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화가)

                                                                                                                                                                                                                                                           

1.개요

한국의 화가. 어렵고 고단한 시절을 힘겹게 살다간 대표적인 서민화가로 회백색의 화강암과 같은 독특한 마티에르와 단순한 검은 선의 기법으로 가난하고 소박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았다. 대표작에 빨래터,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등이 있다.

 
►별칭 : 대한민국 서민화가, 대한민국 3대 화가, 미석(美石)
►성별 : 남
►시대 : 근, 현대시대
►출생~사망 : 1914년 2월 21일 ~ 1965년 5월 6일
►출생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주요업적 : 주요작품 <농악>,<나무와 여인>,<빨래터>,<고목과 여인> 등
서민의 일상을 향토성 짙은 작품으로 가장 한국적인 현대 회화를 표현하는 화가
 

2.생애

<1910년대>
1914 2월 21(음력 128)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지금은 읍())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의 삼대 독자로 출생
<1920년대>
1921(7세)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도화(미술)시간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함.
1926(12세) 그림 재주가 뛰어나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귀여움을 받음. 이 무렵, 프랑스의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晩鐘)'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음.
1927 (13세)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함. 집안이 빈곤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자 화가의 꿈도 좌절에 직면함.
                 
그러나 화가의 길에대해 절실한 소망과 그의 재능을 애석하게 여긴 교장선생님의 격려로 독학의 결심을 굳힘.
                 
이후 날마다 가까운 산과 들로 다니며 연필스케치와 수채화 훈련을 쌓았고,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과 들에서 나물 캐는 소녀를 그리기도 함.
<1930년대>
1932 (18세)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서양화부에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
1935 (21세) 유방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춘천으로 가서 최악의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에 정진함.
1936 (22세) 15[선전]<일하는 여인>이라는 수채화를 출품하여 두 번째 입선함.
1937 (23세) 16[선전]에 나물캐는 소녀들을 스케치한 수채화 <>이 세 번째로 입선함.
1938 (24세) 17[선전]에서 어렵게 구입한 유채로 처음 그린 <농가의 여인>이 입선함.
1939 (25세) 18[선전]에 유채로 그린 <여일(麗日)>이 입선함.
 
<1940년대>
1940(26세) 210, 금성 감리교회에서 김복순과 결혼함. 5월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이 되어 평양으로 떠남.
1941 (27세) [조선미술전람회]연속 입선화가로서 기량을 계속 다짐. 20[선전]<맷돌질하는 여인>이 입선함.
1942 (28세) 봄에 첫아들 성소(成沼)를 낳음. 21[선전]에서 사랑스런 첫아들을 안은 아내를 모델로 그린 <모자(母子)>가 입선함.
1943 (29세) 22[선전]에서 역시 아내를 모델로 하여 그린 <실을 뽑는 여인>이 입선함.
1944 (30세) 첫 딸 인숙(仁淑)을 낳음.미군의 폭격이 평양에도 미치게 되자 부녀자와 노약자의 소개령이 내려 아내와 어린 남매를 함께 금성 본가로 보냄.
1945 (31세) 평양에서 혼자 남아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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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에 평안남도 도청 서기직을 그만두고 처자가 있는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생활을 하게 됨.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자유사상을 지닌 화가로 공산 체제의 감시를 받고 문초도 당함.
1947 (33세) 차남 성남(成男 뒤에 城男으로 씀)이 태어남.
1948 (34세) 큰아들 성소가 뇌염으로 죽음.
1949 (35세) 3남 성인(成仁)이 태어남.
 
<1950년대>
1950(36세) 6.25 전쟁이 일어남. 신변에 위험을 느껴 금성에서 몇 십리 떨어진 시골로 가족이 함께 피함.
                   몇 번 체포고비를 넘기다가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자유를 얻음.
                 
그러나 연말의 중공군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또다시 위협을 느끼고 시골로 피하던 도중 인민군 추격으로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하를 결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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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성인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음.
1951 (37세)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노동으로 생활하면서 자유로워진 몸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함
1952 (38세) 10. 공산치하로 되돌아간 금성에 남아 숨어 지내던 아내가 어린 남매 인숙, 성남이를 데리고 남하에 성공함.
                
