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정상에 있는 비석
▶문화재유형 : 유형문화재 ▶지정종목 : 강원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 ▶소재지 : 허목길 13-9(정상동 82-1) ▶시대 : 조선 |
삼척 척주동해비와 평수토찬비는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정상부 일대에 위치하며,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조선 시대 삼척부사 허목(許穆)[1595~1682] 이 1661년(현종 2)에 세운 비석(碑石)이다. 허목이 1660~1662년 부사로 재임하고 있던 당시 동해의 조수가 시내까지 들어오고, 여름철 홍수로 인하여 삼척시의 젖줄인 오십천(五十川) 하구가 막히고 범람하여 가옥과 농작물이 유실되는 등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피해가 없기를 염원하기 위하여 철학의 극치와 신비로운 문장으로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독특하고 막힘이 없는 전서(고대의 한자 글씨체)로 비석에 글씨를 써서 정라(汀羅) 만리도(萬里島) [지금의 정라동 큰 방파제 끝]에 ‘동해비(東海碑)’를 세웠다. 이후 자연도 이 신비로운 문장의 위력과 덕행에 감동되었는지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비석을 조수를 물리치는 위력이 있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 또는 ‘진동비(鎭東碑)’라고도 불린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는 1660년(현종 원년)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당시 허목이 중국 형산(衡山)에 있는 하(夏)나라 시조 우제(㝢帝)가 썼다는 형산비(衡山碑)에서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모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렸다. 24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 당시의 군청에 목판으로 보관해 오다 1904년(고종 41) 9월 칙사(勅使) 종2품 강홍대(康洪大)[1867~?]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1942] 등이 고종의 명을 받아 돌에 새겨서 죽관도(竹串島)[지금의 현 위치인 육향산]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척주동해비는 현재 전면에 ‘척주동해비각(陟州東海碑閣)’, 후면에 ‘동해비각(東海碑閣)’이라고 쓴 제액(글씨가 써져 있는 액자)이 걸려 있는 비각(碑閣) 안에 세워져서 보존되어있다. 대한평수토찬비는 현재 비 전면에 ‘우전각(禹篆閣)’이라고 쓴 제액이 걸려 있는 비각 안에 세워져서 보존되어 오고 있다.
척주동해비는 허목의 학문 세계가 응축된 작품으로, 조선 후기 당시 중국에서도 한나라 이후 허목의 전서체(고대 한자 글씨체)를 따라 올해 자가 없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 간에서도 문장 역시 “고문에서 제일이다”라는 평가를 얻었다. 서체와 문장 등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대한평수토찬비 역시 독특한 전서체로 쓴 작품으로, 척주동해비와 함께 한국서예사에서 위상은 매우 높다. 중국의 글씨와 뚜렷이 구별되는 창조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금석문(비석에 새겨진 글자.)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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