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남

                                                                                                                                                                                                                                                           

1.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목왕후의 아버지이다.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였다.

▶별칭 : 자 공언(恭彦), 시호 의민(懿愍)
▶성별 : 남
▶시대 : 조선 중기
▶출생~사망 : 1562~1613
▶출생지 : 서울
▶본관 : 연안(延安)
▶주요업적 : 이조좌랑,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

2.생애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을 지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상(權常)의 딸이다. 종조부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희락당 김안로이고,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전이다. 또한 김전의 아들로 윤원형의 장인인 김안수 또한 그의 종조부였다. 조부 김안도(安道)는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3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강씨(姜氏)에게 양육되었다.
  1585년(선조 18) 식년과 사마시를 거쳐 159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다시 연천현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0년에야 연천현감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1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597년(선조 3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특별 승진하여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가 그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후 승지, 대사간, 참의, 부제학, 도승지, 대사헌, 참판, 제학, 부총관, 훈련대장, 도총관, 지의금부사, 한성부판윤, 대제학, 판서, 좌우참찬, 판의금부사, 좌우찬성, 정승의 후보에 여러번 오르기도 했으나 사양을 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1613년 손자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서소문(西小門)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의 아들 셋도 화를 입었고, 부인과 며느리 정씨, 어린 손자 천석(天錫) 등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대두되어 딸 인목왕후가 폐비되자 그도 이이첨 등의 주도로 부관참시되었으며 부인 노씨에게는 위리안치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3.업적

  • 인목대비의 아버지
  •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을 탈환함

4.관련 유물 및 유적

  • 김제남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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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