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면

                                                                                                                                                                                                                                                           

1.개요

성산면은 태백준령 기슭에 위치한 영동의 관문으로 도시적 편리함과 전원적 쾌적함이 공존하고, 역사와 전통이 계승 보존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울창한 산림과 맑은계곡이 조화를 이루는 천혜의 청정환경 지역이다.
성산면은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보현산성이 있어서 성산이라 하여 건금, 위촌, 구산, 송암, 관음, 서원, 제민원의 7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에 송암, 위촌, 구산, 금산, 오봉, 관음, 어흘, 보광등 8개리로 개편 관할하였고, 1983년 2월 15일 “읍면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구정면 산북리가 편입되어 현재는 9개리로 되어 있다.

2.인구

2022년 기준(자료갱신일: 2022.08) / 단위 : 명
3,481총 인구수
1,778인구(남)
1,703인구(여)

4.지명의 유래

  • 산북리 : 산북리는 원래 강릉군 구정면 지역으로 새재(왕산면 도마리와 경계)뒤가 된다고 하여 산 뒤, 산두(山斗)라 했는데 1916년 나맬, 버당말(坪村), 자포골(自飽洞), 좌망두(坐望頭)를 합하여 山北里라 하여 하구정면에 속했다가 하구정면이 구정면으로 될 때 구정면에 속했다. 그후 1983년 2월 15일 “읍면 행정구역조정”에 따라 성산면에 편입되었다.
  • 오봉리 :오봉리는 1916년 오봉산 밑에 있어서 오봉리라 했다. 마을 뒤에는 대관령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낙맥에 제왕산을 중심으로 산봉우리가 5개가 나란히 서 있고, 마을 뒤엔 오봉서원이 있다.
  • 어흘리: 어흘리는 1914년에 가마골, 문안, 반쟁이, 굴면이, 망월이, 제민원을 합쳐 어흘리라고 했다. 어흘리는 대관령을 끼고 있는 비교적 넓은 지역으로 정상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넓고, 기다랗게 물건을 늘어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어흘리는 주위의 여러 지역을 총칭한 지명인데 “어울리다, 만나다”라는 뜻인 느느리, 느러리 라는 말을 음차한 것이다. 그리고 於屹이라는 것은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수하는 곳의 지명이다.
  • 보광리 : 보광리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보현촌, 보광동, 보갱이라 하다가 1916년 무일동, 삼왕동, 무시골을 합해 보광리라 했다. 신라때 낭원대사가 세운 보현사의 “보”자를 따고 마을이 빛을 내는 곳이란 뜻에서 보광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관음리, 위촌리, 사천면, 사기막리, 서쪽으로는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천면 사기막리, 남쪽으로는 어흘리, 북쪽으로는 사천면 사기막리와 접해 있다.
  • 송암리 : 송암리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1916년 거릿말, 광양, 미리재, 안마을을 합하여 송암리라 했는데 마을엔 소나무와 바위가 많이 있다. 위촌리에 있는 송양초등학교는 원래 이 마을에 있었으나, 위촌리에 사람이 많이 살아 위촌리로 옮겼다. 마을 뒤엔 고봉이 있고, 보광리와 경계에 있는 미리재에서 발원한 냇가가 마을 가운데로 흘러 강릉시 대전동, 난곡동으로 해서 경포호로 흐른다.
  • 위촌리 : 위촌리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우출이라고 하다가 1916년 골아우(鯨岩洞), 새잇말, 송두골, 항생골(恒生洞), 지암돌(芝岩洞)을 합해 중국 주나라의 재상 강태공이 낚시하던 위수와 같다고 하여 위촌이라 했다. 渭村里의 속명이 우출인 것은 마을 제일안쪽 골아우에 있는 臥牛型의 묘자리에서 소가 나왔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그러다가 300여년전 풍기 고을원을 지낸 渭川 金世祿이란 분의 호를 따서 위천이라 하다가 그후 “川” 자 대신 “村”자를 썼다. 위촌은 조선조시대 그림을 잘그린 명서였는데 특히 대나무를 잘그렸다. 그가 그린 대나무에서 밤에 바람소리가 났다고 한다.
  • 금산리 : 금산리는 조선조 11대 중종때 김관헌이란 분이 세운 마을이라 하여 건금리(갱금)라 하던 것이 1916년 장안동, 제동, 구동, 성하를 합하여 금산리라 했다. 금산리는 강릉 최씨(평장공파)의 시조인 최입지 공의 묘가 있는 산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옥녀탄금형)이여서 금산(琴山)이라 하다가 강릉김씨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琴”자 대신 음이 같은 “金”자를 써서 금산리라 한다.
  • 관음리 : 관음리는 1916년 안곡(안국동), 개자리(가좌리), 괴일(고곡동)을 합하여 관음리라 했는데 이는 본동 입구 북쪽 골에 관음사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관음은 성산면에서 제일 가운데 위치한 행정리로 동쪽은 금산리, 서쪽은 어흘리, 보광리, 남쪽은 구산리, 북쪽은 보광리, 위촌리와 접해 있다. 옛날 본동에는 관음사가 있었고, 안곡에는 안곡사가 있었는데 어느절이 본사이고 말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안곡에 5층석탑이 밭 가운데 있다. 옛날 정월 대보름에 이 마을 사람과 금산리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수리봉에 올라가 봉화놀이를 했는데, 횃불을 들고 산에 먼저 올라 갈려고 마을 사람끼리 서로 싸웠다. 왜냐하면 횃불을 먼저 들고 올라가는 마을이 한해 농사가 잘되었기 때문이다.
  • 구산리 : 구산리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1916년에 갈마동을 합하여 구산리라 했다. 택리지 산수중 산편에 보면 “ 위대관령 동통강릉이영하 유구산동 천석절승”이란 구절이 있어 구산은 강릉으로 통하는 관문임을 알수 있는데 옛날 이곳에는 대창도가 딸린 구산역이 있었다. 구산은 위촌리와 더불어 우방수가 들어오는 곳이라 예부터 인물이 많이 났다. 구산이란 이름은 중국 노나라 때 공자의 어머니가 이구산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공자를 낳아 공자의 이름이 구인데 이곳이 공자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린 이구산과 비슷하게 생겨 이구산이라 했다. 그후 “尼”자를 떼내고 그냥 丘山이라 하다가 성현의 이름(공자의 이름이 丘)은 함부로 쓰지 않고, 부르지도 않는다고 하여 “丘”자와 음이 같은 “邱”자를 써서 邱山이라 했다.


