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국장에 참례하고 때마침 장안에서 봉기한 독립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문을 자신의 버선목에 몰래 감추어 가지고 하양하여 거사의 주동함.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침
▶별칭 : ▶성별 : 남 ▶시대 : 일제강점기 ▶출생~사망 : 1888~1951 ▶출생지 :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본관 : 함평 ▶주요업적 : 물치시장에는 수백명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이재훈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침, 1982년 8월 15일 정부에서 그의 공적을 찬양하여 대통령표창에 추서됨 | ![]() |
함평이씨 가문인 중추원 의관을 지낸 이석범의 장자로 출생하여 유년시절은 임천리에서 성장하였으며 소년기는 부모를 따라 중도문리에 옮겨 살면서 쌍천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현산학교를 거쳐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이수한 수재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시운이 뒤 따르지 못했다. 志土의 아버지 이석범은 유림의 대가로서 도천면 중도문리에서 은거하고 있을때 고종 국장에 참례하고 때마침 장안에서 봉기한 독립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문을 자신의 버선목에 몰래 감추어 가지고 하양하여 거사의 주동이 되었다.
양양읍 임천리 이교완 집을 3·1만세운동의 본거지로 삼고 도천면은 이재훈이 주동이 되어 중도문리 이종국 집에서 김영경, 이국범, 이재형, 박사집 등 다수 각리의 유지와 은밀히 모의하면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준비하고 4월 4일밤 각리 책임자에게 다음날 물치시장에서 있을 독립만세운동에 동원할 것을 권유하였다. 4월 5일 물치시장에는 수백명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이재훈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군중과 합세하여 대포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자 왜인들은 당황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하였다. 4월 6일 오후 1시경 각면에서 동원된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양양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왜경과 대치하여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폭악무도한 왜적의 총검 앞에 무참히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을 씌워 1년8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 옥고를 마치고 중도문리에 돌아왔으나 일제의 모든 의혹을 뿌리치고 청빈한 생활을 일관하다가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뜻한바 있어 서울에 이거하였고 6·25동란으로 피난도중 1951년 4월 여주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