이 무렵, 박수근은 서울 창신동의 큰 처남 (김영주, 6.25 전에 월남) 집에 가있으면서 처자의 남하 여부를 매일 수소문하던 중 그곳으로 찾아온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함.
1953 (39세) 이상우의 소개로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어 다녔으며, 또한 미 8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훨씬 수입이 좋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여기서 모은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은 마루를 제작 공간으로 삼아 창작에 열중함.
               
전쟁으로 중단됐다가 이 해 가을에 속개된 제2[대한민국 미술전(國展)] 서양화부에 남한에서의 첫 출품한 <>이 특선으로 선정되고 각광을 받았으며, <노상에서>가 입선하였음.
1954 (40세) 3[국전]에서 <풍경>, <절구>가 입선함. 6.25 발발 4주년 기념 대한미협전에 회원으로 <>, <길가 에서>를 출품함.
1955 (41세) 4[국전]에서 <오후>가 입선함. 7[대한미협전]<두 여인>(국회문공위원장상 수상), <노상>, <풍경>을 출품함.
1956 (42세) 5[국전]에서 <나무>가 입선함. 8[대한미협전]<노상>, <풍경>을 출품함. 이 해에 둘째 딸 인애(仁愛)가 태어남(1967년 병으로 죽음)
1957 (43세) 6[국전]을 위해 1백호 크기의 대작 <세 여인>을 고심해서 제작하여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자 충격과 비탄에 빠지고 이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 않던 음주가 심해짐.
1958 (44세) 반도화랑의 창설과 운영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화상 겸 수집가인 미국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의 콜렉션으로 들어갔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됨. 뉴욕의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모자(母子)>, <노상>, <풍경>을 출품함.
1959 (45세) 국전 운영 부서로부터 추천 작가 결정을 통고받고 이 해의 제 8회전에 <한일(閑日)><좌녀(坐女)>를 출품함.
                  
조선일보사 주최 제 3회 현대작가 초대미전에 <>, <휴녀(休女)>, <노인과 유동(遊童)>을 출품함.
 
<1960년대>
1960(46세) 9[국전]에 추천 작가로 <노상의 소녀들>을 출품함.
1961 (47세) 10[국전]에 추천작가로 <노인>을 출품함.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국제자유미술전]<나무>를 출품함.
1962 (48세) 11[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소와 유동(遊童)>(호암미술관 소장)을 출품함.
                 
오산에 있던 주한미공군사령부(USAFK) 도서관에서 [박수근 특별초대전] 마련.
                 
마닐라 [한국현대미술전]에 초대 출품함. 김흥수씨 화집 출판(유네스코 출판부)에 대해 "[디럭스]화집, 완전한 예술의 재현 
               
 김흥수씨의 역작들"이라는 '신간소개' 글을 신문에 기고함.
1963 (49세) 12[국전]에 추천작가로 <()>을 출품함 과음이 계속되던 끝에 신장과 간이 나빠지고, 그로 인한 발병했던 왼쪽 눈의 백내장을 수술 비용이 없어 악화된 뒤에야
                 한 안과병원에서 수술을 함
. 그러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더욱 고통을 받다가 다른 병원에서의 재수술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 눈을 아주 못 보게 됨.
               
이후 안경을 끼게 되고 오른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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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집이 가집행철거소송에 제기되어 재판을 통하여 지상권을 따 내었으나 창신동에서 전농동 77번지 235반으로 이사함.
               
밀러 부인이 다음해인 1964년에 로스엔젤레스에서의 개인전을 제의하고 미국에 있는 그의 작품 수집가들과 연락을 취하였으나 열지 못함.
1964 (50세) 지병이던 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면서 심한 고통이 따랐으나 음주와 제작 생활을 강행함.
               
가을의 제 13[국전]에 추천작가로 <할아버지와 손자>(국립현대미술관 소장)를 출품함.
1965 (51세)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4월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함.
                그러나 회복이 어렵게 되자 55일 퇴원. 집에서 6일 새벽 새벽 1시에 생애를 마침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함. 가을의 14[국전]에 미망인이 마지막으로 유작 <유동(遊童)>을 전시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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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의 유작전에 79점의 작품이 전시됨.