<출처: 강릉시청>

5.지역의 옛이야기

5.1.대공산성과 칼

여게 쭉 올라가면 대공산성이 있거던. 대공산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대궁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그 산성의 유래는 잘 모르겠어. 큰대(大)자, 구멍 공(孔)자로 모는 사람도 있고 활궁(弓)자로 보는 사람도 있지. 거기에 가보면 쇳물을 녹인 대장간 자리가 있고 우물 자리도 있고 동문, 서문이 있던 돌쩌구의 흔적도 있어.

이 성을 쌓은 시기는 신라때인지 고려때인지 분명치 않은데 “마의태자가 성을 쌓고 임시로 머물렀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이런 성을 쌓고 임시로 머물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단 말야.

강릉이 바닷가에 있으니까 이곳으로 왜구가 자주 침범했단 말이야. 그러니 이를 막기 위해 금산에 비상성이 있어. 거기에 비상성을 쌓아놓고 여기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적의 침략이 있으면 거기서 일단 방어를 하고 여기엔 비상 식량을 비축해 놓는다든지 해서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것 같단 말이야.

언젠가 어떤 사람이 성 근처에서 장칼을 주은 일이 있는데 꿈에 선몽하기를 “그걸 도로 갖다 놓아라.” 하기에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고 해.

그리고 만기라는 사람도 이 근처 생명골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갔다가 녹슨 장도칼을 주어 가지고 왔더니 꿈에 장수가 나타나더니 “이 놈, 당장 그 자리에 갖다 놓지 못하겠는냐?” 하고 호통을 쳐서 다시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고 하는 말이 있어.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그곳에 자주 나물을 캐러 갔는데 한번은 어느 아주머니가 칼을 주워가지고 왔더니 갑자기 식구가 앓아서 칼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니 나았다는 말도 있어요.

대공산성 밑에 장이 섰던 장터거리가 있고 마장은 옛날에 말을 맨 자리래. 성 뒤로는 깃대 바위가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할머니가 애를 업고 있는 것 같이 생긴 할미바위와 갓처럼 된 갓바위가 있어.

1. 조사일자 : 1995. 10. 27. 2. 제 보 자 : 정종순(55세. 여, 성산면 보광2리) 3. <한국 강릉지역의 설화> 두창구 저. 국학자료원.1999

 

5.2.보현사의 유래

보현사가 창건된 것은 지금부터 1,300년 전쯤 일이야. 보살은 문수보살하고 보현보살이 있어.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고, 보현보살은 행(行)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인데 그 두 분의 보살을 이제 천축국, 지금은 인도이지만 거기에서 배를 타고 남항진이라는 곳, 지금 그 강릉 공항이 있는 쪽 남항진, 거게 배를 대고 그 옆에다가 한송사라고 쪼그만 절을 짓고 모셨는데, 거기에 두 분 보살이 같은 절에서 이렇게 거처하니까 별로 의미가 없거던.

“한 절에 굳이 두 보살을 모실 필요가 있느냐?” 스님들이 이렇게 상의한 끝에 “이절엔 보살님 한 분만 모시고 다른 보살님은 다른 절에 모시자.”하고 합의를 봤대. 그래 이제 두 분의 부처 중에서 보현보살을 옮기기로 하고 옮길 장소를 정하는데 “이 한송사에서 활을 쏴 가지고 활이 떨어지는 곳에다가 절을 짓고 모시도록 하자.” 이렇게 결정을 봤대. 그런 뒤에 대관령을 향해서 활을 쐈더니 지금의 보현사 자리에 떨어졌다고 그래.

이렇게 되어 화살이 떨어진 곳에 절을 짓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보현사라 부르지 않고 지장선원이라고 했대.

절에는 보살이 있는데 보살마다 각각 담당하는 역할이 다르대. 그런데, 지장보살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모조리 제도하고 난 후에 자기가 성불하겠다, 부처님이 되겠다. 이렇게 뜻을 세우신 분이야.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지장선원이라고 했는데, 조선조시대까지 400여년 동안 지장선원이라고 부르다가 후대에 와서 보현도량이라 해서 보현사라 이렇게 이름을 지었어.

1. 조사일자 : 1996. 5. 12. 2. 제보자 : 도완스님 (출가한지 22년, 남,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 주지)

5.3. 어흘리의 여러 마을 이름 유래

8.지역의 교육기관

초등학교 : 성산초등학교,송양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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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