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신 7인이 이성계의 회유를 피해 정선으로 숨어와 임금에 대한 충성과 자신들의 처지를 한시로 지어부른 것이 정선아라리의 노랫말이 되었다는 ‘거칠현설’이 있음.
►별칭 : ►성별 : ►시대 : 고려말~조선전기 ►출생~사망 : ►출생지 : ►본관 : ►주요업적 : 고려 충신 7인이 이성계의 회유를 피해 정선으로 숨어와 임금에 대한 충성과 자신들의 처지를 한시로 지어부른 것이 정선아라리의 노랫말이 되었다는 ‘거칠현설’이 있음. | ![]() |
거칠현설은 정선아라리의 근원설화 중 일반화된 설이다. 정선 지역민들에겐 거의 정설로 통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유신들 중 72명이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충직한 신하는 결코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충절을 맹세하고 숨어든 곳이 개성의 ‘두문동’ 이었고, 여기서 이성계의 회유가 집요해지자 다시 이를 피해 일부가 흩어져 숨어든 곳이 강원도 정선 땅이었다. 이때 온 이들이 7인이었고, 그래서 이들이 머문 곳을 후세에 ‘거칠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매일 아침 관복을 옛 궁궐 쪽에 걸어 놓고, 중국의 백이숙제의 고사(故事)처럼 서운산(瑞雲山)의 고사리와 산나물을 캐 먹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리고 이웃 여주의 목은 이색이나 원주의 원천석과 같은 이들과 회한을 나누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시로 지어 부른 것이 인근에 풀이되어 전해져 정선아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정선아라리의 제 1절 격인 다음의 노랫말이라고 한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 온다.”
여기서 눈이나 비가 오려는 암울한 상황은 고려 말의 국운을 말하는 것이며, ‘만수산’이란 옛 도읍지인 개경의 주산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이 7인이니 7수의 한사와 그 풀이한 노랫말도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주장은「정선전씨대동보」나「고려숭의록」등에 명시하고 있으나 이런 주장에 대해 이의가 없지 않다. 즉, ‘7현이라는 일곱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가 명확치 않다든가, 그들이 남긴 한시 7편의 문헌적 근거가 불분명하다든가, 그 시에 의한 사설이 확인되지 않다든가, 결정적으로는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어원의 단서가 어느 시에 있는가? 등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 설은 정선아라리의 움직일 수 없는 기원설화로 자리집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목은 이색 시 수용설이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눈이나 비가 오려는 암울한 상황은 고려 말의 국운을 말하는 것이며, ‘만수산'이란 옛 도읍지인 개경의 주산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7인이니 7수의 한사와 그 풀이한 노랫말도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주장은「정선전씨 대동보」나「고려 숭의록」등에서 확인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이의가 없지 않다. 즉, 7현이라는 일곱 사람이 과연 누구 누구인가가 명확치 않다든가, 그들이 남긴 한시 7편의 문헌적 군거가 불분명하다든가, 그 시에 의한 사설이 확인되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 설은 정선아라리의 움직일 수 없는 기원설화로 자리집고 있다.
• 고려시대의 충신 7인으로 이성계의 회유를 피해 정선으로 숨어와 그곳이‘거칠현동’
이라 불림
• 고사리와 산나물을 캐 먹으며 세상을 등지고 삶
• 자신들의 처지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한시로 지어부른 것이 인근에 풍리되어 정선아라리가 되었다는 ‘거칠현설’이 전해 내려옴.
• 정선아리랑문화재단에서는 ‘거칠현’이라는 정선아리랑극을 연출하여 발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