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 문인이다.
▶별칭 :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벽산(碧山) ▶성별 : 남 ▶시대 : 조선 중기 ▶출생~사망 : 1435년∼1493년 ▶출생지 : 서울 ▶본관 : 강릉 ▶주요업적 : 금오신화(金鰲新話),매월당집,십현담요해 |
천재의 자질을 타고나서 3세에 벌써 글자를 알아 시를 지었으며, 5세 때는 「중용」과 「대학」에 능했다 한다.
세종대왕은 승지를 시켜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도록 한 다음 상을 내리고 "장차 크게 쓰겠노라"고 하였으며, 세상에서 그를 "오세"라고 일컫게 되었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그는 3일을 통곡한 끝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10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였으며, 이 여행의 견문과 정회를 담은 기행시집인 「매월당시 사유록(梅月堂詩 四遊錄)」을 남겼다.
31세 때부터 경주의 남산(일명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정착하였으며, 이 시기에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우는 「금오신화」를 창작하였다.
37세(성종 2년) 때는 상경하여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세우고 몸소 농사를 지어 생계를 영위하며 살아갔다. 47세 때 환속을 하여 결혼을 한 일이 있었으나 이듬해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으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49세(성종 14년) 때 그가 서울에 오자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정치현실이 근본적으로 옳은 방향을 취하고 있다고 보지 않아 현실참여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실의와 좌절감에 사로 잡혀 기행을 저지르기도 하더니 마침내 다시 현실권을 떠났다.
그는 소양호 주변의 청평사, 설악산 등지에서 한동안 머물렀고, 다시 강릉지방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충청도 홍성 무량사(無量寺, 현 충남 부여군 의산면)로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59세(성종 14년)였으며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浮圖)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