三陟頭陀山李承休遺蹟)’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적이 소재한 천은사는 본래 신라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명(寺名)은 ‘백련대(白蓮臺)→간장암[간장사]→흑악사(黑岳寺)→천은사(天恩寺)’로 변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여기서 ‘간장암[간장사]’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이승휴의 「보광정기(葆光亭記)」와 「간장사기(看藏寺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승휴가 활동하던 시대는 기존의 귀족 문화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때는 강계의 난,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사회 변화 및 신분 계층 간 변동기에 아직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중앙 관계로 진출하려는 재능이 뛰어난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진사대부로 불렸으며 뛰어난 교양과 능력을 토대로 사회 변혁에 부응하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면서 그 시대를 일깨웠다. 이승휴 또한 초기 신진사대부에 속한다.
현재 천은사 경내에 있는 이승휴 관련 유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지락당(知樂塘)이란 연못지이다. ‘지락당’이란 명칭은 “나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기르고 물고기는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 사이에서 즐겁게 뛰노니 이곳이야말로 저마다 자기 자리를 얻어서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즐거움을 알고 나는 나대로 즐거움을 아노라”라는 장자 제물편의 말을 취하여 지었다고 한다. 사찰에 조성된 연못지는 대부분 연꽃을 심어 조경했는데 이곳에도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청자 도요지이다. 이 청자 도요지는 현 주지 스님 거처인 용안당 건물 뒤편의 동북쪽으로 나 있는, 당시의 암자인 화엄암과 부도군으로 올라가는 길 좌측 편인 산 경사면에 있다. 가마 유구는 전체 한 곳으로 북서-남동향의 자연 경사면과 같은 방향으로 시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구는 길이 남-북 3.2m 및 동-서 4.4m 규모로, 평면 장타원형의 소규모 가마이다.
세 번째는 이승휴가 주석할 당시에 만들었다는 용안당(容安堂)과 보광정(葆光亭)으로 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간장사기」를 통하여 이승휴가 주석한 용안당이 간장사, 즉 현재 천은사이다. 이는 조선 시대의 각종 기록과 고지도(古地圖)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천은사는 이승휴 관련 유적과 함께 신라 최전성기 양식을 계승한 유물인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고려 후기 양식의 불상을 계승한 조선 전기 불상인 목조아미타삼존불(木造阿彌陀三尊佛),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 부모를 모신 준경묘·영경묘의 조포사(造泡寺)로 기능하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포사는 나라에 지내는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맡아 만드는 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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