 

3.업적

박수근의 작품세계- 한국 화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그림에는 꾸밈없는 생활 속의 시골사람들이 등장한다. 행상이나 빨래터 또는 절구질하는 아낙네들이 주로 등장하고 담소를 즐기는 노인들이나 놀이에 빠진 어린이들도 즐겨 그렸다. 상당수의 화가들이 서구적 분위기의 귀부인이나 유한(有閑) 취미 속의 고급스런 인물을 선택할 때 그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았다.
이같은 인물들은 거짓 없는 한국인의 한 전형으로 화면에 묘사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자연도 양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이기 십상이었다. 특히 공간감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화시켜 이 소재들은 극도로 단순명료한 형태로 응축되었다. 절제된 선묘(線描)는 결코 허장성세(虛張聲勢)에 의한 과장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극도로 추상화되어 본질을 은폐시키지도 않았다. 절제의 미를 체질적으로 화면에 옮겨 민족정서를 그려냈다.
특히 화면 바탕의 처리방식이 독특하여 두툼한 질감을 느끼게 했다.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의 표면처럼 우툴두툴한 효과를 냈다. 마치 오랜 풍상에 시달린 마애불상처럼 형상이 바탕의 매체에 깊이 스며 일체감을 이룬 자연성을 느끼게 했다. 또 회색 등 무채색 계열을 기조색으로 삼고 있어 한결 깊이있고 무게가 있는 듯한 장엄미도 배어 있다.
원색에 의한 화려함을 거부하고 질박한 색채와 표면질감으로 견고함을 이루어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가졌다. 오랜 잔향(殘響)이 남게 되는 그의 화폭은 한국인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 부담감 없는 조형적 호소력을 가졌다. 회색조의 두툼한 질감 위에 평범한 인물과 주변풍경이 간결하고 담담한 단순구도로 압축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중섭(李仲燮)과 쌍벽을 이룬 1950년대 이후 작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중섭이 분방한 선묘에 다양한 색채를 구사했다면, 박수근은 반대로 최대한 절제된 화면효과를 추구했다. 둘 다 민족회화의 구현이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했지만, 박수근은 보다 규모있는 대작으로 일관된 조형논리를 전개시킨 특징을 보인다. 대표작으로 농악(1932)·나무와 여인(1950년대행인(1964)·할아버지와 손자(1964)·소와 유동(遊童)(1962) 등이 있다.
화강암 표면같은 우툴두툴한 질감 표현- 박수근은 독특한 화면 효과를 얻기 위해 흰색 물감을 많이 썼으며, 여기에 회색과 갈색을 섞은 회갈색 또는 황색과 갈색을 환합한 황갈색 주조의 두터운 질감을 만들어 냈다. 아들 박성남은 질감에서 배어 나오는 색깔을 서해안 갯벌색, 기왓장이나 토기의 고풍스런 색감, 나무의 찌든 색감에 비유했다. 햇살이 비치면 갯벌의 색깔과 분위기가 변하듯 박수근의 그림도 보는 각도나 조명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텁게 물감을 쌓아 올려 거친 요철이 생기고 씨줄날줄의 열십자 터치가 흰색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꽃잎이나 눈송이 같은 효과를 살려낸다. 이 같은 화면에 굵은 선으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그려 넣으면, 마치 상감청자나 마애불처럼 표면을 새겨 넣은 것처럼 보인다. 이 기법이 박수근 그림을 독창적으로 보이게 하는 비결이다.
가장 한국적이고 독창적인 서민화가-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자신의 화실조차 가지지 못했고, 개인전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화가 박수근. 그러나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회고전이 열리고, 작품들은 고가로 팔리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가장 비싼 작품값을 기록하고 있다.
박수근은 ‘유화로 표현되지만 동양화임이 분명한, 향토적 리얼리티를 발현한 작가로 평가된다. 이렇듯 그가 독창적인 시선과 화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으로 독학한 덕분이기도 했다. 동시대 화가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서양 미술을 배웠으며, 점진적으로 발전된 서구의 다양한 화풍을 일시에 습득하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창출해 내지 못했다. 특히 해방 이후에는 서구화풍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향토적이고 풍속적인 소재, 토속적 정서에 부합하는 작풍을 무시하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박수근은 일률적이고 진부하기 쉬운 향토 주제를 들고 나오면서도 그것을 안가의 지방 취미로 타락시키지 않고 높은 민족의 서정시로 지향시켰다.”라는 평가를 받은 유일한 작가이다.

4.관련 유물 및 유적

• 박수근의 대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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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